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82화 (18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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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결혼은 미친 짓이다(3)

“결혼. 하지 않는다!”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곰과 란이 마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파혼(?) 사실을 알렸다. 란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라 그 속내를 알 수 없었지만,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마을의 아이들은 그녀가 낙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요! 왜 결혼 안 해요!?”

“으앙! 나도 아빠 갖고 싶은데!”

“미안해. 얘들아. 하지만 결혼이란 건 쉽게 할 수 없는 거야.”

“거짓말! 남자랑 여자랑 같은 방에서 자면 결혼한 거잖아요!”

“……누가 그랬니?”

“족장님이요!”

“잠깐 실례.”

란이 무서운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멀리서 싱의 비명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곰이 멀뚱히 서 있었지만, 우리는 아무도 곰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에 아이들이 곰에게 몰려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란과 결혼하라고 재촉했다.

“누나랑 왜 결혼 안 해요! 결혼해 줘요!”

“엄마랑 결혼해, 아빠!”

“누가 아빠냐!”

아이들의 보챔에 역정을 내는 곰. 곰은 정말로 결혼이, 아빠가 되기 싫은 것일까? 하지만 애들이 뭘 안다고 이렇게 화를 내지?

이건 한마디 해줘야겠다.

“곰. 애들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뭐라고 안 하게 생겼냐!”

그러나 곰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 지극히 정당한 일이라는 것을 어필했다. 평소의 곰과 다르게, 흥분한 모습이 역력해 나와 다른 아이들은 당황한 채 곰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애들이 자꾸 보채니까 란이 팔자에도 없는 결혼을 억지로 하려고 하는 거 아니냐! 생각을 좀 해봐라. 애들이 없었으면, 그녀가 이곳에 남아서 혼기도 놓치고 나 같은 놈에게 결혼하자고 말이나 꺼냈겠냐!”

“곰…….”

“나도 안다! 나는 결혼할 만한 남자가 아니다! 멋지지도 않고, 성실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랑 결혼하려고 했다! 그게 정말 나를 사랑해선가? 아니다. 전부 이 애들 때문이다!”

란의 모든 행동이 아이들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곰. 곰이 왜 이렇게 격분하여 소리를 치는지 우리들은 모두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곰의 화가 식을 때까지 그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게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왜 굳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면서까지 아이들을 위하는 거냐!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봉사라는 건 자기한테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래.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쳐. 하지만 나는 무리다. 내겐 여유 같은 거 없다!”

그 말을 끝으로 곰이 숲으로 도망쳐 버렸다. 도망가는 곰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던 것은 내가 잘못 본 것일까?

“이거…… 말해줘야 하는데…….”

때를 놓쳤다. 지금 곰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집에서 빈둥거리며 억지로 결혼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 뒤로, 안절부절 못하며 아이들을 보던 곰의 시선을 기억한다.

그 책임감을 덜어주기 위해 오늘 새벽부터 미리 준비한 게 있거늘…….

“돌아오…… 겠지?”

곰이 쉽게 변할 녀석은 아니니까. 곧 돌아올 거다. 남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을 뿐이겠지.

그래. 돌아오면 말해주자.

* * *

“헉. 헉.”

위그드라실 일행과 아이들을 뒤로한 채, 곰이 숨이 턱까지 막히도록 숲을 달리고 또 달렸다.

평소와 다르게 얼마 달린 것 같지도 않은데 숨이 차올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기에, 곰은 달리던 도중 앉아서 쉴만한 바위를 발견하자마자 걸음을 멈추고 그곳에서 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숨이 찼던 게 아니었다. 비록 인간의 몸을 하고 있지만 엄연히 그는 지금 아인족. 고작 숲길을 달린 정도로 체력이 떨어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왜 심장이 아직도 뛰고 있지?’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에 남을까?’

어젯밤, 란과 대화를 한 이후부터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는 화두(話頭)였다.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란의 곁에는 더 오래 머물고 싶다.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자신의 마음을 열심히 부정해 보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더욱 그 마음이 진심처럼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어젯밤 자신의 등을 만지던 그녀의 손길이 아직도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손도 잘 닿지 않는 등 한 복판. 그곳에서 간지러움이 느껴졌지만, 긁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 감촉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다는 감정뿐.

“내, 내가 왜 이러지?”

진정한 상 남자는 여자에게 얽매이지 않는다. 여자가 매달릴지언정, 자신은 쿨하고 멋지게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곰이 알고 있는 상남자의 기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은 무엇인가? 그녀의 손길을 기분 좋게 생각하며, 마을을 떠나 숲으로 가는 길을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돌아가기 싫어서 도망친 거라고?”

홀로 자신의 마음과 대화하는 곰. 그는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이게 사랑인가!?”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지만, 어째서인지 그녀 곁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 함께 잠자리에 들고, 그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아이들을 키우고 일을 하는 것은 싫지만, 그녀를 돕는 것은 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아이들을 키우고 일을 하는 것과 같은 뜻이지만, 그녀를 돕는다고 생각하면 싫지 않았다.

“…….”

란을 떠올리자 곰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분명 그녀는 예쁘다. 그게 자신이 곰 족 아인이 되어서 인지, 아니면 세상의 보편적인 미의 기준을 따른 것인지 모르지만 그의 눈에 아름답게 보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기분 좋은 것은 그녀와 같은 공간에서, 같이 잠을 자고 함께 생활하는 것이었다.

지난 이틀 간 방 안에서 지내며 그녀가 들어올 때마다 공기가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같은 방 안에서 잠을 잘 때면, 혹여나 코라도 골아서 그녀가 잠에서 깰까봐 조마조마하지 않았는가.

“남편이 아니라…… 그냥 함께 있는 것만이라면 괜찮을지도.”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정의하지 못한 곰이었지만,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위그드라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 함께 지내는 건 괜찮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결혼이 아니라 그냥 지내는 것이라면, 나중에 언제든지 숲으로 돌아가도 문제없다!”

그렇게 결심한 곰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자꾸만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이, 발걸음마저 싱글벙글한 상태였다.

“나 돌아왔…… 다?”

그리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곰은 한 사람의 곰족 아인과 마주쳤다.

자신과 다르게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 그리고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를 지닌 정반대의 사람을.

“누, 누구냐?”

“응? 돌아왔어? 아. 곰. 네가 책임감을 심하게 느끼는 것 같아서 말이야. 오늘 새벽에 우리끼리 모여서 회의를 했거든.”

“그러니까 저 사람은 누구냐!”

“흐음. 인사하지.”

훤칠한 외모의 곰족 아인이 곰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곰은 악수를 받을 생각도 못한 채, 그의 입만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나다. 과거의 족장이자 용사라는 이름을 가진…… 쿤이다.”

* * *

어젯밤, 위그드라실과 아이들은 곰과 란이 머물고 있는 숙소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혹시나 곰의 마음이 변했을까 하는 기대감에 숙소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엿듣기 위해서였다.

“혹시나 말하는 건데, 그렇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그냥 돌아가는 거다?”

“그렇고 그런 상황이 뭔데요?”

“그거 있잖아. 그거. 사생활 침해를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그거.”

“그러니까 그게 뭐예요? 그리고 지금 엿듣는 것 만해도 사생활 침해 아닌가요?”

“끄응…… 그 순간이 오면 내가 말해줄게. 쉿! 조용!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게 곰과 란의 대화를 엿들은 위그드라실과 아이들. 그리고 곰이 결혼을 포기하고 다음 날 떠나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온 위그드라실은, 이 사태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논의하였다.

“이대로 그냥 떠나게 되는 건가…….”

솔직한 심정으론 위그드라실 역시 곰이 숲으로 함께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 기회를 놓친다면 곰은 영원히 솔로로 혼자 살 것 같았다.

곰이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위그드라실 님. 너무 저희 마을을 위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음. 그래도…… 아이들이 불쌍하잖아.”

엄마와 아빠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두고 떠난다는 게 영 마음이 찝찝했다.

그리고 그때, 위그드라실이 기막힌 생각을 떠올렸다.

“쿤…… 혹시 늑대가 아니라 다른 동물이라도 딱히 상관없지?”

“저야 살아 있다는 것 자체로도 감사지요.”

가능할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위그드라실은 아이들을 위해 한 번 시도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 혹시 곰이 되어주지 않을래?”

* * *

“…….”

“그리하여 곰의 박제로 들어가, 세계수님의 힘을 받아 아인족이 되었다. 이제 너무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내가 란과 함께 아이들을 돌볼 테니.”

“그,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건가? 이 범죄자!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망연자실하게 쿤을 바라보던 곰이 소리쳤다. 그리고 곧 란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싸움을 말렸다.

“결혼은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필요하다고 해서 결혼을 강요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번에 깨달았으니까요.”

“그럼……?”

“결혼은 하지 않고, 그냥 함께 살며 아이들을 돌볼 생각이다.”

곰은 떨리는 두 다리에 힘을 빼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지금 대사는 자신이 숲에서 홀로 생각해서 만든 결론과 똑같지 않은가?

곰이 쿤과 란, 그리고 다른 아인족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곰을 보며 안타깝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런 눈빛을 보내는 아이들은 소수였고 나머지 아이들은 다들 아빠가 생긴다는 즐거움에 쿤의 뒤에서 쪼르르 줄을 서 있었다.

이제라도 한 번 말해볼까? 나 역시 숲에서 같은 생각을 했었다고?

그러나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지난 이틀 동안의 자신의 행적과, 전날 밤 란에게 매정하게 대했던 모습이 떠오르자 곰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버렸다.

“……잘됐다. 나는 결혼 같은 건 어울리지 않으니까. 둘이서 잘 살아라!”

“고맙습니다. 그리고…….”

란이 곰의 손을 잡았다. 그 상태로 진심이 담긴, 감사의 마음이 담긴 인사를 해주었다.

“제 무리한 부탁에 어울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리는 무슨…… 앞으론 결혼하고 싶다고 아무한테나 달려들지 마라!”

“예. 이번에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결혼이란 혼자 좋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악수가 끝나자, 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그드라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핀의 곰의 표정을 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위그드라실에 의해 그녀의 발언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곰. 너 표정이…….”

“쉿! 핀. 조용히.”

“그럼 잘 있어라.”

그렇게 위그드라실 일행과 함께 처음 숲에서 이곳까지 자신들을 태워준 새의 등 위로 올라탄 곰.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가 란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했지만, 핀의 말처럼 자신의 이상한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반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빨리 가야 한다. 빨리! 더는 버티기 힘들다.’

“저도 함께 타야 합니다만? 그 아이를 조종하실 수 있는 분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위그드라실 일행을 엘퀴라즈 숲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란이 함께 탑승했고, 곰은 돌아가는 내내 란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먼 허공만 바라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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