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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미치광이 족장님
“주공! 위험하오!”
여기까지 와서도 란의 품에 안겨 있던 필로우가 재빨리 품에서 빠져나오며 내 앞으로 날아오는 돌덩이들을 쳐냈다. 바위가 부서지며 팝콘처럼 튀어나오는 돌덩이들은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동굴 입구를 뿌연 안개처럼 가려 버렸다.
“쿨럭. 쿨럭. 뭐, 뭐야?”
핀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발자국소리도 들려왔다.
희뿌연 안개 너머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의 그림자. 동굴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람의 모습은 하나밖에 없었고, 발자국 소리도 한 사람 것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꼭 두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것처럼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나가면 안 된다니까! 왜 안 되는데! 왜 안 되긴! 당신이 누군지 알고 마을로 보내! 아니 왜 나를 못 믿겠다는 거야! 내게 바로 네 선조다 이놈아! 선조는 개뿔! 썩 물럿거라 이 망령아!”
밖으로 나온 사람은 아니나 다를까 예전에 봤던 투제라는 양반이었다. 그는 란의 말처럼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일인이역을 하듯이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고 있었다.
그가 핀을 보더니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와 동시에 얼굴 한쪽이 변하며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 모습이 꼭 영화에서 보던 투페이스 같았는데 참으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응? 너는 그때 그 녀석이로구나. 역시! 하이엘프가 남아 있었다니! 그럼 세계수도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로구나! 자! 그 세계수가 있다는 곳으로 가자! 그 세계수가 당신이 말하는 세계수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당신이라니! 이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지금 혼자 뭐하세요?”
“내 몸에 귀신이 붙었다. 이 귀신 녀석이 널 계속 찾더구나. 귀신 아니라고! 네 선조라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투제, 싱을 바라보는 핀. 이런 표정을 짓는 핀은 난생 처음 보았다.
“혹시 전에 저랑 싸울 때 머리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이런 꼴이…….”
“아니다! 아니야!”
싱의 상태는 잘 알겠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그의 앞으로 갈지 말지 고민했다. 확실히 미친 건 분명한데 괜히 앞으로 나섰다가 무슨 광란을 벌일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동굴로 들어가…… 잠깐! 저기 위를 봐라! 서, 설마……!”
그때였다. 싱과 내가 눈이 마주친 게. 그의 한쪽 표정이 놀람으로 물들더니,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그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눈을 깜빡인 순간,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어딜 아빠한테!”
핀이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싱은 너무나도 능숙하게 핀의 공격을 보지도 않고 피해버렸다.
“하이엘프라고 해서 이 몸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더냐. 해코지 할 생각은 없다. 그저 확인을 하고 싶을 뿐…….”
완전히 또 하나의 인격에게 잡아먹힌 것일까. 그의 표정과 말투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살펴보던 싱. 그러더니 갑자기 감격에 마지않는 표정으로 바뀌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당신은…… 위그드라실 님이십니까?”
“내 이름을 어떻게…….”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작아지셨습니까!?”
작아졌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가 말하는 위그드라실이 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접니다. 저. 쿤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투박한 모양의 장갑이 끼어져 있었다.
“당신께서 제게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장갑을!”
“잠깐. 이건…….”
장갑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기운. 너무 희미해서 눈치채기도 힘들 정도였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그 기운이 느껴졌다.
“설마 이건.”
나는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또 하나의 위그드라실이란 이름. 그리고 그에게서 받았다는 장갑.
그 장갑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세계수의 마력.
“설마 천 년 전에 죽었다는 용사?”
* * *
“내 몸을 마음대로 쓰지 마라! 시끄럽다. 나라고 쓰고 싶어서 쓰는 줄 아느냐. 너 같은 저질 녀석과 함께 몸을 공유하는 것도 세계수님께서 해결해 주실 때까지만이다.”
바위에 걸터앉아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는 싱. 그를 지켜보던 나는 그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정말로 천 년 전에 마왕이랑 싸웠던 용사야?”
“벌써 천 년이나 흘렀습니까? 마왕이랑 싸웠던 건 맞지만 천 년이나 지난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그런데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변한 거야?”
원한이라도 맺혔던 것일까. 그래서 원귀가 되어 세상을 떠돌고 있던 걸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마왕에게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던 기억인데…….”
말하는 도중에 싱이 장갑을 벗었다. 그러자 그의 말이 끊어졌다.
“드디어 벗어났도다!”
“자, 잠깐! 이야기 듣는 중이잖아!”
“제가 한 번 껴볼까요?”
옆에 있던 핀이 장갑을 받아 들고선 착용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핀은 장갑을 벗고는 다시 싱에게 강제로 착용시켜 버렸다.
그 바람에 싱이 날뛰었지만 란과 다른 아이들까지 모두 합세해 그를 제압한 것은 웃지 못 할 일이었다.
“족장. 좀 가만히 있으세요. 뭔가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으니까.”
“내 몸인데 너희들 마음대로…… 이 건방진 후손 녀석! 감히 어른이 말하는데 말을 끊어?”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쿤, 그러니까 과거의 아인족 용사는 어머니가 주신 용사의 무기인 장갑에 봉인된 상태였던 것이다.
“역시. 그 장갑, 용사의 무기였군요. 그래서 제가 물었을 때 얼버무리신 건가요?”
“응? 아니…… 이게 용사의 무기였다고? 그 전설에 나오는?”
“……모르고 있었군요.”
“본인 무기인데 본인이 몰라?”
“내가 이 장갑을 손에 넣은 것은 죽은 전대 족장 집을 정리하다 발견한 거다. 내 손에 딱 맞길래 그냥 가져와 버렸지.”
“족장…… 분명 그 때 역병이 돌았으니까 전부 태워 버리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란이 무서운 표정으로 싱을 노려보았다. 나는 그녀가 바위를 깨부쉈던 장면이 싱의 머리와 오버랩 되는 것을 느꼈다.
“뭐, 이렇게 살아있으니까 됐잖아?”
“바보 족장…….”
“결론은 본인도 뭔지 몰라서 제게 둘러댔다는 거군요…….”
“좋은 무기니까. 상대의 마법도 봉인하고, 엄청 질겨서 튼튼한 이 좋은 무기를 함부로 발설하고 다닐 수야 없지. 안 그래도 노리는 녀석들이 있는 것 같던데…….”
“노린다고요?”
“그래. 그때도 내가 말하지 않았나? 네게서도 이 무기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서 혹시나 해서 경고했을 텐데? 이 무기를 착용하고 다닌 이후부터 이상한 녀석들이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더군.”
그 말은 결코 흘려들을 수 없었다. 용사의 무기를 노리는 무리라니.
벌써 몇 번이나 선수를 당했다. 에반슈트 가문의 무기도 그렇고, 엘프들의 활도 그렇고 이미 신성력이 사라진 상태이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니 다들 좋은 꼴은 못 봤네.’
에반슈트 가문은 세가 기울어져 가고 있었고, 엘프들은 내 형제가 벌인 짓이긴 하지만 숲이 말라버리는 일을 당했다. 비루스 왕국도 소문으로 들었지만 큰 화재가 났다고 했고, 지금 머물고 있는 아인족 마을은 예전에 역병까지 돌았다고 했었지?
용사의 무기는 저주받은 다이아몬드 마냥 큰 화를 불러오는 것일까? 흐음. 갑자기 무서워지는데.
“그나저나 제 상태는 둘째 치고, 세계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어려지신 겁니까?”
중간에 싱의 표정이 변하며 말투가 바뀌었다. 쿤이 그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질문을 받자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아…….”
하지만 알려주는 편이 낫겠지. 일단 용사였고, 배신한 용사도 아니니까.
나는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그 당시 마왕에 의해 어머니는 돌아가셨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분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알려 줄까말까 고민됐지만, 그래도 알리는 편이 낫겠지.
나는 과거 인간 용사가 마왕을 이용해 어머니와 공멸시켰다는 사실도 함께 말해주었다.
그는 이야기를 듣고선 놀란 표정으로 그럴 리가 없다며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럴 리가! 그 녀석이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인간답지 않게 정의감이 투철한 녀석이었거늘…….”
나는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겼다.
다른 용사들을 규합한, 최초의 용사는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벨룸의 기억에서도 조차 마왕과 어머니가 공멸하기 전까지 그가 그런 일을 벌일 거란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것을…… 어머니와 마왕을 공멸시킨 일을 제외하면 선인이었던 것일까?
“아. 혹시!?”
지금까지 세계수의 마력이 지닌 특성을 나는 몇 번이나 겪어보았다.
벨룸의 무기에서 마력을 흡수할 때도, 나의 형제와의 접촉도, 그리고 아버지에게 건네받았을 때의 일도.
세계수의 마력은 오랫동안 함께해 온 이의 기억을 복사하거나 비춰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의 과거를 엿볼 수 있었지 않았는가? 다만 비루스 왕국에 있던 무기처럼 대대로 주인이 바뀌면 아무런 기억도 새겨지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쿤이라는 용사는 어떨까? 과거의 본인이 무기에 서려 있지 않은가? 그것이 영혼이 묶인 것인지,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기억이 무기에 서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잠깐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
백문이 불여일견. 한 번 직접 실험해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일단 장갑에 손을 대긴 했지만 거기 서린 마력은 흡수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는 양인데다, 괜히 흡수했다가 쿤이 내게로 들어오면 골치 아플 것 같으니까.
으으. 이중인격 세계수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장갑에 서린 마력에 집중하며 무언가가 떠오를 수 있도록 눈을 감았다.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서서히 영화관에서 화면을 보는 것처럼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점점 선명해지더니 그 영화 속 등장인물이 된 것처럼 주변 풍경이 변해버렸다.
“좋아. 성공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내 의식은 쿤의 기억 속에 들어와 있었다. 울창한 숲이 펼쳐진, 꼭 엘퀴라즈 숲과 비슷한 곳에 나는 서 있었다.
“기억 속인데…… 나는 그럼 지금 쿤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곧 이상한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쿤의 기억을 읽고 그의 상태가 돼 있는 것이라면, 목소리도 그의 목소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야 정상이 아니던가? 왜 나는 내 목소리로 멀쩡하게 말하고 있는 거지?
“어……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심지어 들판에 불어오는 바람까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푸르고 투명한 하늘. 수풀이 우거진 나무 덤불.
그 사이에서 튀어나온 아인족 소년.
“응? 넌 누구야?”
“어…….”
이건 기억을 읽는 게 아니라 마치…….
“앗! 사람이다!”
“뭐!? 사람?”
그 안에 직접 들어온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