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83화 (18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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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주문은 토끼입니다(1)

엘퀴라즈 숲으로 돌아온 위그드라실 일행.

모든 것이 예전과 같은 느긋한 하루가 지속되고 있었다.

위그드라실은 핀의 무릎베개를 하며 낮잠을 자고 있었고, 핀은 그런 위그드라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엘프들은 숲을 거닐며 혹시 모를 침입자를 경계했고, 필로우는 오늘도 열심히 수련에 열중하며 잡념을 날려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단 한 명만이 일상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고홈…….”

「하아…….」

바로 곰이었다. 란이 주었던 약의 효과가 다해 곰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곰.

란과 헤어진 후로 곰은 쭉 마음 한 구석이 빈 것 같은 괴로움을 겪으며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곰의 손에 들려 있는 꽃. 다른 이들이 본다면 어울리지 않게 뭔 꽃을 들고 있냐고 묻겠지만, 곰은 꽃을 감상하거나 냄새를 맡기 위해 꺾은 게 아니었다.

“곰…… 곰…….”

「결혼한다…… 안 한다…….」

그가 지금 치고 있는 꽃 점의 대상은 바로 란의 결혼여부.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했는지, 아니면 첫사랑의 후유증인지 마음이 싱숭생숭한 상태였다.

하지만 꽃 점으로 치고 있는 란의 상대는 곰 자신이 아니었다.

“곰! 고옴!”

「결혼한다! 안 돼!」

결국 마지막 꽃잎과 함께 결혼한다로 끝나버린 점의 결과에 곰이 반항이라도 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곰이 치고 있던 란의 결혼 상대는 바로 쿤. 아직 마음을 다 접지 못한 곰은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고옴…… 곰!”

「결혼 안 하고 그냥 산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다!」

비록 쿤도, 그리고 란도 결혼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남녀가 서로 부대끼고 살면 그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한창 때의 남녀이지 않은가? 주변에 다른 상대도 없고. 생활공간도 같으니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 알아 갈 것이고, 그러다보면 눈이 맞아서…….

“코오옴!”

「싫어어어어!」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다시 한 번 꽃 점을 치기 위해 꽃을 따는 곰. 이 모습을 엘프들이 본다면 위그드라실의 자식이고 뭐고 곰을 때려잡기 위해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곰은 란의 결혼에 집착하는가? 이미 끝난 일이 아니던가?

“곰! 고옴!”

「놓치기 싫어! 그냥 남아 있을 걸 그랬다!」

……곰 역시 첫사랑의, 또는 사랑의 아픔을 겪은 수많은 남자들처럼,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며 청승을 떠는 과정을 겪고 있던 것이다.

가까이 있을 땐 미처 알지 못했다가, 막상 떠나고 나서야 후회하는 사랑을 겪은 남자들의 주특기. 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꽃 점을 치던 곰이 마침내 ‘결혼하지 않는다.’라는 결말을 가져온, 꽃잎이 하나도 남지 않아 수명을 다한 꽃을 내려놓으며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란이 주었던 아인족의 비약을 꺼내들었다.

“곰.”

「이제 잊어야 한다. 그러니 이것도 버리든지 먹든지 해서 치워야겠다.」

혹시나 자신이 챙겨주지 못해 곰의 모습으로 돌아갈까 봐 곰에게 준 아인족의 비약. 단 하나 밖에 없어서 잃어버리거나, 버리거나, 먹거나 하는 순간 이제 다시는 구할 수 없는 마지막 연결고리.

“곰.”

「잊자.」

곰이 그 비약을 입 안에 넣으려는 순간, 갑자기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떠올랐다.

그 생각은 이제 막 첫사랑의 후유증에서 벗어난 곰의 머릿속에 떠오른 재미난 장난과도 같은 생각이었다.

“고옴…… 곰…….”

「가만…… 내가 변했으면 그 꼬맹이도…….」

곰은 자신이 인간형으로 변했을 때, 위그드라실과 주변 사람들의 놀림과 실망의 눈초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라고 그런 모습으로 변하고 싶어서 변했던 것도 아닌데.

외모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던가.

“고오옴. 곰.”

「그 녀석도 분명 못생겼을 거다. 실컷 놀려줘야겠다.」

그렇게 재미난 생각을 품고 곰이 필로우를 찾아 숲을 헤매며 돌아다녔다. 필로우가 있는 곳은 항상 폭포가 있는 곳으로 정해져 있었기에, 그녀를 찾는 일은 간단했다.

“곰.”

「여기 있다.」

폭포를 맞으며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필로우. 곰이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필로우는 여전히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다.

“고옴…….”

「눈치채기 전에 몰래…….」

“흐업!?”

재빨리 필로우의 입 속으로 비약을 집어넣은 곰. 약은 필로우가 알아챌 시간도 주지 않고 그대로 녹아 그녀의 뱃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지금 대체 뭘……!?”

“고호홈!”

「됐다!」

그리고 곰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필로우의 몸 주변으로 수증기가 발생하는 것을 확인했다. 수증기가 걷히면 비로소 인간형이 된 필로우의 모습이 보일 터.

곰은 벌써부터 필로우의 외모를 상상하며 놀릴 준비를 끝마쳤다.

‘못생겼을 거다. 나도 그랬다. 분명 못생겼을 거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마음 한구석이 불안한 것은.

‘진짜로 설마 나만 못생겼냐? 그런 거냐!’

그리고 그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 * *

“위그드라실 님. 주무시고 계신가요?”

“으응……?”

이제 막 달콤한 낮잠에서 깨어났거늘, 일어나자마자 아라디온이 볼 일이 있는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핀의 무릎에 누운 채 기지개를 펼친 후 뻐근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그게…… 생겼다면 생겼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잖아. 무슨 일인데?”

“일단 직접 와서 보시죠.”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애매한 대답을 하는 것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나는 일어나서 아라디온의 뒤를 따라갔다.

“꺄! 너무 귀엽다!”

그곳엔 한 무리의 여자 엘프들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를 둘러싼 채, 무슨 귀여운 동물이라도 발견했는지 즐거워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흠. 동물? 아니지. 이 녀석들 눈엔 아무리 귀여운 동물이라도 고기에 불과하잖아. 그럼 귀여운 꽃이라도 발견한 건가? 아니면 귀여운 나무?

“그, 그만하시오!”

처음 듣는 목소리가 엘프들을 뚫고 들려왔다.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는데 목소리만으로도 나이가 아주 어릴 것이라고 짐작되는 그런 목소리였다.

그런데 어째 말투가 많이 들어본 말투인데…… 목소리 톤도 많이 들어본 것 같고…….

“누구야? 손님이라도 온 거야?”

“세계수님! 여기 보세요!”

여자 엘프들이 내게 목소리의 정체를 알려주기 위해 길을 열었다. 그 길 끝에는 한 명의 작고 귀여운 소녀가 엘프들의 옷을 입고 있었다.

작은 옷은 없던 것일까. 체구에 맞지 않은 큼지막한 옷 때문에 소매 너머로 손가락만 간신히 보였고, 흐늘거리는 상의는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다.

“아인…… 족?”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쫑긋 세운 기다란 토끼 귀. 꼬리는 볼 수 없었지만, 이미 토끼 귀로 인해 나는 소녀, 어린 여자아이가 아인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나를 보자마자 그 커다랗고 빨간 눈망울을 글썽거리더니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울먹였다.

“주, 주공! 너무 보지 마시오…… 으으…….”

“설마…… 필로우?”

내 물음에 답하듯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

아니, 어쩌다가 필로우가 소녀의 모습을 하게 된 거지?

“잠깐. 곰은 어디 있지?”

“도망간 지 오래입니다.”

“소인도 잡으려 했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만…….”

역시나. 원흉은 너였냐!

필로우도 곰과 비슷한 출생(?)을 겪었으니, 곰이 했던 것처럼 아인족이 만든 약으로 인간형이 될 수 있었겠지.

그걸 어떻게 구했는지는 몰라도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으음. 필로우.”

“……왜 그러십니까. 주공?”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저 태도. 부끄러워하는 모습부터 시작해, 흠칫 놀랄 때마다 꿈틀거리는 토끼 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나의 심장을 저격하는구나.

“한 번 껴안아 봐도 될까?”

“히익!”

깜짝 놀라는 필로우. 하지만 나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토끼…… 그러니까 혼래빗의 모습일 때도 자주 껴안았었는데 뭐. 모습이 바뀌었다고 전과 다른 태도로 대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절대로, 절대로 내 사심에서 말하는 변명이 아니다. 절대로!

“그…… 그러니까…….”

“응? 잘 안 들리는데?”

내가 잘못 말한 것일까. 필로우는 망설이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얼굴이 점점 더 빨개져서 홍시처럼 터지기 직전이 될 무렵, 필로우가 마침내 움찔거리던 입술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좋…… 소이다…….”

“그래!”

“흐어어억!”

부드럽다. 나도 작은데 필로우는 나보다 더 작았다. 그래서 그런지 커다란 인형을 껴안는 기분이었다.

혼래빗의 모습일 땐 너무 작아서 껴안는 다기 보단 안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품에 밀착할 수 있는 인형을 손에 넣은 기분이었다.

“신기하네. 말캉거려.”

게다가 이 토끼 귀까지! 고양이 발바닥이나 강아지 발바닥을 만지는 것처럼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서 자꾸만 손이 간다.

예전에 들었던 광고 노래가 생각날 정도의 중독성이다. 왜. 그거 있잖아. 손이가요 손이가. 새우…… 손이가요.

흠흠. 아직도 이런 망할 개그가 튀어나오는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군.

“귀, 귀는! 흐어어엉…….”

갑자기 품에 느껴지는 무게에 필로우를 살펴보니, 눈이 뱅글뱅글 돌며 기절해 있었다.

“필로우? 필로우! 정신 차려!”

흐음.

앞으론 껴안을 때 조심해야겠네.

포기할 생각은 없냐고? 당연히 없지! 곰처럼 며칠 지나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텐데!

껴안을 수 있을 때 미리 잔뜩 껴안아야지.

* * *

“흐아아아…….”

달밤이 밝은 저녁. 필로우가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식히기 위해 바위 위에 올라가 바람을 쐬고 있었다.

어디선가 멀리서 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은 그녀의 착각일까? 아니면 진짜로 울고 있는 것일까?

“고오오오옴!”

「어째서 나마아아아안!」

“……크윽. 저 무뢰한…….”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달려가 때려주고 싶었지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탓에 빠르게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필로우가 달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둥근 달에 오늘 낮에 있었던, 위그드라실이 자신을 껴안는 모습이 선명하게 비추었다.

“흐아아…… 또 뜨겁소이다…….”

겨우 식혀놨더니 다시 달아오르는 볼. 한숨을 푹푹 쉬며 뜨거운 열기를 내보내던 필로우는 이 모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무뢰한을 보면 이삼 일이면 원래대로 돌아오던데…….”

그럼 이 삼일동안 위그드라실의 허그를 견뎌내야 한단 말인가? 필로우는 절대로 무리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솔직히 혼래빗일때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매번 폭포수를 맞으며 마음을 가라앉히지 않았는가.

그런데 인간형이 된 지금은 전보다 더욱 격하게 심장이 뛰었다. 너무 심하게 뛰어서 폭탄이라도 된 것처럼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르오…….”

언제까지 이렇게 마음 졸이며 살 텐가! 필로우는 지난 번 토마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자신을 다독였다.

“지금의 모습이라면 주공께 충분히 소인의 마음을 어필할 수 있을지도…….”

혼래빗의 모습으로 아무리 애써봐야 그냥 귀여운 동물이 재롱을 떠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인간의 모습이라면?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전할 수 없을지언정, 최소한 그 씨앗을 심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좋소. 후후…….”

그녀가 달을 보며 웃었다. 비록 작은 소녀의 모습이지만 어차피 위그드라실도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모습이지 않는가?

충분히 가능하다. 남은 것은 삼 일 내로 어떻게 마음을 전하느냐 뿐.

“무사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는 법. 결심했소이다!”

그렇게 곰이 벌인 작은(?) 장난질로 시작된 사건이 한 소녀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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