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88화 (188/200)

=======================================

[188] 마족들의 고아원(1)

따뜻하다. 숲에서 잠을 잘 땐 느껴본 적 없는 기분 좋음이다.

마치 푹신한 침대에 누워 햇볕에 뽀송뽀송하게 말린 이불을 덮고 자는 기분이다.

매일 들판에 누워 자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역시 침대란 위대한 발명품이구나.

‘그런데 숲에 침대가 왜?’

엘프들은 나무늘보처럼 나무 위에서 잔다. 침대를 만들지 않는다. 침대를 만들려면 당연히 나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대체 이 침대는 뭐지?

‘에라 모르겠다. 기분 좋으면 됐지 뭐.’

굳이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기분 좋게 잘 수 있으면 만사 오케이 아니겠어?

“……대체 왜 그런…….”

하지만 벌써 반 쯤 잠이 깨어버린 탓에, 선잠을 든 것처럼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떤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핀이나 필로우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살짝 고양된 높은 목소리. 누군가 혼나고 있는 것일까? 대체 누구지?

“……응?”

게다가 얼굴이 간지럽다. 누군가의 숨결이 내 얼굴을 간질이고 있었다. 거기에 어째서 아기에게서나 맡을 법한 분유 냄새가?

“헤헤.”

남은 잠을 몰아내고 눈을 떴을 때, 나는 거대한 어린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일어났다!”

“우와! 정말!? 일어났어?”

“나도 볼래!”

내 얼굴을 모공 하나하나까지 관찰하려는지, 얼굴을 바짝 붙이고 있던 마족 꼬마아이가 소리치자, 주변에서 웅성거리며 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곧 다시 잠들 수 없음을 깨달았다.

“으악! 그, 그만 만져! 뭐야!?”

“나도 만질래! 인간이다!”

“인간 신기해!”

“머리가 검은색이 아니야. 뿔도 없어!”

어린 마족들이 내 얼굴을 찹쌀떡 주무르듯 마구 주물렀다. 애들 손이라 보들보들해서 기분은 좋은데, 어째 애완동물이 된 기분이라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 그만 만져!”

“으앗! 인간이 화냈어!”

“엄마가 인간이 화나면 무섭다고 했는데!”

그만 만지라는 말 한마디에 아이들이 뒤로 물러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대체 인간에 대해 무슨 교육을 받았기에 목소리 조금 높인 것만으로도 이렇게 두려워할까.

도망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조금 장난기가 들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의 뒤를 쫓았다.

“크흐흐. 내가 바로 삼신 할배다. 못된 아이들은 모두 잡아가주지!”

“으악!”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아이들. 그래도 진심으로 무서워한다기보단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는 게 이렇게 노는 걸 즐기는 것 같다.

나도 나름 즐기고 있고. 후후. 아이들이랑 노는 건 항상 즐거운 법이지.

“재미있으신가 봐요?”

그 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자리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전, 나의 잠을 깨웠던 여성의 목소리였다.

내 뒤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머리카락에 단단해 보이는 뿔을 가진 여인.

아이들의 엄마인 것일까? 앞치마를 두른 여인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 붉은 눈동자를 내게로 향했다.

“어…… 재미는 있는데…… 부끄럽네요.”

으윽. 얼굴이 후끈거린다. 아이들이랑 놀아주는 게 나쁘거나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처음 보는 남의 집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이름 모를 여인, 아마도 베르제의 어머니겠지? 그 이상한 마법진이 생겼을 때 분명 베르제가 엄마라고 외쳤으니까.

“베르제는 어디 있나요?”

“여기…….”

베르제 어머니 뒤에서 베르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여 그녀의 뒤쪽을 살펴보자, 베르제가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고 있었다.

벌 받는 중이냐!

“저희 아이가 폐를 끼치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하하! 아뇨. 딱히 그런 건 없었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그나마 다행이군요. 차라도 드시겠어요? 홍차? 녹차?”

“으음, 홍차로…….”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즐겁게 물을 끓이는 모습이 손님을 맞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런데 나, 이상하지 않았지? 남의 집에 갑자기 오게 돼서 그런지 좀 긴장되네.

“아! 그러고 보니 여긴……!?”

“걱정하지 마세요. 곧 숲으로 돌려보내 드릴 테니까. 베르제의 벌이 끝나고 며칠 안으로 돌려보내드릴게요.”

으음. 그래도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 텐데. 핀이랑 아이들이 걱정하고 있지 않을까. 엄청 걱정하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아이치곤 말투가 굉장히 독특하시네요. 꼭 어른인 것처럼 말하다니.”

으윽. 내 말투가 그렇게 이상했나. 하긴, 겉모습은 베르제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 보이는데 말투만 어른이니 이상할 수밖에.

어떻게든 어색한 순간을 넘기기 위해 나도 모르게 아무 핑계나 대 버렸다.

“제가 원래 애늙은이 소리 좀 듣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핑계냐! 이 빌어먹을 뇌야! 아니, 뇌가 문제가 아니라 입이 문제인 건가? 어쨌든!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었지만 한 번 쏟은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민망한 마음에 나를 보고 웃는 베르제 어머님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후훗. 재미있네요. 애늙은이라니. 농담이었어요. 나이 또래에 잘 어울리는 말투인걸요?”

“그, 그런가요?”

“네. 겉모습은 어리지만 엄연히 어른이잖아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내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내가 세계수인 걸 알고 있다면, 세계수라고 불렀겠지만 그녀는 마치 내가 다시 태어난 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나는 아직도 벌을 받고 있는 베르제를 쳐다보았다. 베르제는 눈알이 빠지도록 나를 노려보며 눈빛으로 ‘뭘봐!?’라고 외치고 있었다.

베르제가 말한 건 아니군. 하긴, 저 녀석은 내가 세계수인 것도 모르고 있으니 그럴 리 없지. 내 정체를 알리도 없고.

아니지. 세계수인 건 알고 있으려나? 엘프들은 나를 세계수님이라고 불렀으니까. 근데 딱히 반응이 없던 걸 보면 세계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건가?

내가 이런 저런 고민을 떠안고 있는 것과 달리, 베르제의 어머님은 평온한 일상을 즐기는 것처럼 방금 막 끓인 홍차를 내게 가져다주었다.

그나저나 이 세계에도 홍차가 있었구나. 전에 도시에 갔을 땐 못 본 것 같은데.

“자. 여기 있어요.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솔직히 나는 홍차 맛을 모른다. 그냥 그녀가 말했기에 녹차보단 고급스러운 음료수라 생각하고 마시는 것일 뿐이다.

근데 나, 홍차는 마실 수 있을까? 물 외엔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게 없는데.

“후후. 특별한 마법을 걸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지금 말투는 꼭 내가 물 말고 다른 건 못 마실거라 생각하는 말투처럼 들렸다. 내가 너무 과민한 건가?

근심 반, 걱정 반으로 김을 모락모락 풍기고 있는 잔에 입을 대었다. 목으로 넘어가는 씁쓸한 홍차의 맛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마실 수 있네.’

“어때요? 괜찮죠?”

“감사합니다. 맛있네요.”

달고 감칠맛 있는 것만이 맛의 전부는 아니지. 가끔은 커피처럼 씁쓸한 맛도 맛있게 느껴질 때가 있는 법이다.

멀리서 아까 도망간 아이들이 나를 훔쳐보다가, 베르제 어머니 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엄마. 차는 어른이 아니면 마시지 말라면서요.”

“맞아. 우리도 마시고 싶어요! 왜 쟤만 줘요!”

“혹시 인간은 어린아이 때부터 차를 마시는 걸까?”

“다들 조용. 어른이 되면 마실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지금은 안 돼요.”

아이들을 달래는 베르제 어머니. 아이들이 그 말에 포기하고 내 쪽으로 다시 몰려드는 순간, 벌을 받고 있던 베르제가 투덜거리듯 말을 흘렸다.

“쳇. 다 거짓말이라고. 돈이 없어서 그런 거야. 그래서 비싼 차는 손님 말곤 못 마시게 하는 거라고.”

“베르제에?”

“으윽. 잘못했어요…….”

“그래. 그럼 이제 손 내려. 그리고 엄마랑 이야기 좀 해볼까?”

“베르제 오빠 혼나나 봐…….”

“형 또 혼나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는지, 아이들은 베르제가 손을 내림과 동시에 다른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으음. 이 상황을 보아하건데 아무래도 베르제 어머니가 화를 내면 상당히 무서운 모습일 거라고 추측할 수 있었고, 나 역시 아이들을 따라 다른 방으로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계셔도 되요. 당신이랑도 상관있는 문제니까.”

“어. 네…….”

반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뭔가 표정이 온화하면서도 무서워 아무 말 못하고 그냥 자리에 그대로 멈춰버렸다. 아이스 파이어라는 게 실존한다면 저런 표정이 아닐까? 차가운 표정 아래 숨겨진 뜨거운 분노…….

그런데 대체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혹시 베르제랑 친해져서?

그녀는 나를 보고 싱긋 웃더니, 다시 베르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언제 꺼냈는지 무거워 보이는 갈색의 주머니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짤그락하는 소리와 함께 주머니가 옆으로 무너지자, 그 안에서 노란빛의 밝은 금화가 무더기로 쏟아져나왔다.

“베르제. 이 돈, 어디서 구했니? 엄마가 언제 돈 필요하다고 했었어?”

“하, 하지만 돈이 없는 건 사실이잖아요! 그래서 맨날 남은 밥만 드시면서!”

“그래. 돈이 필요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엄마가 해결해야 할 일이지. 네가 도둑질을 하면서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잖아. 엄마가 도둑질은 뭐라고 했었지?”

“……최후의 최후까지 굶어서 죽을 지경이 되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요.”

저기요. 도둑질을 아예 말리시진 않으셨네요? 물론 굶어 죽는 것보다야 범죄자가 되는 게 낫긴 하겠지만 그 전에 먹고 살 방법을 가르치는 쪽이 더 좋지 않을까요?

“그럼 어서 말해. 그 물건, 어디에다 팔았어?”

“알고 계셨어요?”

“그럼. 엄마는 다 알고 있어.”

“그러면 제가 어디 팔았는지도 알아야…….”

베르제 어머니가 맹렬한 눈빛으로 베르제를 쏘아보았다. 메두사의 시선이 이러할까. 순식간에 몸이 굳은 베르제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괴, 괴짜 할아버지한테 팔았어요.”

“후우. 역시 그랬구나. 이제 따라 나오렴. 다시 물건을 돌려받아야 하니까.”

그리고 그녀가 내게도 말했다.

“그리고 당신도요. 함께 가요.”

“……네.”

그냥 집에 있겠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베르제에게 보냈던 시선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인데, 저절로 몸이 굳으며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무서운 어머니다.

“치……. 그 돈이면 집도 좋은 집으로 사고 장난감도 많이 살 수 있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데…….”

베르제의 투덜거림으로 미루어 봤을 때, 광룡의 갑옷을 매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어머니께 생신 선물로 가져다 줬다더니만. 현금으로 매각해서 돈으로 드린 거였냐. 그래서 제대로 돌려줬냐는 말에 제대로 대답을 못 했구먼. 돌려주기는커녕 그냥 가출했던 거니까.

그리고 나는 밖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베르제의 집으로 칭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베르제에게 형제가 많이 있는 이유도, 베르제 어머니의 남편이 일을 나간 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어?”

건물 앞에 있는 문 위로 아치형으로 만들어 진 간판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곳엔 똑똑히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세…… 화…… 고아원……?”

하지만 이곳이 고아원이라는 사실보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따로 있었다.

간판에 적힌 글씨는, 아버지께 받은 지식에는 존재하지 않던 언어였다.

마족의 언어까지 모두 들어 있던 아버지의 지식이거늘, 이 언어만큼은 들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간판에 적힌 글씨를 읽을 수 있던 이유.

오로지 나만이, 어쩌면 내 지식을 건네받은 핀과 아이들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문자.

간판에 적힌 글씨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지만 이것은 틀림없는 그 문자였다.

바로 내 고향의 언어. 한국에서 사용하던 그 문자.

“한글이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