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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엘프의 축제
괴물로 변한 세계수가 제 모습을 되찾으면서 숲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뿌리들에게 붙잡혀 끌려들어갔던 파테르는 오필리아가 어떻게 구했는지 마을에서 두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으음…….”
파테르는 기절한 채 정신을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오필리아가 집으로 옮겨 옆에서 간호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헌신적으로 아버지를 돌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테르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오필리아?”
“아빠.”
눈을 뜬 파테르는 무슨 상황인지 몰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깨어난 그를 보며 오필리아가 눈물을 글썽이더니, 파테르의 품에 달려들어 그를 끌어안았다.
“아빠……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으음? 오필리아…… 그러고 보니 너……!”
이제 모든 기억이 돌아온 것일까. 파테르의 표정이 엄격해지며 오필리아를 나무랐다.
“내가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마음대로 뛰어들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느냐! 좀 더 생각하고 행동해야지!”
“알았어요. 이제 그렇게 할게요.”
“뭐든지 혼자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마라! 어른이라고 해서 혼자서 가능한 일이 있고 불가능한 일이 있는 법이다. 왜 우리가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생각하느냐! 언제까지 철 없이 애들처럼 굴 생각이야!”
“더 혼내주세요. 더! 더!”
……으음. 훈훈한 광경이 점점 이상해진다. 매도당하길 원하는 오필리아를 바라보던 파테르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나와 다른 엘프들로 시선을 돌렸다.
“세계수님. 손에 들고 계신 나무는……?”
“이게 이번 사건의 원흉이야.”
가까이 다가가 파테르에게 작고 어린 세계수를 보여주었다. 시들어 있는 가지를 조심스럽게 만진 파테르는 뭔가를 느꼈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이분도 세계수가 아닙니까!?”
“맞아. 내 형제지.”
아쉽게도 괴물에서 벗어난 나의 형제는 자아를 가지지 못했다. 가지고 있던 모든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조차 기적이었다.
만약 자아가 다시 돌아온다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지금 상태가 심각해 언제 죽을지 모른다.
파테르에게 형제를 보여주고 난 뒤, 나는 그의 허락을 맡고 그의 집 주변에 조심스레 내 형제를 심었다. 신성력을 형제에게 불어넣어 봤지만, 더 이상 다른 기운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 된 것인지 신성력은 주는 즉시 다시 빠져나왔다.
“이제 거부하지 않아도 돼. 어서 받아. 그래야 건강해지지.”
그가 왜 거부하는지 기억을 통해 알고 있다. 자기와 같은 동료들의 신성력을 억지로 주입받은 것 때문이겠지.
그 기억 때문에 마물이 된 이후에도 다른 나무들의 생명력을 끝까지 빨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마물에서 벗어난 지금은 완전히 삶의 의지를 내려놨는지 그 어떤 기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제는 받아들여도 되는데.”
아무리 말해봐야 자아가 없는 내 형제는 나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부디 삶의 마지막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건강히 자라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뒤뜰에 형제를 심고 난 다음 나는 형제의 기억을 홀로 조용히 곱씹어 보았다. 기억 속의 형제는 인간들에 의해 실험체로 사용되고 있었다.
진짜로 형제인 것은 아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 세계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인공 세계수였으니까.
아마 모든 세계수가 사라지고 난 뒤,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마기를 막기 위해서 실험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마지막에 본 그 노인의 생명연장을 위해 실험을 감행했던 것일까?
“그 노인은 분명…… 용사겠지?”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이미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그곳에 있던 세계수들의 신성력은 내 형제에게 모두 투여됐고, 마지막엔 용사가 모든 신성력을 빼앗은 것으로 끝이 났다.
노인이 된 용사. 그의 이름도, 행적도 알 수 없지만 나는 그에게서 애처로움을 느꼈다.
분명 그는 세상을 위해 신성력을 모두 박탈해 갔다. 그것으로 인해 마기가 준동했고, 그는 영원불사의 생명을 얻은 신처럼 군림하며 세상을 조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세계수의 힘은, 신성력은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신성력이 젊음을 유지시켜 주고 모든 질병을 치료해 준다고는 하나 그것 역시 한계가 있는 법이다. 고작 백 년을 간신히 살아가는 인간이 많은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영원히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수로서 성체가 가까워진 내게 있어서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었고, 변장 따위가 아닌 기억 속의 늙은 용사를 보고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물이 깨끗하고 신성할지라도, 그릇 자체의 본질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기억 속의 연도가 어떻게 되는지 잘은 몰라도 용사는 아주 긴 세월을 살아왔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그 정도 살아온 것만 해도 신성력에 의한 기적인 것이다.
과연 지금도 살아 있을까? 살아 있다면 기억 속 마지막 장면처럼 생에 집착하며 신성력을 배양하려 미친 듯이 노력하고 있을까?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발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말하던 인류의 분쟁을 없애기 위한 마기는 모두 사라져 버렸으니까.
“하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은 내 형제가 부디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가지가 휘날릴 정도로 큰 바람이라도 불면 몸이 꺾여서 죽을 것만 같은 애처로운 나의 형제.
제발. 삶을 놓지 말아줘.
* * *
“위그드라실 님.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하루 종일 밖에 나와 형제 앞에 쭈그려 앉아 있는 내가 걱정됐는지 레벤토가 곁에 다가왔다. 다른 아이들 역시 내 옆에서 아무 말 없이 함께 앉아 시간을 보내주었다.
“과연 다시 살아날까?”
“아빠가 곁에서 이렇게 돌봐주고 있으니까 금방 다시 기운을 되찾을 거예요.”
“곰.”
「금방 살아날 거다.」
나를 격려해 주는 아이들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 기분을 나의 형제에게도 나눠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형제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뜨니 침실이었다.
잠에서 깨어나 밖에 나가보니 엘프 마을이 달라져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과 무늬의 도구들이 집집마다 걸려 있었고, 다들 이마부터 코까지 가릴 수 있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우왁!”
“깜짝이야!”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놀랬다. 시원하게 웃으며 가면을 벗은 인물은 핀이었다.
“핀.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축제래요.”
“축제?”
“네. 축제입니다. 세계수님.”
가면을 쓴 다른 인물들이 나타났다. 동물의 얼굴을 본따 만든 가면 아래 감춰진 인물들은 파테르와 오필리아였다.
“세계수님께서 기운이 없으신 것 같아 특별히 축제를 열어 보았습니다. 저희 부족에서 내려오는 전통이지요.”
그리고 파테르가 축제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저희들은 나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숲에 큰 불이 나거나, 나무들이 대량으로 죽는 경우가 발생하면 그 영혼을 달래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지요. 죽은 나무의 영혼이나 죽어가는 나무의 영혼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시끌벅적한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파테르가 쓰고 있는 가면을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저희만 즐긴다면 그건 나무의 영혼을 위한 축제라고 할 수 없죠. 나무들도 영혼이 있고, 그들의 영혼은 정령이 되어 우리와 어울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이 많은 나무의 정령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면을 쓰는 거야?”
“예. 그래야 나무의 정령도 가면을 쓰고 몰래 축제에 참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래된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설화와 같은 이야기다. 나무의 영혼이 정령이 되어 우리와 함께 어울리며 노는 축제라니. 어차피 내 형제는 자아조차 없어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를 위한 축제를 여는 건 좋다고 생각한다.
“아빠. 여기요. 아빠 전용 가면이에요.”
“고마워.”
나를 위한 가면은 하얀색 광택이 빛나고 있는 까마귀 부리가 달린 가면이었다. 옆에는 잎사귀가 장식으로 붙어 있었다.
“혹시 이거랑 똑같은 거 하나 더 있어?”
“미리 준비했죠.”
준비성이 철저하군. 내가 쓴 가면과 똑같은 가면을 들고 나는 내 형제 앞으로 향했다. 축제를 즐기려면 가면을 써야 하는데 가면이 없어서 못 나오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언제든지 즐기고 싶으면 나와. 기다릴게.”
그렇게 축제는 시작되었다. 인간의 축제처럼 광란의 도가니는 아니었다. 서로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고, 본인들이 준비한 음식들을 차려와 함께 나눠 먹는 축제였다.
참으로 엘프다운 조용한 축제라고 생각했다.
“곰!”
「내 가면은 왜 이거냐!」
곰이 곰 가면을 쓰고 난동을 부리다 핀에게 검거당하는 모습이 애처로워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적당히 시끄럽고 적당히 편안한 분위기가 정말로 정령이 있다면 함께 어울리고 싶어 할 그런 축제였다.
“아빠.”
“응? 왜 그래?”
곰을 파테르의 집에 연금하고 돌아온 핀이 내게 속삭였다. 나는 다른 엘프들도 말을 멈추고 조용히 어디론가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기요. 저기.”
그리고 핀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한 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나와 똑같은 가면을 쓰고 엘프들의 집 뒤에 숨어 몰래 우리를 훔쳐보고 있는 어린아이. 우물쭈물 거리며 다가오고 싶어 하지만 부끄러운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숨어버리는 부끄럼쟁이.
“아…….”
나왔구나. 그래. 죽은 게 아니었어. 삶의 끈을 놓은 게 아니었어.
나는 곧바로 아이가 숨은 곳으로 달려가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며 흠칫 놀랐지만 조심스레 내게 다가와 나의 손을 잡았다.
“이리와. 함께 하자.”
“……정말 괜찮아?”
“그럼. 괜찮고말고.”
“하지만…… 다들 화났을 텐데…… 나 때문에 숲이…….”
“화나지 않았습니다. 세계수님.”
“저희는 괜찮아요. 숲은 원래대로 돌아왔으니까.”
엘프들이 아이의 불안을 지워주듯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그제야 아이는 나에게 이끌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축제 속에서 눈을 멀뚱거리며 사람들을 지켜보던 아이가 내게 말했다.
“고마워.”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귀여운 동생. 그렇게 엘프들의 축제는 해가 지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축제가 끝날 무렵, 아이는 빛 무리가 되어 천천히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 빛의 알갱이가 향하는 곳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나의 형제가 내게 속삭여 주었다. 귀가 간지러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고마워. 누나.”
“천만에. 형제잖아.”
그렇게 가면만 남기고 사라진 나의 형제. 아마 먼 훗날, 건강하게 자라나게 되면 다시 자아를 되찾지 않을까?
그날이 한시라도 빨리 다가왔으면 좋겠다.
응? 잠깐. 그런데 누나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그렇게 여자처럼 생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