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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괴물의 정체(2)
작고 어린 나무가 처음으로 세상을 느낀 것은, 차갑고 축축하다는 감각이었다.
이제 막 자아라는 것이 싹을 텄지만, 그 전에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따뜻한 햇살의 감촉과 부드러운 흙의 감촉, 그곳을 파고드는 단비의 시원한 감각은 이곳에서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세계. 처음 태어났던 그리운 그곳이 아니라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간이라는 것을 나무는 아직 여물지 않은 어린 자아로 간신히 깨달았다.
그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직 날짜에 대한 개념이 없는 나무에겐 그저 긴 시간이 흘렀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해가 지고 뜨는 것조차 느낄 수 없는 곳이었기에 설사 날짜에 대해 깨달았다고 해서 며칠이, 몇 달이 흘렀는지 아는 것은 요원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씩 변화가 생겼기에 나무는 일상이 지루하지 않았다. 때때로 누군가가 자신을 들고 새로운 장소로 나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곳은 원래 있던 곳과 다르게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기에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다. 또 그 때마다 새로운 흙이 잔뜩 들어와 뿌리를 간지럽혔고, 그것은 나무에게 있어서 즐거운 장난과 같았기에 언제나 그 시간을 기다려 왔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아가 생긴 나무는 조금씩 세상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있는 곳을 처음 느끼게 된 나무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하얀색 가운을 입고 돌아다니는 이상한 사람들.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나무는 자신보다 작고 허약해 보이는 그들을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움직이지 못하는데, 그들은 움직인다. 나도 움직이고 싶다. 저들처럼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싶다.
그렇게 움직임을 소망했지만 나무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서야 나무는 자신을 새로운 장소로 옮기는 자들이 그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상한 귀가 달린 사람들이, 돌처럼 단단한 근육을 가진 사람들이 바닥에 달린 끈을 잡아당기자 수레와 함께 몸이 움직였다. 커다란 화분 안에 담긴 흙더미에 묻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내가 못 움직이는 건 흙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그들에게 딱히 불만은 없었다. 자신을 돌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다만, 조금만 더 밖에 자주 나갔으면 좋겠다는 불만 아닌 투정을 몰래 생각하며 지냈다.
시간이 또 흘렀다.
이제 말이라는 것에 익숙해진 나무는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나무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아니, 그들은 나무가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신성력을 주입하며 성장시킨 지 60년 차인가요?”
“예. 하지만 딱히 변화는 없습니다. 정령체가 나타날 기미조차 안 보이는군요.”
“흐음. 이래서야 다른 나무들한테 뽑아낸 신성력이 아깝군요.”
“아깝죠.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는 건 더 아까우니…… 추가적으로 신성력을 더 투여해 볼까요?”
“그러도록 하죠. 허가는 제가 받아오겠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사람들이 이상한 물건을 들고 다시 찾아왔다.
‘그게 뭐야?’
사람들이 나무에게 다가갔다. 평소에 들고 오던 냄새 나는 거름이나, 시원한 물을 뿌려주던 파란색 물통이 아닌 이상하게 생긴 작은 통이었다. 그 끝은 뾰족한 바늘이 달려 있어서 본능적으로 나무는 공포심을 느꼈다.
‘무서워.’
그 뾰족한 끝을 자신에게 찌르는 순간, 따끔한 고통과 함께 나무는 전신에 힘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마치 나무가 좋아하던 햇볕을 한데모아 꾹 짜서 만든 스프를 몸속에 직접 집어넣어 주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나무도 놀랄 정도로 몸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살짝 졸린 것 같던 정신도 또렷해지며 전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효과가 있긴 하군요. 하지만…… 이 정도로 과연 자아가 생겨날지.”
“몇 번 더 투여해 보자고.”
“신성력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허락하신 양으론 앞으로 두세 번 정도가 한계입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해봐야지.”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봤지만 나무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자신에게 뭔가를 바란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무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부디…… 어서 자라서 신성력을 많이 만들어주렴.”
‘알았어. 근데 신성력이 뭐야?’
아쉽게도 사람들은 나무의 질문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무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무럭무럭 자라기만 한다면 신성력이라는 것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빨리 자라나야지. 이제 내가 도와줄게.’
나무는 꿈을 꾸었다.
가끔씩 밖에 나갈 때마다 볼 수 있는 파란 하늘까지 뻗어있는 자신의 가지를.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크고 강하게 자라난 자신이 신성력이라는 것을 뿜어내는 모습을.
나무의 상상 속에서 신성력은 태양처럼 따뜻하고 물처럼 시원한 액체였고, 그것을 비처럼 쏟아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본인도 즐거워했다.
‘나도 빨리 신성력을 만들 거야.’
* * *
긴 시간이 흘렀다. 젊고 강해 보이던 사람들도 이제는 자신의 껍질처럼 주름살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가 밖에 나갔을 때 봤었던 눈처럼 보여서 털어주고 싶었다.
몇몇 사람들은 어느 날부턴가 모습을 감췄다. 사라지기 전에 나무에게 ‘건강하게 자라렴’이라 인사했던 순간을, 나무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나무는 더 이상 화분이 아닌, 제대로 된 땅에 묻혀 외부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비록 그곳은 원래 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정원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무는 만족했다.
“인사하렴. 네 친구들이란다.”
시간이 지나며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큰 변화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나무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나무는 조금이지만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모두에게 관심을 받으며, 사랑을 받으며 자라온 나무는 이 세상에 자신은 단 하나뿐인 존재라고 믿고 있었다.
조금은 질투심이 났지만, 다른 나무들은 자신보다 작고 초라했기에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있었고 그 생각대로 사람들은 그에게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주었다.
‘안녕?’
무엇보다 그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해준 것은 다른 나무들은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때때로 몇몇 나무들이 ‘으아앙’이라거나 ‘아아……’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긴 했지만, 자신처럼 사람들의 말을 따라하는 나무는 한 그루도 없었다.
‘너희들은 혹시 나랑 가족이니?’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나무들. 그리고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포근한 감각.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절로 즐거워졌기에 나무는 기뻐서 언젠가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그중에서 두 명의 사람이 서로를 껴안고 얼굴을 맞대었을 때 모두가 박수를 치며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모두가 즐겁게 노래 부르며 춤을 추는 날이 왔었지.
나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싶다. 이 즐거움을 표현하고 싶다.
아쉽게도 나무는 그것이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마음속으로 그것을 그리는 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로 모든 세계수가 모였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세상에 남은 세계수가 이게 전부라니…….”
나무들의 수는 모두 합쳐 여덟 그루. 원래 있던 나무를 포함한 숫자였다.
생각을 할 수 있는 나무는 자신이 세계수라는 사실을 이 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렇게 다른 나무들에게 말을 걸며, 사람들에게 말을 걸며 시간을 보내던 나무는 어느 날부턴가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뭔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나무들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눈물이란 것이 정확히 어떤 감정에서 나오는 건지 나무는 알 수 없었지만, 생명이라면 누구나 다 지니고 있는 감정에 의해 그들이 슬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슬퍼하는 것일까?
그리고 나무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뭐하는 거야?’
언젠가 자신에게 놓았던 뾰족한 가시가 달린 통. 그것의 이름이 주사기라는 것을 알게 된 나무였지만,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주사기를 다른 나무들에게 꽂아 넣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주사기 안에는 항상 자신을 기분 좋게 해주는 햇볕 같은 게 들어있지 않았던가? 텅 비어 있는 주사기를 꽂아서 뭘 하려는 걸까?
“그럼 신성력을 추출하겠습니다.”
주사기의 뒷부분을 쭉 잡아당기자, 나무는 갑자기 들려온 비명소리에 전신이 떨렸다.
‘꺄아아악!’
세상을 찢는 것만 같은 비명. 모든 즐거움도 저 비명 앞에선 그 빛을 잃고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다.
“신성력 추출 완료. 그럼 이제 실험체에게 투입하겠습니다.”
‘잠깐. 그게 뭐야? 그게 신성력이야? 근데 그걸 왜 다른 애들한테서 빼앗은 거야?’
그리고 자신에게 들어오는 신성력을 느끼며, 나무는 비로소 그 때서야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기쁘게 해주던, 자신을 자라나게 해주던 그 신비한 물질이 신성력이었다는 사실을.
‘이, 이게 신성력이었던 거야?’
신성력이 투입되자마자 또 다시 성장하는 나무. 그리고 전보다 넓어진 감각이 그의 사고를 일깨워주었다.
다른 나무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리고 자신의 몸속에 존재하는 신성력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좀 더 투여할까요?”
“다른 실험체들에게서 한 번씩 신성력을 추출해서 투여하자고. 최대한 빨리 성과를 기대하고 계시니까.”
‘그만 둬! 그만 뺏어가란 말이야! 아파하잖아!’
여전히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른 나무들에게서 신성력을 뽑아댔고, 그것을 자신에게 주입했지만 나무는 전과 다르게 전혀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다른 나무들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듣고 있는데 어찌 기쁨을 느낄 수 있겠는가?
‘제발…… 제발 그만해!’
“이것으로 오늘 치는 전부 투여했습니다만…… 아직 성체가 되진 못했군요.”
“어쩔 수 없지. 오늘부터 매일 같이 투여해 보는 수밖에.”
‘이걸 계속한다고?’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다른 나무들의 몸속에 있는 신성력이라는 기운은 자신처럼 많지 않았다. 앞으로 몇 번만 더 뽑아낸다면 곧 모든 신성력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다른 나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 이상으로 나무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신성력이 모두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신성력을 받을 때마다 기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신성력을 모두 잃는다면,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다른 나무들을 걱정하며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더 이상 하지 말라며 말을 걸었지만, 나무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사람들에게 닿지 않았다.
모든 신성력을 잃은 다른 나무들이 말라 죽는 모습을 보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