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87화 (18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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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가출한 고양이(3)

“여기구나.”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움푹 파인 구덩이. 깊고 넓은 구덩이는 작은 언덕을 넣어도 충분히 들어갈 만한 사이즈였다.

그 구덩이 주변에 피어 있는 하얀 백합. 무리를 지어 하얗게 주변을 물들이고 있는 그 꽃들을 밟지 않고 조심스럽게 구덩이 주변으로 이동한 베르제가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침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기, 베르제.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베르제는 이제 완전히 예전에 내가 알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더 이상 울지도 않고, 냉정한 표정으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 아래 숨겨진 눈빛이 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빛만큼은 전과 다르게 나를 가까운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마왕님이라니. 설마 천 년 전에 죽은 마왕을 말하는 거야?”

“마왕이 아니라 마왕님이라고 불러. 어른이라고. 돌아가신 분한테 막말하는 거 아니라고 어머니가 그랬어.”

‘아까까지만 해도 엄마라고 하더니만…….’

“끄응……. 그래. 알았어. 마왕님이라고 부를게.”

말을 정정하자 베르제는 이제 됐다는 듯이 다시 구덩이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나는 내가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르게 행동하는 베르제를 보며 의문에 빠졌지만, 그에게 물어보기엔 감히 함부로 말을 걸 수 없을 만큼 구덩이에 집중하고 있어서 그냥 조용히 그의 곁에 서서 함께 하였다.

“여기서…… 마왕님이 돌아가셨구나.”

“그렇지. 세계수와 함께…… 죽…… 돌아가셨지.”

힐끗 베르제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구덩이를 보는 그의 눈빛은 동화 속에 나오는 용사나 공주 같은 영웅들이 다녀간 자리를 지켜보는 선망어린 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궁금한 점을 그에게 물어보았다.

“저기, 마족은 마왕님을 좋아하는 거야?”

“그건 왜?”

“아니, 내가 알기론 천 년 전에 마왕……님이 나타났을 때, 모든 종족을 남김없이 죽이려 했다고 들어서. 마족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맞아. 마족도 그때 많이 죽었다고 들었어. 그래서 마족들도 마왕님을 별로 안 좋아해.”

별로 안 좋아하는 수준이 아닐 텐데? 두려워하거나 증오하는 수준이 아닐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긴 해. 마왕님만큼 강한 사람은 없다고, 마왕님처럼 강해지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어.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또 다른 사람들은 싫어하고……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진짜로? 정말로 진짜 몰라서 그러는 거냐! 베르제 어머니. 대체 애한테 무슨 내용을 가르쳐 주신 겁니까? 역사관은 확실히 가르쳐야죠! 혹시 당신도 베르제가 방금 말한 것처럼 마왕을 동경하는 마족인 것입니까?

“우리 어머니도 좋아하셔. 나랑 동생들이 어렸을 때도 항상 ‘나는 마왕이다!’라며 우리한테 자랑하셨었어. 요즘에도 마왕이라고 하시는데, 이젠 다들 익숙해져서 아무도 뭐라 안 해.”

베르제 어머님. 팬심이 지나쳐도 좋지 않습니다. 본인이 마왕이라니. 설마 밖에서도 그러시는 건 아니겠죠? 인간들이 있는 곳이나…… 엘프들이 있는 곳에서 그러시면 큰일 나실 텐데…….

“너는 왜 마왕님이 좋은데? 마왕님이 좋아서 여기까지 온 거야?”

“한 번 보고 싶어서. 마왕님이 싸우다 돌아가신 곳이라기에. 정말 듣던 대로 무시무시한 흔적이네…….”

보통의 소년이라면 무서워해야 정상일 것이다. 아래로는 암흑밖에 보이지 않는 깜깜한 구덩이 바로 앞에 서서, 등 뒤에서 바람이라도 불면 아래로 추락할 것 같은 위치에서 태연스럽게 경치를 감상하기란 불가능하겠지.

한참이나 구덩이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나는 과거의 일이 떠올라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주변에 피어 있는 하얀 백합꽃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있지 않았더라면 베르제의 옆이 아니라 한참 뒤에 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저기. 베르제. 마족이란 어떤 존재야?”

침묵이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못마땅했기에, 나는 베르제에게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묻는 건 아마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우선 평범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족이 궁금해?”

“너 말고 다른 마족은 친해진 적이 없어서.”

“우리 안 친하거든!?”

버럭 화를 내는 베르제. 하지만 그 모습은 어린아이가 부끄러워 투정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한 번 화를 낸 베르제는 정면으로 고개를 휙 돌리곤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마족들은 다들 강한 걸 좋아해. 그래서 마왕님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마왕님이 마족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거든. 하지만 또 싸움을 좋아하는 건 아니야.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강함이 정해져 있으니까. 싸움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가끔 벌어지곤 하지.”

“강한 걸 좋아하는데 싸움은 좋아하진 않는다라…… 그래서 가출한 거야?”

“무, 무슨 소리야!?”

“왜, 자면서 잠꼬대로 그러던 걸. 나는 싸움 밖에 모르는 바보라고…….”

“으아악! 말하지 마!”

으음. 역시 상대에게 자신의 잠꼬대를 알려주는 건 흑역사를 들추는 것만큼 파괴력이 있군. 좀 더 놀려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진짜로 삐질 것 같아서 못하겠네.

“그냥……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 내 마음대로 일을 저질러서 그랬을 뿐이야. 그것 때문에 조금 혼나서…… 그래서 그런 거였다고.”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싸움이라도 한 거야?”

“…….”

베르제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본인은 부정하지만 혼나고 가출한 게 맞는 것 같다.

“어머니께 생일 선물을 드리고 싶었어. 어머니는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그동안 친자식도 아닌 우리들을 키워 준 보답을 하고 싶었거든.”

그 순간, 나는 베르제가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면을 향하고 있는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투 대회에 참가했었어. 어머니가 항상 마왕님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광룡에 대해 말하셨거든.”

“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군.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라니. 온 세상 사람들이 아버지를 미쳤다고 하는데 과연 베르제의 어머니는 무어라 설명하셨을까?

“마왕님과 용맹하게 싸웠던 유일한 용이라고. 다른 용족들은 전부 산맥에 꽁꽁 숨어서 지금까지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데, 홀로 세계수를 도와 마왕님과 대적한 멋진 용이라고 하셨었어.”

“음. 그렇군.”

“왜 네가 좋아하는 거야?”

“그냥. 내가 광룡 팬이거든.”

기분이 좋군. 어머니 말고 처음으로 아버지를 칭찬해 준 사람을 만나다니. 베르제 어머니. 아주 자식 교육을 잘 시키셨군요.

아닌가. 흐음. 솔직히 아버지가 민폐 덩어리긴 하셨는데…… 어머니가 딱히 칭찬해주신 적도 없고…… 오히려 알몸으로 나타나셨을 때 도망까지…….

더 생각했다간 패륜이니 이제 그만 생각해야겠다.

“그래서 무투 대회에 참가해 광룡의 비늘로 만들었다는 갑옷을 손에 넣으려고 했었던 거야. 도중에 귀찮아서 그냥 훔쳤지만…….”

“그렇지. 핀이랑 싸우다가 갑자기 포기하고 그냥 갔었지. 그게 훔치러…… 뭐!?”

아니, 그거 훔쳐간 사람이 너였냐!

내가 한소리 해주려 했지만, 베르제가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혼났어. 당장 가서 돌려주고 오라고. 왜 물건을 훔치냐고…… 그래서 도로 가져다 두려고 했는데…….”

“했는데?”

“……말하기 싫어. 이제 그만 말할래. 너한테 다 말해줄 의무는 없잖아.”

끄윽. 그래서 대체 어떻게 했다는 거야. 궁금해 미치겠네.

“말해주면 안 돼? 어떻게 했는데? 광룡의 갑옷을 원래 주인한테 돌려준 거야?”

“싫어. 말 안 해.”

“말해줘.”

“싫어.”

“말해달라니깐?”

“싫다니깐?”

으. 대체 아버지의 갑옷을 돌려준 거야, 안 돌려준 거야? 돌려주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으니까 잘 가지고만 있어주면 좋겠는데.

더 이상 물어봤자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베르제도 나를 힐끗힐끗 훔쳐보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더 안 물어봐?”

“물어봐도 안 알려준다며. 어차피 남남인데 나한테 꼭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나도 이해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베르제의 갑작스러운 물음. 생뚱맞다고 생각되는 물음이지만, 나 역시 그 물음의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처음 그를 본 순간부터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너도 느끼고 있었어?”

“그게 아니라면…… 너한테 보살핌 따위 받지 않았을 거라고.”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느낌을 공유하고 있었다. 무언가 그리운 듯한 느낌. 오랫동안 헤어진 가족과 만난 것만 같은, 가슴 한편이 아련한 기분이었다.

핀이나 다른 아이들에게서 느끼는 감정과 달랐다. 그 아이들에게도 역시 가족이라는 기분은 느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베르제에게서 느끼는 가족을 만나는 것 같은 느낌과는 또 사뭇 색달랐다. 뭐라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너랑 같이 있으면 어머니랑 같이 있는 기분이야. 어머니랑 같이 있을 때도 이렇게 마음이 편했는데…….”

“나도 이상하게 너랑 있으면 다른 아이들이랑 같이 있는 기분이야. 그거랑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거의 비슷한 기분이랄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엘프 마을에서도 나의 또 다른 형제가 있었으니, 베르제도 혹시 내가 모르는 형제와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 추측은 절대로 성립할 수 없었다. 베르제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세계수의 마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베르제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역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로 시선을 맞추고 있자니 그 기분이 더욱 증폭되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상한 상상은 하지 말자. 사랑은 아니니까. 확실하다구!

“저기, 내가 갑옷을 어떻게 했는지 정말 궁금해?”

“응. 궁금해. 말해주지 않을래?”

“……알았어. 말해줄게. 내가 갑옷을 어떻게 했냐면…….”

그 순간, 나는 머리 위에 무언가 빛이 내리쬐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보니 육망성이 그려진 이상한 문양의 마법진이 나와 베르제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어, 엄마!?”

당황한 나머지 베르제가 엄마라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도망치려고 발을 떼는 순간…….

“흐익!”

“으악!”

마법진이 거대해지더니 우리 두 사람을 향해 떨어져 버렸다.

나는 마법진에 흡수되는 순간,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그래. 마족들은 마법이 뛰어나다고 했지. 베르제가 엄마라고 외쳤으니 이것도 그 분의 마법일까.

가출한 아들 녀석을 잡는 마법이라. 정말 편리하군.

그렇게 현기증을 느끼며 정신이 점차 육신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본체로 돌아가든지, 기절하든지 둘 중 하나겠지.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억울한 마음을 생각하며 잠이 들 듯 정신을 놓아버렸다.

‘아니…… 왜 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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