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68화 (16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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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괴물의 정체(1)

밧줄로 꽁꽁 묶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참 기묘한 감각이다.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는 그 느낌.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자유를 박탈당한 상실감과 함께 묘한 쾌감(?)을 가져다 준다.

물론 지금 내 상태는 묶인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론 묶인 게 아니라 움직이고자 한다면 움직일 수 있었지만, 낚시를 하기 위해선 움직여선 안 되기에 묶인 거나 다름없었다.

“얘들아…… 다들 거기 있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저 멀리 수풀에서 핀이 얼굴을 살짝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주변에 엘프들이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내가 이렇게 묶인 척 하고 있는 이유는 아까 있었던 오필리아의 계획을 듣고 난 이후부터이다.

“세계수님. 마력 좀 빌려주세요.”

“안 돼.”

오필리아의 계획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미끼 역할을 오필리아가 해서는 안 된다.

이유야 여러 가지 있었다. 파테르가 괴물에게 먹힌 지금 오필리아까지 먹힌다면 한 가족이 몰살당하는 꼴이 되지 않는가?

그리고 내 마력을 건네주고는 싶지만, 엘프인 오필리아가 세계수의 마력에 영향을 받는다면 하이엘프가 될 것이고 그럼 고향을 떠나 내 곁에 머물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하이엘프는 핀으로 충분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무엇보다 미끼라면 먹음직스러운, 고급스러운 걸로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필리아에게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봐야 내가 가진 마력을 전부 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 맞다. 나는 내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내가 미끼가 된다면, 혹시나 구출이 늦어 괴물에게 먹힌다 할지라도 죽지는 않는다. 정령체가 사라지고 의식이 다시 나무로 돌아갈 뿐이다.

이런 좋은 미끼가 어디 있겠는가?

물고기가 좋아하는 음식 맛에, 삼켜도 다시 되돌아온다니.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은 엘퀴라즈 숲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꽤 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먼 곳에서 정령체가 강제로 풀려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되돌아가겠…… 지?”

괜찮을 거야. 괜찮겠지. 그렇게 내 자신을 세뇌하며 괴물을 부르기 위해 마력을 서서히 내뿜었다.

“내 예상이 맞았으면 좋겠는데.”

그냥 나무에 내 기운을 집어넣는 것은 미끼로 적합하지 않았다. 우리가 눈치 못 채게 뿌리를 통해 마력을 흡수할 수 있지 않은가? 내가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곤 하지만, 가까이 접근해야 했기에 괴물이 의심하고 접근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공중에 마력을 뿌리면 바람과 함께 흩어져 버리니 그것 역시 무리였고.

“과연…… 올까?”

그래서 선택한 것이 내 스스로 미끼가 된다. 촉수가 잘 보일 수 있도록 통나무 위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상태로 괴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슬슬 어깨랑 허리가 뻐근해져 올 무렵, 땅이 서서히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왔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수풀 쪽을 쳐다보니 핀과 다른 엘프들이 괴물을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땅거죽이 찢어지며 촉수가 나를 향해 뻗어왔다. 그 순간, 핀이 번개처럼 달려와 나를 붙잡고 곰을 향해 던졌다.

“곰! 받아!”

“곰!”

「알았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곰에 품에 골인하듯이 던져진 나는, 내게서 마력을 빨아들이기 위해 올라온 촉수들을 붙잡고 있는 핀을 볼 수 있었다.

“핀! 우선 끌어 올려! 땅 속에 있으면 아무것도 못해!”

“알았어요!”

촉수들을 뭉텅이로 붙잡고 땅을 박차는 핀. 그 무지막지한 힘이 대지와 만나며 땅을 산산 조각냈고, 그 모든 힘은 반작용에 의해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갈 수 있는 힘으로 변했다.

“얌전히 모습을 드러내시지!”

촉수가 핀의 손에 붙잡혀 지상으로 끌려져 나왔다. 하지만 얼마나 더 남아 있는지 딸려 나온 촉수들은 마치 지렁이가 서로 엉겨 있는 것 같았을 뿐, 아직도 땅 속에 파묻혀 있었다.

“으랏차!”

공중에서 핀이 촉수를 붙잡은 채 기합을 지르며 크게 휘둘렀다. 땅이 들썩거리며 나무를 뽑는 것 같은 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핀! 조금만 더 힘내!”

이제 거의 다 끌어냈다. 조금만 더 하면 완전히 괴물의 모습이 드러날 것 같았다.

“흐아아아압!!!”

하늘을 수놓는 기합소리가 산 중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뿌리 깊은 사랑니가 뽑혀 나오듯이 괴물이 땅 속에서 뽑혀져 나왔다.

우지직.

“…….”

크다. 핀이 있는 곳까지 올려다봤지만, 정말 너무 컸다.

그것은 온통 뿌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 한 군데도 빠지지 않고 촉수와 같은 뿌리가 엉겨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신화 속 거인의 모습처럼 거대했다.

하늘 높이 솟아올랐던 핀의 다리 아래까지 뻗어 올라간 촉수의 머리는, 처음으로 밖으로 나왔는지 하늘 위에 떠있는 태양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저게 대체…….”

나무뿌리로 이루어진, 인간 형상을 하고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괴물의 정체였다.

“전원 발사 준비!”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엘프들이 활을 장전하고 마법으로 그 끝에 불을 붙였다. 괴물이 무섭게 생기긴 했지만 어차피 나무로 이루어진 존재. 불화살 한 방이면 죽창에 찔린 것 마냥 한 방에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잠깐! 안 돼요! 아빠가 아직 안에 계실지도 몰라요!”

오필리아가 소리쳤다. 엘프들이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파테르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오필리아가 이야기했지만 그것을 믿는 엘프는 없는 것 같았다.

“지금 해치우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오필리아. 네 마음은 알겠지만…….”

그때, 괴물의 머리 위에 안착한 핀이 보였다. 주먹을 휘두르며 괴물을 끝장내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에 놀란 것일까. 휘두르려던 주먹을 걷어 들인 핀이 괴물을 박차며 우리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날아왔다.

「우우.」

그 반동에 태양을 바라보고 있던 괴물이 흔들리며 울부짖었다. 비틀거리던 괴물은 이제 태양에 관심이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공격 중지!”

땅에 착륙한 핀이 흙먼지를 걷어내며 엘프들에게 외쳤다. 다급한 목소리에 엘프들이 놓으려던 활시위를 다시 붙잡았다.

“파테르가 아직 살아 있어요!”

“뭐!?”

“머리 위에서 봤어요. 나무뿌리들 사이로 파테르의 모습이 살짝 보였어요. 꺼내고 싶었지만,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 버렸고 불화살을 발사할 것 같아서 먼저 이곳으로 왔어요.”

살아 있었단 말인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놀라고 있는 사이, 오필리아가 괴물을 향해 달려갔다.

“제가 구하겠어요!”

“안 돼! 가지 마!”

하지만 오필리아가 괴물에게 접근하는 순간, 괴물의 몸에서 뻗어 나온 뿌리가 순식간에 그녀를 휘감아 집어 삼켜 버렸다.

파테르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너무 감정적이다. 확실히 그 면모를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불은 중지야. 괴물이 불타 버리기라도 했다간, 안에 있는 파테르랑 오필리아가 연기에 질식해 죽을지도 몰라.”

“그럼 역시 직접 베는 수밖에 없겠네요.”

핀이 레이피어를 꺼내들었다. 나는 조용히 괴물에게 달려들려는 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빠?”

“괜찮아. 잠깐만 기다려 줘.”

어째서일까. 괴물이 오필리아를 삼켜버렸는데, 그 안에 파테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마음이 급하지가 않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괴물이 우리를 발견하더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괴물이 도망갈까 봐 걱정하는 엘프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도망치려는 괴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괴물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눈도, 코도, 입도 없지만 확실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괴물 역시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주변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괜찮다는 한마디를 남긴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괴물이 몸을 숙여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 역시 괴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동산에서 처음 나를 향해 뻗어오던 촉수들을 떠올려보면, 그 때 느꼈던 감정 역시 두려움이 아니라 놀라움에 불과했다.

“이대로…… 조금만 멈춰 있어 주지 않을래?”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괴물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대로 멈춰서 하염없이 나와 눈을 마주쳐 주었다.

지금 당장 괴물을 껴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오필리아가 괴물의 몸속에 있었다. 그녀가 나올 때까지, 잠시만 이대로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움직임이 멈췄어.”

괴물의 안으로 뛰어든 오필리아. 그녀가 단검을 휘두르며 몸속에 있는 뿌리들을 잘라내었다.

핀이 한 말에 따르면 파테르는 분명 머리 부근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그곳으로 향해야 한다.

지금 자신이 벌인 짓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이, 마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역시 난 어른이 되기 글렀나 봐.’

그래도 전과는 다르다. 가슴 한편에 감추어둔 물건을 더듬으며 확인한 그녀는 계속해서 아버지를 찾기 위해 괴물의 몸속을 헤맸다.

“아빠.”

괴물의 몸은 넓었다. 끝임 없이 조여드는 나무뿌리를 헤치고 그 안을 뒤적거리며 파테르를 찾는 일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그 일념하나로 멈추지 않고 괴물의 안에서 파테르를 찾아 헤맸다.

“허억. 허억.”

얼마나 헤맸을까. 서서히 체력이 고갈되는 체력을 잠시 쉬며 회복하고 있을 무렵, 어디선가 작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오필리아가 귀를 기울이며 그 소리에 집중했다.

“……필리아.”

“아빠?”

“오필리아…….”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남은 체력을 모두 소진하며 돌진한 오필리아. 그 힘이 단검을 쥐기 힘들 정도로 바닥났을 때, 마침내 그녀는 파테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파테르가 깨어 있는 줄 알았건만, 그는 정신을 잃은 채 그녀를 부르고 있던 것이었다.

“오필리아…….”

“아빠…….”

기절한 파테르를 꼭 붙잡은 그녀가 가슴팍에 숨겨둔 물건을 꺼냈다.

한 장의 종이. 파테르와 추억이 얽힌 물건이었다.

‘다음에도 길을 잃으면 이 종이를 찢어라. 마을로 바로 귀환할 수 있는 물건이니까.’

“고마워요. 아빠.”

그녀가 종이를 찢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점차 흐릿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 * *

괴물의 촉수와 맞닿은 동안, 나는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괜찮아. 조금만 참아주지 않을래?”

괴물은 지금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안에서 자신의 몸을 찢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의 정체가 오필리아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을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파테르가 아직 괴물의 안에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우…….」

“이제 거의 다 끝났어.”

마침내 오필리아와 파테르가 괴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두 사람은 괴물의 안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 생각 없이 뛰쳐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뭔가 방법을 강구하긴 했나보다.

“아빠. 그럼 이제…….”

핀이 레이피어를 거머쥐었다. 괴물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약했다. 꼭 덩치만 큰 어린아이와 같았다.

“핀. 혹시 아무것도 못 느끼겠니?”

“으음. 네? 잘 모르겠는데요.”

역시 이 감정은 나만 느끼고 있었나보다.

괴물에게서 느끼는 이 감정. 그리움이 섞인, 오래 전에 헤어진 가족을 만난 것만 같은 이 기분.

그리고 동시에 그를 안아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아빠?”

괴물의 촉수가 천천히 나를 휘감았다. 나는 다른 엘프들에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걱정하지 마. 모두 잘될 거야.”

휘감긴 촉수가, 괴물이 나를 집어 삼켰다.

그리고 나 역시 그를 안아주기 위해 마력을 펼쳤다.

내가 가진 마력으로, 세계수의 기운으로 괴물을 감싸며 그를 안아주자 서서히 머릿속으로 어떤 광경이 떠올랐다.

그것이 괴물의 기억이라는 걸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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