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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용사의 활
축제가 끝나고 그날 저녁, 나는 이곳에 온 목적 중 하나를 달성하기 위해서 파테르에게 그것을 부탁했다.
파테르는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이 어두워 보였고, 마침내 그것을 보게 된 나는 그의 표정이 왜 어두웠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이게…… 엘프 용사가 쓰던 활…….”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단정하고 심플한 활.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활의 모습이 신성해보였다. 꺾어지는 곡선에서 느껴지는 탄력은 세상 어디까지라도 화살을 날려보낼 수 있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 활에서는 그 어떤 신성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야?”
“제 선대께서 간수하시던 도중에 일이 벌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 파테르가 속한 엘프 부족은 인간들을 배척하며 자신들끼리 숲에서 살아가는 부족이라고 했다.
그래서 전쟁이 사라진 이후에도 끝없이 영토를 넓혀가는 인간들과 계속 충돌이 있었고, 그것은 곧 서로 죽고 죽이는 전투로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100년 전쯤에 인간들과 마지막 전투가 있었고, 그 때 인간들을 막아내고 난 뒤에 돌아오자 활에서 신성력이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그 당시 인간들은 소규모로 군대를 이끌고 저희에게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이유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이 활을 사용할 필요도 없는 전투였기에 활을 두고 출정했거늘, 그게 크나큰 실책이었습니다.”
“혹시 인간들이 훔쳐갔다고 믿는 거야?”
“믿고 싶진 않지만…… 활에서 신성력이 사라진 후로는 더 이상 인간들과 충돌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싸움을 걸어온 이유가 모두 활에 깃든 신성력 때문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파테르가 활을 쓰다듬었다. 그의 표정은 예전의 활을 그리워하는 모습이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인간 외엔 의심할 상대가 없군요.”
인간들을 변호해 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나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마음대로 신성력을 회수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역시 그 녀석밖에 없다. 형제의 기억 속에서도 형제에게 서려 있는 신성력을 힘들이지 않고 쉽게 빼앗아간 녀석이 있지 않은가.
바로 다른 용사들을 이끌던 대장 격 인물.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그는 신성력을 회수하고 있었다.
에반슈트 가문에 이어 이번엔 엘프들의 활까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다른 계획을 위해서인가.
지금까지 회수하거나 확인한 무기는 총 네 개.
벨룸이 가지고 있던 도끼.
비루스 국왕의 지팡이.
에반슈트 가문의 단검.
그리고 오늘 확인한 엘프의 활.
남은 세 개의 무기는 각각 마족 용사와 아인족 용사, 그리고 용사들을 이끌던 대장이자 아직도 살아 있을지 모르는 노인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뿐이다.
그 무기들은 어디에 있을까. 각자 그 후손들이 잘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무기들처럼 이미 신성력을 회수당해 평범한 무기가 됐을까?
“언젠가 용사를 찾아봐야겠어.”
“네?”
“아냐. 아무것도.”
지금 파테르에게 진실을 알려줘선 안 된다. 방금 전에 말하지 않았는가? 자신들은 인간들과 어울리지 않고 싸워왔다고.
지금 활에 서려 있던 신성력을 빼앗아 간 존재가 인간 용사일지도 모른다는 나의 추측을 말해줬다간 전쟁을 벌이겠다며 세상에 나갈지도 모른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대답은 하지 말자.
“세계수님. 여기 있습니다. 원래 세계수님께서 주신 활.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아냐. 괜찮아. 계속 가지고 있어도 돼. 그냥 확인만 해본 거니까.”
내게 활을 주려는 파테르의 손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소중한 활인데 빼앗을 수는 없지. 게다가 어차피 내가 가져간다고 해서 쓸 일도 없으니까.
이제 확인할 것도 끝났으니 내일 아침에 숲으로 돌아가야겠다.
나는 자기 전에 내 형제에게 신성력을 나눠주기 위해 집 뒤뜰로 향했다. 축제로 인하여 삶의 활력을 되찾았으니 어쩌면 받아들일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는가?
“여전히 받을 수는 없나 보구나.”
아쉽게도 내 예상과 다르게 나의 형제는 신성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단순히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손을 대고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니, 생명의 불꽃이 타들어가고 있는 곳에 작은 균열이 있었다.
신성력을 주어도 전부 저곳으로 빠져나간다. 혹시 그동안 몸에 맞지 않는 신성력을 너무 많이 받아들인 탓에 무리가 간 게 아닐까? 정상적인 세계수가 아닌 만들어진 세계수라서?
“꾸준히 자라길 바라는 수밖에.”
세월이 지나면 저 상처도 언젠간 낫겠지. 그 때가 되면 다시 와서 신성력을 나눠주자. 그럼 금방 자라나 자아를 되찾을 수도 있겠지.
참으로 바쁜 하루였다. 축제부터 시작해서 용사의 무기, 그리고 내 형제를 돌보는 일까지.
이제 내일 숲으로 돌아가면 다시 한가한 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곰이 먼저 들어와 침대 맡에서 강아지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아. 그래. 한 명이 부족하다.
“핀은 어디 갔지?”
금방 돌아오겠지. 핀이니까. 잠시 숲을 산책하러 간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 누워 핀을 기다리다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감겨와 잠이 들어버렸다.
* * *
엘프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산 중턱.
그곳에서 한 인영(人影)이 나무에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제 때가 되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을 뿐.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느낀 인영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찾았다.”
홀로 마지막 순간을 보려내려 했건만,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인영은 감았던 눈을 뜨고 이승에서 타인과 마지막 만남을 맞이했다.
“당신이군요. 계속 저희를 지켜봤던 사람이.”
“……하이엘프로군요. 과연. 역사에 적혀 있던 대로 뛰어나군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하이엘프의 존재조차 모르거늘, 그는 핀이 하이엘프라는 사실을 마주친 순간 눈치채고 있었다.
하이엘프를 구별하는 법은 간단하다. 모든 엘프의 눈동자는 초록색이지만 하이엘프는 푸른색이다. 그러나 하이엘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현재를 살고 있는 인간들 중에 아는 이가 없었으며, 그걸 구분하는 방법 역시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지? 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지?”
핀이 범인을 심문하듯이 물었다. 그녀는 위그드라실이 괴물에게 잡혀갈 뻔한 이후로 계속 인영의 시선을 신경쓰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들을 관찰하는 듯 한 시선. 그 때문에 계속해서 그녀는 그 시선을 찾기 위해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자의식 과잉이군요. 저는 당신들을 본 게 아닙니다.”
“거짓말. 믿지 않아.”
“믿든 안 믿든 당신 자유입니다. 제가 지켜보던 건 제가 만든 아이였으니까요.”
“네 아이?”
“당신들이 괴물이라 부르던 그 아이…… 제가 만든 세계수를 말입니다.”
세계수를 만들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위그드라실과 함께 기억을 보지 못한 핀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위그드라실이 이곳에 있었다면, 그 인영의 정체가 형제의 기억 속에서 볼 수 있었던 연구원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을 것이다.
물론 겉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이 중년의 남성은 형제의 기억 속에 없었다. 형제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연구원들은 새파랗게 젊은 시절과 완전히 노인이 된 시절의 모습만 볼 수 있었으니까.
대신에 위그드라실이 이자를 봤다면 이렇게 불렀을 것이다.
‘아! 우리를 구해줬던 신전에서 오신 분!’
그렇다. 인영의 정체는 처음 위그드라실이 산에서 조난당했을 때 구해줬던 중년의 신관이었다.
핀은 그를 알지 못했고, 그의 수상한 행동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지만 곧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알 수 있었다.
“뭐야……? 당신 대체…….”
점점 투명해지는 그의 육체.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사라져가는 그의 모습에 중년의 신관이 정상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신관은 아무 말 없이 핀을 보고 웃어주었다. 그토록 바라던 자신의 창조물이 자유를 되찾는 모습을 봤으니 이제 여한이 없었다.
그 증거로 예전에 죽어 영혼만 남은 자신의 육체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영혼으로 나마 이 숲에 떠돌 수 있었던 것도,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신의 기적이라 믿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신성력을 연구하는 동안 어떤 영향을 받았을지도. 연구원이었던 그는 그렇게 추측해보았지만 확실한 연구 없이 정확한 해답은 내릴 수 없었다.
“예전에 죽은 망령이라고 해두죠. 그저 미련이 남아…… 이곳에서 떠돌고 있던.”
“대체 무슨 일을 꾸민 거야? 대체 정체가 뭐야!?”
여전히 핀은 그를 믿지 않았다. 그것은 에반슈트 가문에서 싱이 정체불명의 존재들을 조심하라 말해준 충고로부터 시작된 경계심이었다.
“아무것도 꾸미지 않았습니다. 아니, 꾸몄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분께선 제 창조물이 마물이 되어 이 시대에 뒤떨어진 엘프들을 몰살하기 바라셨던 것 같지만…… 다른 대처를 하지 않으신 걸 보면 이제 모든 걸 포기하신 것 같군요.”
“몰살…… 이라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마지막으로 그분을 봤을 때도 이미 세상일에 해탈하고 계셨으니까요.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으신 거겠죠. 아니면…….”
그의 모습이 완전히 투명해지며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지는 와중에도 그는 핀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신이 되셨다고 착각하시는 걸지도.”
사라진 중년신관. 그는 과연 유령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핀이 모르는 마법으로 도망쳐버린 것일까.
무엇도 알 수 없었지만 핀은 그가 말한 그분에 대해 고민하며 하룻밤을 보냈고, 열심히 고민한 끝에 그가 말한 그 분의 정체를 어렴풋하게나마 알아챌 수 있었다.
“설마 그분이란 게…….”
* * *
다음 날 아침, 우리들은 몸을 추스르고 처음 우리가 나왔던 나무로 향했다.
챙길 짐도 없었기에 몸만 오면 되니 이별은 빠르고 신속했다.
“그럼. 잘 부탁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계수님. 저희가 몸을 바쳐서라도 지켜드리겠습니다.”
파테르라면, 그리고 이 마을 사람들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 숲에 있는 엘프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연을 사랑하는 녀석들이니까.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볼테르의 안색이 좋지 않다. 표정이 메슥거리는 게 아무래도 나무 집에서 머문 정신적 충격이 슬슬 한계까지 도달한 것 같다.
“그럼 잘 있어!”
엘프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옹이 구멍 속으로 몸을 날렸다.
이번 여행은 정말 기쁘기 그지없는 여행이었다. 나에게도 형제가 생긴 최고의 여행이었으니까.
숲으로 돌아가면 또 다시 평범한 일상이 시작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숲 반대편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생각이 안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녕?”
예전에 봤었던 한 인물이 우리 숲에 손님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