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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타인의 기억 속에서(3)
지금 당장 뛰쳐나가고 싶다.
나가서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다.
마왕과 이곳에서 싸우면 안 된다고. 그러면 어머니가 죠수아의 계획에 의해 죽을 거라고.
‘그런데 괜찮을까?’
하지만 그 순간, 내 안의 망설임이 발목을 붙잡았다. 말해야 하거늘, 말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샘솟은 것이다.
정말 말해도 되는 걸까? 내가 여기서 죠수아의 계획을 모두 폭로하면 마왕은 쓰러트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마왕에게 용사들이 모두 당한 후, 어머니까지 그의 손에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그래도 당하는 건 똑같잖아?
그것보다 이곳은 정말 쿤의 기억 속인 것일까? 그래서 쿤에게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나는 지금 기억 속에 들어온 것이지 시간 이동을 한 게 아니잖아? 그런데 정말 기억 속에 들어온 것이라면, 쿤이 이야기한 인간 아이의 침입 사건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
그것조차 쿤만의 기억이라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걸로 모든 게 설명되는 건 아니잖아?
머릿속에 태풍이 부는 것 같다. 어느 것도 결정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그대로 수풀 속에서 혼자 끙끙거리는 동안, 용사들이 어머니께 무기를 받고 자신들의 숙소로 헤어졌다. 이제 어머니와 몇몇 하이엘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모르겠다. 그냥 말해보자. 이럴 땐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최선이지 않겠는가?
“다들 이곳에 남아주세요. 잠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위그드라실 님?”
“잠깐이면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으윽.’
그러나 결심을 굳히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어머니가 하이엘프들을 따돌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조용히 어머니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어머니가 도착한 곳은 용사들의 숙소. 문을 두드리자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쿤?’
기가 막힌 우연인가? 쿤의 기억 속에 들어왔건만, 어머니가 찾아간 용사는 바로 쿤이었다.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게 됐네요.”
“으음. 세계수님?”
“혹시 제가 드렸던 무기, 잠깐만 다시 빌려주실 수 있나요?”
“예. 물론입니다.”
어머니가 쿤에게 주었던 장갑을 다시 돌려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기운을 다시 한 번 장갑에 불어 넣고 있었다.
이미 완성된 장갑이 아니던가? 또 다른 기능이라도 추가하시려는 것일까?
장갑에 마력을 불어 넣은 어머니가 다시 쿤에게 무기를 돌려주었다. 어머니가 미안한 표정으로 쿤에게 말했다.
“어쩌면…… 저를 원망하실지도 몰라요. 하지만 꼭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장갑을, 그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꼭 착용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원망이라뇨. 그럴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고마워요. 역시 당신이라면 들어 주실 줄 알았어요.”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두 사람이 헤어졌다. 쿤이 집으로 들어가고, 어머니만 홀로 남아 집 앞에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지셨다.
‘혹시 쿤의 정신이 장갑에 남아 있는 게 방금 전에 한 행동 때문인가?’
나 역시 홀로 생각에 빠졌다. 다른 용사들은 해당하지 않고 쿤만 현대까지 정신이 무기에 서린 것은 어머니의 계획이었단 말인가? 그것 외엔 다른 용사들과 쿤의 차이점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어째서 쿤에게만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여기 있었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는 순간, 갑자기 나를 가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고개를 들고 앞을 보니 어느 샌가 어머니가 내 앞에 다가와 계셨다.
에이. 설마. 나를 보고 계신 건 아니겠지?
“으음. 보고 있는데. 표정이 참…… 솔직하구나?”
“……정말요?”
아니, 그럴 리가. 여긴 기억 속이잖아. 아니, 기억 속이지…… 않았나?
나를 볼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드디어 만났구나.”
겨드랑이 사이로 어머니의 손길이 들어와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허공에 뜬 채 활짝 웃고 있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의 아이야.”
* * *
“후훗. 아이가 생기면 꼭 해보고 싶었어.”
따뜻하다. 그리고 푹신하다.
다른 사람의 무릎에 앉아 몸에 기댄 채 눕는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건 줄 그동안 잊고 있었다. 핀이 가끔 해주긴 했는데 아무래도 딸에게 그런 일을 당한다는 게 심리적으로 꺼려지는 일이라 무의식적으로 거부했는데, 어머니라면 말이 다르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요?”
그래도 부끄러운 건 매한가지라서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조금 거부하는 편이 쑥스러움을 감출 수 있는 방패가 되어주니까.
“헤어질 때까지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는 그저 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머리를 쓰다듬거나, 몸을 만지작거리면서 기뻐하실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심란했다.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니다. 지금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쿤의 기억 속인지조차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나는 지금 어머니에게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뭘 그리 걱정하고 있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음. 거짓말 하면 못 써요. 얼굴에 다 써 있는걸?”
으윽. 진짜 이놈의 얼굴을 그냥…… 대체 누굴 닮아서 이런 거야!?
“아마 아빠를 닮아서 그런 게 아닐까? 그 이도 인간의 모습을 하면 항상 얼굴에 드러나거든.”
크윽. 아버지. 이 모든 게 아버지의 유전자 때문이었습니까? 뻔뻔함이 모토 아니셨습니까? 인간형으로는 그 특성을 발휘할 수 없으셨던 겁니까?
“혹시 아빠를 본 적 없니? 미래엔 그 이도 더 이상 없나 보구나…….”
심장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 단순한 기억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알고 계신 거지?
“내 힘을 조금 사용했단다. 쿤에게는 미안하지만…… 너와 꼭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거든. 혹시 아직 우리가 가진 힘을 깨닫지 못한 거니?”
“으음…… 남을 치유하고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지 않나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구나. 아…… 역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게 아니면 깨닫지 못하는 걸까.”
세계수의 힘에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것일까? 앞서 말한 것만 해도 굉장한 힘이지 않은 건가?
어머니가 나를 보며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기분 좋게 듣는 표정이셨다.
“우리의 힘은 그저 그런 게 아니란다. 세계의 근본이 되는 힘이지. 그러니 조금 변형한 것으로도 이렇게 너와 내가 시간을 뛰어넘어 만나게 되지 않았니?”
“세계의 근본이 되는 힘…….”
“그러니 우리가 ‘세계’수라 불리는 거 아니겠니?”
“그 이름은 사람들이 붙여준 게 아니었나요?”
“아닌데. 내가 만든 이름이란다. 어른이 되고 나서 이 힘을 깨달았을 때, 세계수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붙였단다.”
세계수란 이름은 어머니가 만드신 거였나. 그런데 세계의 근본이 되는 힘이라니.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표정을 보신 어머니가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불안과 걱정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우리의 힘은…… 이 불안정한 세계를 유지시켜주는 힘이란다. 세계 자체에서 떨어져 나온 힘이 모여서 만들어진 게 바로 우리지. 우리가 없으면 세계도 없지만…… 반대로 우리 때문에 세계가 부서지기도 하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세계가 부서지면서 나온 파편이 우리잖니? 그런데 그 힘이 한데 모여 있으면 부서진 세계가 어떻게 치유될 수 있겠니?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세계수들도 세상 곳곳에 있다면 모를까…… 그래도 다행이야. 미래에도 아직 세계수가 남아 있어서.”
“그 말은…… 세계수는 한 그루이면 안 된다는 소리인가요?”
“그래. 세계수는 많이 있어야 해. 지금은 늦었지만…… 네 시대엔 부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순간 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세계수가 많이 있어야 한다니. 게다가 늦었다니.
그렇다면 지금 시대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어머니는 강대하고 나 따위는 우러러 볼 수도 없는 양의 마력을 지니고 계셨다. 세계의 근본이 되는 힘이 한데 모여 있으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어머니!”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라고 불러주지 않겠니?”
“그건 좀…….”
“부탁이야.”
“……엄마.”
“후후. 귀여워!”
내 걱정과 다르게 어머니는…… 엄마는 태평한 모습이었다.
“네가 무얼 걱정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단다. 세계 전체를 내다보는 건 무리지만,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으니까. 이제 곧 다가올 미래조차도…….”
“엄마는…… 알고 계신 거군요. 마왕이…… 용사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엄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너무 용사들을 미워하지 마렴.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건 그건 전부 세상을 위한 거였잖니? 이미 나도 알고 있단다.”
“하지만! 그건 배신이잖아요!”
“아니. 배신이 아니야. 어쩌면 이 세상이 치유되고 싶어서 운명처럼 그들을 이끈 것일지도 모르지. 그런 운명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또 나를 찾아올 수 있었겠니? 그리고…… 그들이 저지르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어차피 사라져 버릴 테니까.”
“그래도…….”
“지금 세계의 힘은 너무 한곳에 뭉쳐 있단다. 나라는 존재 하나가 떨어져 나온 세계의 일부를 홀로 가지고 있으니, 이대로 가다간 이 숲을 제외한 모든 세계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지. 그러니…….”
“그만!”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죽음을 각오하고 계셨다. 그것이 마치 운명이라는 듯이, 체념도 거부도 아닌 순수하게 흐르는 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계셨다.
나는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어머니가 죽는 상황을 피해보고자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용사가 안 된다면…… 마왕은 어때요? 마왕을 없애 버리면…….”
“마왕…….”갑자기 어머니는 슬픈 표정을 지으셨다. 아버지의 기억에서도 본 적 없는,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 사람은…… 불쌍할 뿐이란다.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닌…… 나와 비슷하지만 다른 존재.”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가 이곳에 나타날 때 느꼈지. 갑자기 세상에 없던 존재가 나타났던 것…… 그가 가진 슬픔……. 그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야. 무슨 목적에서 그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마왕은 대체 무슨 존재인 거지? 어머니의 말씀은 너무 아리송해서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존재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으신지 어머니는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언젠간 너도 어른이 되면 깨달을 날이 오겠지. 우리가 가진 힘을…… 그러니까!”
갑자기 어머니가 소리를 치셔서 깜짝 놀란 나는 몸을 흠칫 굳혔다. 어머니는 진지하고 또 다정하게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더 늦기 전에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많이 많이 만들렴. 내가 사라지며 세계가 복구되겠지만, 이 세계는 너무 연약하니까. 그러니까 세계가 다시 부서지기 전에 빨리 아이를 만들어서 많이 많이 퍼트려야 해.”
“……결혼할 상대도 없는걸요.”
“그거야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면 한둘 정도는 있겠지. 너희 아빠처럼 강한 마력을 지닌 상대면 충분하단다. 우리는 성별 따윈 상관없으니까. 마력과 마력을 결합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를 만들 수 있어.”
“으윽…….”
내 주변에 아버지처럼 무식하게 마력을 많이 지닌 사람이 누가 있었지?
그렇게 내 결혼 상대에 대해 고민하는 그 순간, 또다시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벌써 끝이라니…… 아쉽구나.”
“엄마!”
주변의 모든 것이 어둠에 파묻혔다. 세상에 나와 어머니 단둘만이 남아 있었다.
“만나서 즐거웠단다.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어. 쿤에겐 미안하다고 전해주지 않겠니?”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좀 더 이야기를…….”
그 말을 끝으로 어머니마저 사라졌고, 나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더 이상 쿤의 기억 속이 아닌, 현실의 낯익은 천장이 눈앞에 든든한 벽처럼 세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