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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타인의 기억 속에서(1)
누군가 말했다. 인간은 후회하는 동물이라고.
나는 지금 그 말에 격하게 동감하고 있다. 그 격언을 조금만 더 새겨들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만약 그 말을 새겨들었다면 지금쯤 따뜻한 햇볕을 쬐며 기분 좋게 낮잠을 자고 있지 않았을까?
“인간을 찾아라!”
“인간 냄새를 맡아봐! 분명 멀리 못 갔을 거야.”
‘크흑. 그냥 집에 있을걸.’
하다못해 장갑에 쓸데없이 손을 대지 말걸. 후회하고 또 후회해보지만 따끔거리는 수풀 속에 숨어 있는 지금은 모두 쓸데없는 생각에 불과했다.
‘아니. 이거 기억이잖아? 기억인데 왜 다들 날 볼 수 있는 거야?’
나는 분명 장갑에 손을 대고 거기에 서린 용사, 쿤의 기억을 읽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겪어온 일이기에 딱히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간 냄새가 나지 않아!?”
“혹시 마법사인가? 마법사들은 체취를 지우는 마법을 쓸 수 있다고 들었는데?”
“좋아. 샅샅이 수색해 보자!”
어째서인지 이 기억 속의 아인들은 나를 볼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기억 속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에 있는 사물들을 만지고 느끼는 것도 가능했다.
이게 정말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어떻게? 마치 동화책을 읽는데 그 안에 빨려 들어가서 실제로 겪는 거나 다름없잖아?
원래 있던 그 작은 초가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겠다. 일부러 혀도 씹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에 집중도 해봤지만 현실로 돌아가려는 모든 시도는 불발로 끝나 버렸다.
‘하아…….’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뭐? 어디?”
이런. 일 났다.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지.
아인들은 어째서인지 나를 발견하자마자 죽일 듯이 소리치며 쫓았다. 이곳이 정말 쿤의 기억 속이라면 아마 나는 천 년 전 시대에 있는 것이고, 천 년 전이라면 각 종족들의 사이가 매우 나쁘던 시기일 것이다.
고로 잡히면 아주 그냥 ㅈ…… 이 아니라 매우 위험할 것 같다.
“어디지? 이 근처에서 들렸는데.”
숨을 죽이고 몸을 멈췄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수풀소리가 들릴 것이고, 나는 저들에게 들킬 것이다.
그다음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기억 속에서 죽는다면 나는 과연 현실로 돌아갈지에 대한 의문은 접어두었다. 괜히 그런 쓸데없는 모험을 해서 후회를 하나 더 늘리고 싶지 않다.
“분명 여기에서…….”
‘잡힌다!’
“이쪽은 제가 다 살펴봤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 순간, 젊고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동아줄처럼 내게 들려왔다.
“그래? 흐음. 그럼 대체 어디 있는 거지…….”
그 말을 끝으로 가까이 다가오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가 지금 내 상황을 깨닫곤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세계수님. 거기서 뭐하십니까?”
‘숨 쉬면 안 돼. 숨 쉬면…… 응?’
방금 누가 세계수라고 하지 않았어? 여기는 쿤의 기억 속일 텐데?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이라곤…….
“접니다. 쿤.”
목덜미를 잡는 두툼한 손바닥을 느끼며 시야를 가리던 수풀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눈앞에는 나뭇가지 대신 한 젊고 어린, 늑대 귀를 한 아인족 소년이 서 있었다.
“쿤…… 이라고?”
장갑 속에서 외치는 목소리만 들은 터라 상상 속 그의 모습은 우람한 근육질의 털이 북슬북슬한 아저씨라고 생각했건만, 내 앞에 보이는 이 미소년이 정말 쿤이란 말인가!?
아직 어려 보이는 얼굴과 팔과 다리에 남아 있는 털, 그리고 동물에서 인간으로 변하는 과정인지 발이 늑대의 발이었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더 귀엽게 느껴졌다.
“……제가 그렇게 아저씨 같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어떻게!”
“표정에 다 쓰여 있습니다.”
얼굴은 그자의 마음이라는 건 알고 있어. 근데 나는 왜 이렇게 절실히 반영되는 거냐!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을 하셨기에 이렇게 제 기억이 현실이 된 겁니까? 아니, 기억이 아니라 설마 회귀인 겁니까?”
“회귀라니…… 나는 그런 소설 같은 짓, 못 한다고.”
차라리 회귀였으면 좋겠다. 그랬다면 과거를 바꿀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으음…… 뭔가 기억이…….”
갑자기 머리를 붙잡고 신음하는 쿤. 그가 비틀거리더니 나무를 붙잡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아…… 이제 기억납니다. 제가 왜 여행을 떠났었는지.”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인간이 쳐들어왔다! 아이들은 전부 안으로 대피해!”
아인족들의 목소리가 숲을 뒤 흔들었다. 다급한 사람들의 달리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 쿤을 보며 소리쳤다.
“어이! 거기 꼬마! 당장 마을로 들어가! 어서!”
곁에 있는 내 모습은 보지 못했는지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사라진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저 멀리 숲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 숲 뒤쪽에는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기는 왜 어둡지?”
“아마…… 제가 이날 겪은 기억의 끝이 저기까지인 것 같군요. 분명 숲에서 이렇게 당신과 만나고 인간들이 쳐들어왔다는 말에 마을로 대피했던 것까지 기억납니다.”
“그래? 나를 만나고…… 뭐!?”
과거의 기억 속에서 나를 만났다고?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아니, 그럴 리 없지. 기억 속에서 지금 나를 만난 탓에 분명 착오가 생긴 거겠지.
“분명 이날, 당신을 만난 게 기억납니다. 그래서 제가 마을을 떠났었으니까요.”
“……좀 더 자세히 말해줘.”
“그때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날, 그러니까 오늘 분명히 인간족 어린아이가 숲에서 발견됐다는 소리를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곧 성인이 되는 저도 당신을 찾기 위해 수색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이렇게 만나게…….”
“아니 잠깐. 뭔가 이상하잖아. 나를 만났다면서,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까지 나눴다면 그때의 너는 과거의 네가 아니라 미래의 너잖아?”
“아뇨. 그땐 당신을 만나고…… 으으…… 지금처럼 이야기 나눈 기억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당신을 만났던 것은 확실합니다.”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쿤은 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뭐지? 기억의 변화인가? 아니면 정말로 과거로 날아온 것인가?
“어쨌든 그때의 일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인간족 아이를 만나게 되고 제가 마을을 떠난 건 확실합니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제가 마을을 떠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왜?”
“그야 이날의 일 때문에 인간들이 어떤 존재인지 한 번 보고 싶었으니까요. 저희 아인족은 아이들을 소중히 여깁니다. 아이들이 곧 부족의 미래임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른들이 인간족 아이는 죽이려 드는 모습에 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지?’라는 의구심이 들었었죠.”
“전쟁…… 때문이 아닐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이까지 죽이려 드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쿤과 이야기를 하는 도중,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만 이 현상을 겪는게 아닌지 쿤 역시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이번 기억은 여기서 끝인 것 같군요.”
“자, 잠깐! 이대로 기억이 끝나는 거야?”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우리 두 사람 모두 어둠에 휩싸였다.
“으윽!”
그리고 다시 주변이 밝아졌을 때, 나는 역겨운 냄새에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여긴…….”
그곳은 지옥이었다. 피 묻은 흙덩이가 주변에 쏟은 케첩처럼 흩뿌려져 있었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버려진 인형같이 사람과 엘프, 아인들이 뒤섞여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살아 있지 않았다. 모두 차가운 시체들뿐이었다.
“헉. 헉.”
아무 말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빠르게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본능만이 나를 붙잡고 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아무리 눈을 돌려봐도 온통 시체들 투성이인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허억!”
갑자기 어깨를 붙잡는 손에 화들짝 놀라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이곳은 전쟁터가 아니던가? 설마 나도 이들처럼 죽게 되는 것일까?
“세계수님!?”
“……쿤?”
우람한 체격. 어린 시절과 다르게 꼬리와 귀를 제외하곤 완전히 인간의 모습을 갖춘 아인족 미남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이런 미남이…… 그만 생각하자. 지금 그럴 때도, 그럴 장소도 아니니까.
“깜짝 놀라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도망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바로 옆에 있었는데 못 보신 겁니까?”
“미안. 너무 놀라서…….”
나를 너무 겁쟁이라 비하하지 말기를.
시체는 지난 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몇 번이나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뜬금없이 전쟁터 한복판에서, 끔살 당한 시체들 사이에서 나 홀로 덩그러니 떨궈지면 놀라기 싫어도 놀랄 수밖에 없단 말이야.
“아무래도 기억이 이동된 것 같군요.”
“여기는 어딘데?”
“제가 마을을 떠나고 처음 목격한 대전투의 중심지입니다.”
대전투. 확실히 그의 말을 들으니 이곳의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전쟁터라고 하기엔 시신들이 너무 많았다. 엘프, 아인, 인간, 그리고 검은 머리의 마족들까지.
모든 종족의 시신이 이곳에 흩어져 있었다.
“흐음. 이런 식으로 이동이 된다면…… 혹시 설마!?”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나를 등 뒤에 숨기며 전쟁터 너머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제가 보기엔 제가 겪었던 강렬한 기억들 위주로 이동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인간족 아이, 그리고 이번에 제 인생을 바꿨던 두 번째 강렬한 기억을 만났던 장소입니다.”
“대체 누굴 만났는데?”
“혹시라도 틀어지면 안 되니까 일단 제 뒤에 숨어계시죠. 그를 만났을 때도 당신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그라니. 이곳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는 건가? 자신의 인생을 크게 뒤흔든 누군가를?
“잠깐. 설마…….”
누구를 만났을지 어렴풋이 떠올랐다. 용사인 쿤. 그가 자신의 인생을 뒤바꿨다고 말할 정도의 존재라면 한 사람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그 외에도 사소한 만남으로 인생이 바뀌는 경우도 있겠지만, 쿤 역시 ‘그’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의 목소리에 담긴 힘이, 거기에 서린 믿음이, 내가 그의 기억을 보려 했던 이유가 모두 합쳐져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역시…… 이날이 그날이었군.”
저 멀리 석양을 등진 채 걸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노을이 땅에 스며든 핏빛을 감싸며 죽은 이들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였다.
“응? 아인족? 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석양 때문에 눈이 부셔서 그의 얼굴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며 당황하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 과장되서 장난을 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나, 무기 없어. 싸우려는 게 아니야. 그냥…… 둘러보고 있었을 뿐이지.”
‘쿤. 저 사람 설마…….’
쿤의 등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소곤소곤 물어봤지만 그는 나의 존재는 잊어버린 것처럼 나를 무시한 채 남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인간…… 나 역시 싸울 생각은 없다. 그저 여행하는 도중에 이곳을 지나가게 됐을 뿐이니까.”
“응? 하하. 우리 비슷하네. 나도 여행 중이었는데……. 혹시 가는 방향이 어디야?”
“서쪽. 그쪽은?”
“방금 막 그쪽에서 오는 길이긴 한데…… 친구가 생긴다면 그 쪽으로 다시 가도 상관 없겠지?”
남자가 쿤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제 처음 본 사이거늘.
전쟁터 한복판에서 시체들 사이에서 만났거늘.
서로 다른 종족들이 서로를 죽인,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만난 서로 다른 종족이거늘.
“만나서 반갑다.”
그는 마치 어제 헤어진 친한 친구라도 만난 듯이 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죠수아. 네 이름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