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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아인족 소녀와 재회(1)
곰처럼 뭉툭한 귀를 달고 있는 소녀. 작고 아담한 체구는 예전의 핀을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귀여운 외모와 달리 반 쯤 감긴 눈은 세상사에 해탈한 부처님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소녀를 알고 있다. 핀도 알고 있고, 필로우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안녕?”
“앗! 너는!”
나보다 빠르게 핀이 먼저 소녀를 보고 반응했다. 아무래도 나보단 핀이 더 소녀와 마주쳤을 것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투제와 함께 붙어 다니던 곰 아인의 소녀. 핀이 그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경악했다.
“링!”
“……란입니다.”
이름을 잘못 불린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란의 눈썹이 한순간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는 그녀가 껴안고 있는 토끼에게 더욱 시선이 쏠렸다.
“필로우. 거기서 뭐해.”
“소인…… 붙잡혀 버렸소이다.”
인형처럼 란에게 끌어 안겨있는 필로우. 빠져나오려고 계속 버둥대고 있었지만 란의 힘이 강한 것인지, 아니면 필로우가 힘이 떨어지는 것인지 아등바등거리고 있지만 빠져나오지 못했다.
“가만히 있어. 착하지?”
애완동물을 달래듯이 말하는 란. 나는 우선 그녀에게서 필로우를 돌려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미안한데 필로우 좀 놔주면 안 되겠니?”
“이 아이 이름이 필로우인가요? 아인답지 않은 이름이군요.”
“아인다운 이름이 뭔데.”“아인은 이름을 외자로 짓습니다. 제 이름이 란이고, 그 바보 족장 이름이 싱인 것처럼.”
흐음.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다 이름이 외자네. 아니 잠깐. 란이라는 소녀가 여기 있다는 것은 설마…….
“걱정하지 마세요. 족장은 여기 없습니다. 지금 마을에 있습니다.”
역시나 다들 내 마음을 읽는 것처럼 딱딱 대답하는군. 엘프 마을에서 가면을 가져왔어야 했어. 얼굴을 좀 가리던가 해야지 원.
“우리 숲에는 무슨 볼일로 온 거야?”
“아주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신가요?”
“아. 나는…….”
“이 숲의 주인이시외다!”
필로우가 끼어들며 나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숲의 주인이라. 그것도 맞는 말……이겠지?
란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나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는 바람에 부담이 되어 뒤로 한발짝 물러났다.
“설마 소문의…… 세계수? 하지만 나무가 아니네요?”
“나무 맞아. 이 몸은 정령이야.”
“그런 것도 있군요. 엘프들의 허황된 동화처럼 나무의 정령이란 게 실존할 줄이야. 처음 봤네요.”
엘프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일까?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의 광신도 엘프들이 저마다 수풀에 숨어서 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인족이다. 야만인들.”
“세계수님 곁에서 떨어져!”
애들아. 말로만 하지 말고 직접 나와서 싸우면 어디가 덧나니? 그렇게 숨어 있으니까 전혀 폼이 안 나는데?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래서 엘프들이란…….”
“그럼 무슨 일로 온 건데?”
“저 여자한테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란이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에는 핀이 걸쳐져 있었다. 갑자기 지명당한 핀이 의아해하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나는 왜?”
“당신이 우리 바보 족장을 좀 만나줬으면 합니다.”
***
우선 가만히 서서 이야기하긴 좀 그래서 우리는 넓은 공터로 향했다. 그리고 바위와 바닥에 걸터앉은 다음에 란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바닥에 철퍼덕 앉은 란이 핀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급한지 말이 아까보다 빨라져 있었다.
“당신이랑 싸운 뒤로 바보 족장이 더 바보가 됐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혼잣말을 한다고 할까요? 제정신이 아니더군요. 계속 혼자서 중얼거리고, 그리고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본인은 그런 적 없다며 기억도 안 난다더군요. 마음 같아선 이 숲으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지금은 처음보다 더 심각해져서 일단 동굴에 가둬두고 왔습니다.”
혼잣말이라. 그 투제라는 위엄 있는 양반이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것일까? 직접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혼잣말을 하는 증상이라면 정신분열증이나 이중인격 정도가 떠올랐다.
그게 아니라면 늦은 나이에 중2병이라도 걸렸거나. 혼잣말이 패시브로 딸려 오는 병은 그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아프면 의사한테 가야지 왜 저를 찾아오셨어요.”
“그 혼잣말에 당신이 연관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세계수도.”
“으잉? 나?”
갑자기 나는 왜 끌어들이는 것일까. 투제와 나는 직접 만난 적도 없거늘.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몇 번 얼굴 본 게 다인데. 그 사람은 내가 있는 줄도 몰랐을 거고.
“바보 족장이 중얼거리면서 언급했으니까요.”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란이 얼굴을 굳히더니 살짝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상태로 목소리를 낮추며 남자 흉내를 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엘프! 분명 하이엘프였지!? 아니, 하이엘프가 살아 있다니! 그렇다면 세계수도 남아 있다는 것인가? 시끄러워! 내 몸에서 당장 나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의 자식이 어디서 반말이야! 그래! 세계수가 살아 있다면 나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이엘프! 하이엘프를 찾아야 해! 조용히 해! 너 때문에 밥을 먹을 수가 없잖아! 지금 밥이 중요해!”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다. 일인 연극이 프로 수준으로 뛰어나다. 나른한 모습과 달리 굉장한 재능을 숨기고 있었구나.
아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연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부끄럽지 않은지 란은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상 반쯤 미쳐버린 멍청이의 혼잣말이었습니다.”
“……족장이라며. 그렇게 욕해도 괜찮은 거야?”
“바보에게 바보라 부르는 게 무엇이 잘못됐습니까?”
“아, 아니야. 그래…… 바보면 바보라고 불러야지.”
“어쨌든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당신을 지목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세계수님도 함께 와주시면 좋겠네요. 세계수님도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잠깐. 그 하이엘프가 나라는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핀. 진정해. 이게 무슨 도박도 아니고 잘못 말했다간 손모가지 날려 버릴 것처럼 말하지 말아줘.
“처음엔 당신이 하이엘프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냥 눈동자가 특이한 엘프라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그 헛소리가 말하길, 눈동자가 파란 엘프가 바로 하이엘프라더군요.”
“나 말고도 또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뇨. 그 헛소리가 말하길, ‘전에 싸웠던 그 파란 눈동자의 여자 엘프를 데리고 오란 말이야! 이름이 핀이랬던가?’라고 말했습니다.”
“……굉장히 구체적이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꼭 사람을 놀리는 것처럼 함정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빠지는 걸 구경하는 사냥꾼 같다.
씨익
방금 웃었지? 웃었어. 진짜로 놀리려고 그런 거였냐!
“으으…… 근데 내가 굳이 그걸 도와줄 필요가 있어? 우리가 왜 그 인간을 도와줘야 하는데.”
평소라면 이런 일이 생겼을 때 ‘그래. 도와줄게. 재미있을 것 같은데?’라며 끼어들기 좋아하던 핀이었건만, 오늘 따라 격하게 거부하며 란에게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건 싫어하는 표정이야. 그것도 매우 지긋지긋한 거머리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표정.
“왜 그러시나요? 저희 바보랑 만나고 싶지 않으신 건가요?”
“당연하지! 그 인간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나는 전에 투제와 싸웠던 일 때문이라고 추측해 보았다. 그때 꽤나 오랫동안 앓아누웠었지 아마? 그래서 만나기 싫어하는 걸까?
“핀. 그러지 말고 한 번 가보는 게 어때?”
“아, 아빠! 어떻게 그런 말씀을…….”
응?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예전 같았으면 ‘귀찮아. 그냥 숲에 남아 있을래’라고 하셨을 텐데…….”
……할 말이 없다. 확실히 어딘지도 모를 아인족 영토로 떠나는 것은 귀찮은 일이 틀림없다.
하지만 내게도 다 생각이 있다. 분명 그것은 귀찮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면 나쁜 점만 있는 게 아니다.
눈앞의 소녀를 보시라! 동물귀지 않은가! 게다가 꼬리까지 달려 있다!
물론 나는 곰 취향이 아니기에 그냥 귀여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인족 마을에는 다른 종류의 아인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여우라거나, 고양이라거나…….
그런 아인들을 직접 근거리에서 목격하고, 또 운이 좋다면 직접 만질 수도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물론 그 투제라는 양반을 도와주는 게 최우선 목적이지만. 흠흠. 절대 사적인 욕심 때문에 가고 싶어 하는 건 아니야.
“으으……. 딱 봐도 가고 싶어 하시는 표정이네요.”
이런. 또 표정을 들켜버렸다. 진짜 가면 하나 구해서 쓰고 다니던가 해야지 원.
“뭐…… 저도 볼일이 있기는 하니까 가도 괜찮을지도…….”
“응? 무슨 볼일?”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가기 싫어하더니 막상 가야 할 일이 있었다는 건가? 그 양반이랑 이미 싸움도 했으니 볼일은 끝 아니었나?
“그럼 저희 바보를 도와주시겠다는 뜻이지요?”
“나는 핀이 원한다면야. 도와줘도 괜찮다고 생각해.”
“……이왕 이렇게 된 거 볼일도 볼 겸 도와줄게요.”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네요.”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가는 건 좋은데…….
“너희 마을이 어디에 있는데?”
그 거리가 문제다. 아무리 아인 족이 보고 싶다지만 너무 멀면 기운이 빠질 테고, 가고 싶지 않아질지도 모른다.
“걸어서 가면 한 달. 쉬지 않고 뛰어가면 일주일이면 되겠네요.”
“하, 한 달?”
한 달이라니. 가는 도중에 지쳐 쓰러질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말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란이 한숨을 푹 쉬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길게 울려 퍼지는 휘파람이 숲 너머 하늘까지 뻗었다.
그리고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우리들을 뒤덮었다.
“저, 저건!?”
그것은 새였다. 아니, 새처럼 생긴 무언가였다.
너무 거대한 나머지 순간 비행기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까악!』
까마귀와 같은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그 물체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우리가 있는 공터의 대부분을 차지한 정체불명의 존재는 깃털을 다듬던 부리로 란에게 애교를 부렸다.
“설마 제가 그냥 왔겠습니까. 조금 생각을 깊게 하실 필요가 있겠군요.”
정말 말하는 게 거침이 없구나. 이젠 나까지 디스를 당하다니. 무서운 소녀다.
공터에 내려앉은 존재는 새처럼 보였지만, 조류라기 보단 파충류처럼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록 부리는 달렸지만…… 검은 깃털인 걸 보니 까마귀와 도마뱀을 합쳐 놓은 무언가로 보였다.
“테쿠마라고 합니다. 제가 기르는 애완조류입니다.”
“조류구나.”
하긴, 공룡도 사실 털이 북슬북슬한 존재라고 했었지 아마? 거기다 티라노 사우르스는 연구결과 닭고기 맛이 났을 거라고 했고. 공룡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이 녀석을 타고 가면 이틀 안에 도착할 겁니다. 여행에 지칠 걱정은 하지 마시죠.”
내 걱정거리를 단번에 해소시켜 주는 란.
아인족 마을이라. 과연 어떤 곳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