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79화 (17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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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용사를 위해서(1)

“아빠?”

현실로 돌아와 처음 들은 목소리는, 나를 걱정하는 핀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바로 눈에 들어온 것은, 처음 쿤의 기억을 읽어보기 위해 그의 정신, 혹은 기억이 들어 있는 장갑에 손을 댄 순간.

현실은 바로 그 순간에 멈춰져 있었다.

“핀.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네?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이 장갑에 손을 대고 난 다음부터 흘러간 시간 말이야.”

“으음. 거의 없는데……. 굳이 물으신다면 이 초 내지 삼 초?”

“그렇구나…….”

기억의 세계. 정신의 세계에서 아무리 시간이 오래 흐른다 한들 현실에서는 짧다는 것인가. 꼭 만화 속 설정 같은 느낌이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내가 본 것들이 전부 사실인지, 아니면 나의 착각인지 궁금했다.

“쿤! 쿤! 내 말 들려?”

“아주 잘 들립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혹시 기억 속에서 나랑 했던 이야기들. 기억 나?”

“당연히 기억납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만난 이후로 세계수님을 본 적이 없군요.”

역시. 그와 함께 했던 기억은, 그리고 그 안에서 겪었던 일들은 꿈이 아니었다.

어쩌면 역사를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일이고, 어머니 역시 그런 걸 바라지 않으셨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제 기억을 보신 건 그렇다 쳐도, 저는 이제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어찌긴 뭘 어째. 당장 내 몸에서 나가!”

싱의 몸을 독차지하고 있던 쿤이 밀려났는지 다시 말투가 변했다. 두 사람이 한 몸을 공유하고 있으니 불편함이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우선 나는 싱에게서 장갑을 벗겼다. 싱이 자신의 몸을 온전히 차지했는지 씨익 웃으며 장갑을 보며 손 사레를 쳤다.

“이제 그 장갑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군.”

“저 장갑이 없으면 마법을 차단하지 못한다면서요?”

“그런 것 없어도 나는 충분히 강하다.”

“그럼 저랑 다시 한 번 붙어보실래요?”

“……으음. 그, 그래. 좋다! 한 번 붙어보지!”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자신감 있게 외친 싱은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족장이었고, 그렇게 핀과 함께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시 후, 큰 소리가 나며 아인족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집 안으로 들려왔다.

“싱아 형이 졌어!”

“와! 저 누나 엄청 세다!”

“누나! 누나! 우리랑 놀아요!”

딱 보아하니 졌구먼. 하긴, 지금 우리 숲에서 도 닦고 있는 양반한테도 졌다고 했었지 아마? 마법 봉인을 쓸 수 없는 지금 핀에게 패배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그럼 이제 마제라는 양반만 꺾으면 핀이 최강인가? 굳이 꺾을 필요 없이 지금도 최강이니 딱히 상관은 없지만.

“그나저나 쿤. 장갑으로 사는 건 괜찮아?”

장갑을 벗겼기에 쿤은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에 장갑을 만지고 있는 나만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싸우는 소리를 들었더니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하군요.』

“……너도 싸움 좋아해?”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해 보시죠. 아인족이라면 애나 어른이나 다들 싸움을 좋아합니다.』

그의 말대로 아이들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누나! 누나! 나랑도 싸워요!”

“놀아달라며! 싸움은 놀이가 아니야!”

“누나는 강하니까 손이랑 발을 쓰지 말아요.”

“그럼 어떻게 싸워. 아니지. 혓바닥으로 비공을 찔러 죽이는 암살자도 있었는데 나라고 못 할 쏘냐!”

“으악! 혓바닥 귀신이다!”

확실히 싸움을 좋아하는군. 부정할 수 없는 소란이다.

쿤이 장갑 안에서 살게 된 것에는 어머니가 미안하다며 내게 대신 사과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어째서, 필요하다곤 하지만 이런 짓을 하실 수 있었을까?

두 가지 의미에서 궁금했다. 어머니의 심성을 보자면 필요하다고 해서 이런 짓을 하실만한 분이 아니다.

그리고 세계수의 마력으로 이런 짓이 가능하다는 것이 궁금했다.

“흐음…….”

혹시 어머니는 미래에 성장한 나를 믿고 있던 게 아닐까?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는 내가 성체로 훌륭하게 자라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성체가 되면 세계수가 가진 힘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거라고 하셨었지. 세계의 근본이 되는 힘.

세계의 근본이라. 그럼 모든 것을 창조하는 힘이라 볼 수 있을 테고, 그런 힘은 결국 신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직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꽤 많이 자랐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내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지나친 비약과 새로운 힘의 단서를 얻은 나의 자신감은 마음대로 추측하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분명 어머니는 나를 믿고 계셨을 거고, 그러니 쿤을 구하는 일은 바로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야!

“좋아! 쿤을 구해보자!”

* * *

실험 첫 번째.

실험이라곤 하지만 결코 비인적도인 행위는 아니니까 걱정 마시라.

“아빠. 그게 뭐예요?”

“인형.”

우선 준비물은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인형을 하나 구해왔다. 종류는 귀여운 토끼인형. 양해를 구하고 받아온 인형이니 찢어지거나 망가지지 않게 잘 간수하자.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으음? 세계수님?』

용사, 죠수아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느낌적인 느낌. 내가 가진 힘이란 건 결국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본능이지 않은가. 느낌을 따라서 쿤을 장갑에서 끄집어 내보자.

“자. 시작한다!”

『허억! 기, 기분이 이상하군요. 마치 빨려 들어가는 듯한…….』

장갑에 서린 어머니의 마력. 그것을 빨아들여 흡수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체내에 보관했다. 괜히 내 마력들과 섞어버렸다간 쿤의 자아가 내 몸에 갇힐 가능성이 있으니까 더욱 조심스러웠다.

“성공이다. 추출 완료.”

의사가 된 느낌으로 마력을 추출해 냈다. 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정신이 몸속에 보관한 어머니의 마력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상태로 조심스럽게 그 마력을 인형에 넣어보았다.

“어때? 쿤? 새로운 몸이야.”

솔직히 마음 같아선 어디 짐승 한 마리 구해다 잡아서 그 안에 넣어보고 싶었지만 아인족에게 그런 짓을 했다간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 우선 인형으로 해봤다.

인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인형을 만졌고, 그 때서야 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계수님! 몸이 전혀 안 움직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요!』

“으음. 실패인가.”

정신을 옮기는 것은 성공했다. 하지만 역시 인형의 몸으론 움직일 수 없었다. 하긴, 물렁물렁한 인형이 어떻게 움직이겠는가?

“그렇다면 실험 두 번째.”

이번엔 다른 물건을 구해보았다. 뼈는 없지만 관절과 딱딱한 몸체를 가진 나무인형.

란은 참으로 착한 아이인 것 같다. 마을에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저마다 장난감을 하나씩 구해주다니. 손재주가 좋은지 이 인형과 같은 경우는 직접 만든 것이라 했다.

“관절이 있으니까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자! 쿤! 어서 움직여 봐!”

삐걱거리며 천천히 나무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형은 몇 걸음 걷지도 못한 채 그대로 쓰러져 바닥에 고꾸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걸어도 걷는 느낌조차 들지 않아요.』

이번에도 실패. 관절이 있으면 움직일 수는 있지만, 오감을 느끼지 못하니 제대로 된 행동은 불가능했다.

이 두 번의 실패로 깨달은 것은 오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러니까 제대로 된 생명활동을 할 수 있는 육체를 구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흐음. 살아 있으면서도 정신을 넣을 수 있는 물체라…….”

그런 거라면 시체밖에 없는데. 하지만 어디서 시체를 구한단 말인가?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다 그런 짓을 하기에는 좀 그렇고. 좀비를 만드는 느낌이라 뭔가 꺼림칙하다.

“세계수님.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뭔데?”

“이쪽으로.”

란의 안내를 따라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동물들이 우리를 바라보며 시간이 멈춘 듯 가만히 있었다.

“……이거 박제야?”

“그렇습니다만. 이거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도, 동물이잖아! 그런데 괜찮아!?”

나 역시 동물의 시체가 좋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동물의 특성을 가진 아인족이 동물의 박제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동물을 사랑하는 거 아니었어?

“혹시 지금 동물을 사랑하는 거 아니었냐고 생각하셨나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희가 동물의 모습으로 유년시절을 지내고, 동물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해서 동물을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만. 저희는 고기가 주식입니다. 사냥이 취미고요.”

“아니, 그러다가 애들 잡으면 어떻게 해! 사냥하다가 실수로 동물인 줄 알고 잡았더니 옆집 가족의 삼대독자라도 되면 어쩌려고!”

“……저희가 볼 땐 동물과 아이들은 한눈에 구별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아이를 많이 낳기 때문에 삼대독자 따윈 지금까지 존재한 적 없습니다.”

“구별이 가능해?”

지금도 우리가 뭘 하는지 궁금해서 따라온 작은 새끼 사슴이 있는데 내 눈엔 어딜 보나 새끼사슴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후우. 타 종족은 몰라도 설마 저희가 같은 종족을 못 알아볼 리 없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란의 말이 맞는 것 같다. 하긴, 인간들도 그런 경우가 있지. 동양인 눈에는 서양인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한눈에 구별하기 어렵다고 하고, 서양인도 우리를 보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언제나 헷갈려 했지.

“그럼 어디…….”

아인족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사라지자 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박제된 동물 중에 가장 상태가 좋은 늑대를 한 마리 골라서 그곳에 쿤의 정신이 담긴 마력을 불어넣자 조금씩 늑대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곧 한 마리의 살아 있는 늑대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쿤. 어때?”

“크헝!”

“……으음.”

“크헝헝!”

움직이는 건 가능하지만…… 역시 목소리는 어떻게 안 되는 것인가.

늑대의 등을 손으로 만지며 쿤에게 의사를 물어보았다. 다행히 그는 지금 상태로도 만족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로 만족하겠습니다. 천 년 전에 죽었어야 할 몸, 이 상태로 살아 있는 것 만해도 기뻐해야겠지요.』

“긍정적이네.”

가슴이 뿌듯하다. 이렇게 한 사람을 무생물에서 생물로 바꿔준 것 같아 한 건 해냈다는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치료하고, 다른 생물을 강하게 해주는 것 외에 다른 사용법이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

‘내 마력을 사람에게 불어넣고, 정신을 골라 빼내면 다른 몸에도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네.’

무서운 능력이다. 사람의 몸과 정신을 뒤바꾸다니. 가히 마법이 따로 없다.

언젠간 더 자라고 내 힘에 익숙해지는 날이 오면,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를 예지하는 것도 가능할까?

하루 빨리 자라고 싶은 마음이 그득했지만 어머니만큼 자라려면 못해도 수백 년은 걸릴 것 같아서 텐션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뭐, 언젠간 자라나겠지.”

조급한 마음은 가지지 말자. 시간은 흘러가니까 언젠간 그날이 오게 될 것이다.

“이걸로 일은 해결됐군.”

“저기. 세계수님?”

아인족 마을에서 문제를 모두 해결한 것 같아 뿌듯하게 기지개를 펴고 있는데 갑자기 란이 말을 걸었다. 혹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는 것일까?

“왜?”

“…….”

하지만 그녀는 말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뭔가 미묘하게 뒤틀린 것이,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그 끝엔 머리를 긁적거리며 따분한 모습으로 하품을 하고 있는 곰이 있었다.

흐음. 혹시 곰이 무슨 문제라도 저지른 게 아닐까? 곰 녀석, 그렇게 부지런한 편은 아닌데.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란.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내게 말했다.

“아드님을 제게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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