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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주문은 토끼입니다(2)
아인족의 비약을 먹은 필로우. 그 비약의 지속시간은 길어야 삼 일. 그 삼 일 중 벌써 하루를 아무 의미 없이 보냈고, 삼일 째엔 언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지 몰랐기에 기회는 오늘 하루뿐이었다.
그리하여 필로우는 급박하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다.
‘잘 통할지 모르겠소이다.’
그녀가 첫 번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위그드라실을 찾아갔다. 아직도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걷는 것마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주공……. 혹시 시간 있으시옵니까?”
“응? 시간? 널널한데. 왜?”
“그, 그게…… 혹시 소인과 함께 숲에 가주실 수 있나 하고…….”
“숲은 왜?”
“그, 그러니까 소인이 이번에 새로운 기술을 연마했는데 한 번 봐주시면 어떨까 하고…….”
거짓말이었다. 폭포수를 맞으며 항상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명상을 해온 그녀가 새로운 기술을 연마할 시간이 있을 리가.
하지만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위그드라실을 숲으로 데려가야만 했다.
‘이곳은 안 된다!’
그 이유는 바로…….
“아빠? 필로우? 어디 가려구요?”
“응? 핀? 필로우가 새로운 기술을 보여준다고 해서.”
이곳에는 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핀이 위그드라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필로우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감정이 가족을, 아버지를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 명의 남자로서 위그드라실을 좋아하는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따로 떨어지지 않는 이상 그녀가 계속 위그드라실 옆에 머무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고백의 찬스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큭.”
“필로우?”
갑자기 끼어든 핀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버린 필로우. 그녀가 긴 바지 소매를 땅에 질질 끌며 위그드라실의 손을 잡고 숲으로 이끌었다.
“아씨는 여기 계셔도 되오! 아직 완성된 기술이 아니기에…… 주공께만 보여드릴 것이오!”
아장 아장 걷는 아기처럼 열심히 뛰고는 있지만 느릿하게 위그드라실과 함께 숲으로 사라진 필로우.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핀이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술? 대체 뭔 소리야?”
* * *
“필로우. 어디까지 갈 거야.”
“거, 거의 다 왔소이다.”
필로우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행히 핀이란 꼬리표는 딸려오지 않았다.
“저기 필로우. 나 슬슬 손 아픈데.”
“허억! 죄, 죄송하오이다!”
인식하기 전엔 몰랐지만 위그드라실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필로우가 당황하며 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벌써부터 작전이 성공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 같아서 그녀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좋소이다. 지금부터 시작이외다!’
그렇게 계획했던 장소로 위그드라실과 함께 이동한 필로우. 그녀는 전 날 밤에 계곡 사이에 미리 만들어 둔 다리로 향했다.
“응? 여기에 다리가 있었나?”
“하하…… 조금 불편한 것 같아서 소인이 얼마 전에 만들어 놨소이다. 자. 저 너머에서 기술을 보여드릴 테니 함께 건너가는 게 어떻겠소이까?”
“으음…… 그냥 여기서 보여주면 안 돼?”
“너무 큰 기술이라 자칫 잘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다칠 수 있어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는 위그드라실. 필로우는 자신의 작전이 들킬 것만 같아서 또다시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건너자.”
‘좋았어!’
필로우가 만든 다리. 그것은 허술하기 짝이 없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위태로운 다리였다.
그것조차 모두 필로우가 계획한 단계의 일원. 그녀는 마력의 실을 엮어 만든 허술한 다리를 이용해 위그드라실과의 해프닝을 노리고 있었다.
‘인간은 무서운 감정과 사랑의 감정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고 들었소!’
계획 1. 위그드라실과 다리를 건너간다.
계획 2. 중간에 마력의 실을 끊어서 다리가 아슬아슬하게 끊어질 것 같은 상황을 만든다.
계획 3. 위그드라실이 공포에 빠지면 자신이 구해준다.
‘성공하고 말겠소이다!’
그렇게 작전을 떠올린 필로우는 위그드라실과 다리 중간지점에 도착하자 마력의 실을 끊어 버렸다.
“어어?”
옆으로 살짝 기울어버린 흔들다리. 위그드라실이 다리의 줄을 잡으며 매달린 채 필로우에게 손을 뻗었다.
“필로우! 내 손 잡아!”
“소, 소인은 괜찮소이다.”
‘이, 이게 아닌데!’
위그드라실을 구해줘야 하는 대상은 바로 자신이어야 하거늘, 그녀가 행동하기 전에 위그드라실이 역으로 그녀를 구해주는 모양새가 돼버렸다.
“자. 어서.”
‘작전을…… 실행해야 하는데…….’
멋지게 그를 구해줘야 하거늘, 그가 내민 손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던 필로우는 결국 위그드라실의 손을 잡고야 말았다.
“바람이여.”
위그드라실이 이전에 벨루스가 남긴 쪽지에 적힌 마법을 사용했다. 비록 아무런 도움 없이 하늘을 나는 마법은 없었으나, 바람을 이용한 마법은 있었고 몸이 가벼운 두 사람 정도는 충분히 띄울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바람을 타고 다리 너머로 건너갔다. 건너가는 와중에 위그드라실은 손만 잡은 게 아니라 필로우가 떨어지지 않도록 꼭 끌어안아주었다.
‘아…… 심장이…….’
따뜻한 위그드라실의 품에 안긴 필로우. 거칠게 뛰는 심장소리가 혹여나 그에게 들릴까 봐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고백을 하려고 했거늘, 이런 식으로 들키는 것은 싫었다.
“후우. 위험했네. 다음부턴 좀 더 튼튼하게 만들어야겠어.”
“예? 아. 예! 알았소이다! 트, 튼튼하게 만들겠소이다.”
“그래서. 내게 보여준다는 기술이 뭐야?”
첫 번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녀는 무사.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다른 계획도 세워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선 좀 더 들어가야 하오이다.”
“흐음…… 여기도 충분히 외진 곳인데.”
필로우의 다음 계획. 그것은 바로…….
‘이판사판이다! 그냥 소인의 마음을 전달해 보는 것이오!’
……그렇다. 애초에 연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필로우가 계획을 세워봐야 얼마나 세웠겠는가? 고작 흔들다리에서 노린 계획 외에는 준비된 계획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무사도를 자청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은 단 하나. 직접 마음을 부딪쳐 보는 것.
그런데 마음을 고백할 거라면 지금 있는 위치에서 해도 충분하지 않던가? 왜 그녀는 더 인적이 드문 곳으로 위그드라실을 데리고 가려는 것일까?
‘말해야 한다! 말해야 해! 말해야 하는데…….’
이유는 단 한 가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고백이란 정말 쉽다. 단 한마디, 말 한마디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평생 말해온 것 이상으로 무겁고 꺼내기 힘든 말이기에, 필로우는 위그드라실과 함께 걸으며 결의를 다지기 위해 시간을 끌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위그드라실과 숲을 걷게 된 필로우. 중간 중간 마음을 굳히고 말하기 위해 위그드라실을 보았지만, 그 때마다 용기가 사라지며 계속해서 시간을 지체했다.
필로우의 지체하는 마음과 다르게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며 저녁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이제 진짜로 말해야 하는데…….’
“저기 필로우?”
“부르셨습니까! 주공!”
깜짝 놀라며 위그드라실의 부름에 답하는 필로우. 그녀의 당황한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위그드라실이 손을 뻗었다.
“주, 주공?”
필로우는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그 작고 아담한 손바닥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거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의 손길은 왜 심장이 뛰지 않는 것일까?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이 좋은 것은 왜 일까?
“혹시 무슨 고민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내게 상담하고 싶어서 그런 거지?”
“그런 게 아니오라…….”
“다 알아. 필로우. 너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혼자 의젓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잖아. 곰도, 핀도 그렇지 못하는데. 오로지 너만이 어른처럼 헤쳐 나가려고 한다고.”
“…….”
확실히 지금까지 필로우가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무사라면, 주인을 지키는 자라면 주인에게 의존해서는 안 되니까. 필로우에겐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 모습이 위그드라실에겐 대견스럽게 보였고, 그는 오늘 따라 당황하며 자신을 따로 부른 필로우가 큰 문제를 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혹시라도 고민이 있으면 내게 말해주지 않을래?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족으로서 네 도움이 되고 싶은데.”
“……주공.”
석양이 깔리며 온 세상이 붉은 노을로 뒤덮였다. 필로우의 눈에 비친 위그드라실의 모습도 그 석양 속에 잠겨 자신과 같은 붉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함께 석양에 잠긴 이 순간, 필로우는 난생 처음 운명이라는 것을 느꼈다.
한 번 놓치면 다시는 손에 쥘 수 없는, 기회의 앞머리 채가 자신의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운명의 갈림길이 자신 앞에 도래했음을.
“주공.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마음이 차분했다. 지금까지 설레발을 치며 심장을 뛰게 만들었던 설렘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그드라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변한 것도 아니었다.
“주공. 사실 소인은…….”
필로우가 입을 열었다. 지금이다. 그가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지금 이 순간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다.
나의 마음을 고백하겠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주공을 사…….”
“두 사람 다 여기서 뭐해요?”
“흐어억!”
마주보고 있던 두 사람 사이로 한 명의 엘프가 끼어들었다. 노을이 짙게 깔려 얼굴에 음영이 들었지만 위그드라실도, 핀도 지금의 불청객이 누군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핀?”
“아, 아씨!?”
“헤헤. 해가 졌는데도 두 사람 다 코빼기도 안 보이기에 찾으러 나왔잖아요.”
당황해하는 필로우. 무덤덤한 위그드라실. 그 두 사람을 번갈아보던 핀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요?”
“응. 필로우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아서 좀 들어주고 있었어. 필로우. 사…… 다음에 뭐야?”
“으음. 그, 그러니까…… 사…… 사과! 사과드리고 싶었소이다! 지금까지 주공께서 저희에게 이렇게 지식을 주고 자식처럼 돌봐주셨는데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한 적이 없지 않소이까! 그게 영 마음에 걸려서…….”
“으잉?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하.하. 그냥 그렇소이다. 뭐, 소인에게 고민이 있겠소이까? 숲에서만 지내는데. 소인의 고민이라곤 더 강해져서 주공과 숲을 지켜야 한다는 그런 단순한 고민밖에 없소이다!”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 필로우. 그렇게 제 할 말만 끝낸 필로우가 앞장서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가야 하지 않겠소이까! 소인이 앞장서겠소이다!”
그녀의 붉어진 혈색을 석양이 가려줬다는 것이 마냥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 * *
‘크흑! 이렇게 모든 게 끝이 나는구려…….’
그날 저녁, 필로우가 밤하늘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비약을 먹고 나서 이제야 알 수 있었지만, 몸이 곧 원래대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길어야 오늘 밤이 마지막. 곧 아침 해가 뜨면 원래의 혼래빗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소이다.’
그녀가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위그드라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곰이나 핀과 다르게 의젓한 어른처럼 자신을 생각해주지 않았는가.
비록 고백은 하지 못했지만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해 준 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했다.
‘아니! 그래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소이다!’
그녀가 위치한 곳은 위그드라실이 있는 곳과 가까운 곳. 이대로 몸을 굴려 위그드라실의 품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혹여나 주공이 의심이라도 한다면 그냥 잠꼬대라고 하면 되지 않소이까! 그렇소!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전에 주공의 품에 다시 한 번 안겨야겠소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진 필로우가 몸을 굴러 위그드라실이 있는 곳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러나, 그녀는 곧 중간에 마주친 장애물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씨?”
“음냐…… 부드러운 거…….”
“그, 그 버릇 고친 거 아니었소이까!”
“물렁물렁…….”
“하읏! 거, 거긴 아니 되오! 아, 아니! 예전이랑 다르게 이번엔 묘하지 않고 그냥 아픈데……!?”
몸을 격하게 주무르는 핀의 손길에 필로우가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차마 다른 사람들이 잠에서 깰까봐 이를 악물고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끄윽…… 너무 아프오이다…….’
“기분 좋아…….”
간만에 핀의 잠꼬대에 당한 필로우. 한동안 잠꼬대가 없어서 이제 다 치유된 줄 알았건만, 갑자기 다시 발동한 그녀의 잠꼬대가 원망스러운 필로우였다.
그러나 필로우는 알지 못했다. 고통을 참느라 미처 핀이 속삭인, 잠꼬대라고 하기엔 또렷한 목소리를.
“후후…… 아빠는 못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