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67화 (16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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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미끼

“아버지!”

“핀! 도와줘!”

“네!”

재빨리 나를 땅에 내려놓고 핀이 나무뿌리를 향해 달려갔다. 뿌리들은 파테르를 완전히 감싼 후 땅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딜 도망가!”

땅 속으로 사라진 뿌리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핀. 안 그래도 뒤집힌 땅이 핀의 주먹이 꽂히자 폭탄이 폭발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하늘로 흙더미가 치솟았다.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핀이 파테르를 구해냈는지 못 구했는지 알 수 없었다.

오필리아가 슬픈, 그리고 애가 타는 표정으로 먼지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나도, 다른 엘프들도 먼지 뒤에 가려진 핀이 해맑게 웃으며 ‘구했어요!’라고 외쳐주기만을 바랐다.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창에 묻은 먼지들을 걷어내듯 동산 위를 스쳐 지나갔다. 걷힌 먼지들 사이로 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핀은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짓고 있었다.

핀의 손에는 잘려진 뿌리 한 조각만이 들려 있었고, 그것 역시 곧 말라붙더니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아아…….”

자리에 털썩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오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너진 동산만큼이나 그녀의 가슴도 무너지고 있었다.

“아버지…….”

그녀가 애타게 파테르를 찾았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

* * *

침울하다. 공기가 무겁다. 엘프 마을 전체에 그런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누구하나 웃는 이가 없었다. 희망이란 얻을 때는 기분 좋지만, 잃으면 그 실망감이 배가 되어 돌아오는 법이다.

족장인 파테르를 잃은 엘프들은 숲을 돌볼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숲을 되살릴 거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뿌리 괴물을 본 이후로 모두들 죽은 시체처럼 걸어 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그나마 몇몇 엘프들이 나서서 뿌리괴물을 찾기 위해 수색을 개시했다. 그들은 잃은 희망 대신 분노로 자신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핀을 그들과 함께 행동하게 했다. 더 이상 희생자가 나오면 안 된다. 아직 희망은 꺼지지 않았다. 죽어가는 나무들이 아득바득 생명의 불꽃을 태우는 것처럼 희망 역시 작지만 타오르고는 있었다.

“저기 오필리아. 괜찮니?”

하지만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것은 오필리아였다. 그녀는 아버지를, 파테르를 잃은 후부터 방에 틀어 박혀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어떻게든 아버지를 찾는다며 숲을 미치도록 뛰어다녔지만, 하룻밤이 지나고 엘프들이 그녀를 발견했을 땐 혼이 빠진 인형처럼 텅 빈 눈동자로 공허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결국 찾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를 찾지 못한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기에 그녀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었다.

처음엔 희망을 가지고 찾아 헤맸을 것이다. 그럴 리 없다고, 내게, 내 가족에게 그런 일이 벌어질리 없다며 무작정 찾아 헤맸을 것이다.

스스로 끊임없이 ‘모두 잘될 거야. 분명 착오가 있었던 거겠지. 조금 다쳤을지도 몰라. 하지만 전부 추억이 되어 나중에 그땐 그랬었지 라는 말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라며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지나며 현실을 보게 됐을 것이다. 가족의 죽음이, 그 명백한 증거가 점차 다가온다. 그리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 때가 되면…….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런 상태가 돼 버린다.

그 상태에선 누가 뭐라 말하건, 희망찬 말이건 비난이건 들리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 털고 일어나는 수밖에 없다. 오히려 누군가가 달래주기 위한 말이 짜증스럽고, 별 느낌도 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나는 조용히 오필리아의 방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대체…… 그 괴물은 뭐지?”

우선 괴물의 정체다. 나무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인 것은 분명 그 괴물이 맞을 것이다. 땅 속에서 잠복해 살아가고 있는 괴물. 그 괴물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올 리가 없지. 곰. 나가자.”

“곰.”

「알았다.」

***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세계수, 위그드라실이 보였다. 어제였다면 그를 보좌하겠다고, 세계수를 지키는 일은 내게 맡겨달라며 소란을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을 건넬 상대는 없었다. 오필리아는 파테르의 얼굴을 떠올리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빠…….’

아빠라는 말을 입에 담은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어렴풋하게 기억하기론 어린 시절부터 입에 달고 살았던 그 호칭을 먼저 버린 것은 분명 자신이었다.

「난 더 이상 애가 아니라고!」

언제나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던 아버지. 이제 나도 어른이라는 뜻에서 아빠라는 호칭을 버리고 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했었다. 비록 호칭을 바꿨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오필리아는 자신이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넌 아직 어른이 아니다.」

아른거리는 파테르의 목소리. 그 목소리마저 그리워 몇 번이고 다시 듣고 싶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공허한 현실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왜! 다른 아이들은 전부 어른이 하는 일을 하는데 저만 못 하게 하시나요?」

「넌 너무 성급하다. 작은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뿌리려다 기름을 뿌릴 실수를 하는 게 바로 너다.」

내가 그렇게 성급했나? 자신에게 묻고 있었지만 그 답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성급하다. 왜 쉬운 일을 굳이 복잡하게 하는 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쉽게 끝낼 수 있는 일을 절차라는 명목 하에 긴 시간이 걸려서 일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물론 잘 살펴보면 다치지 않기 위해, 좀 더 안전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쉽게 처리한다고 해서 다칠 확률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질 만큼 아주 작았다.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절차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작은 확률이라도 언제나 그 일이 일어날 확률은 있다는 것을.

「어른이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네겐 책임감이 부족해.」

책임감이라. 그녀는 파테르가 책임감을 운운하는 것이 모두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기 위한 변명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홀로 슬픔에 잠겨 있는 동안 자신이 벌였던 짓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처음 일을 하고 싶다며 무작정 순찰로에 뛰어들었던 첫 일탈.

어둡고 깜깜한 숲의 밤을 이기지 못하고 길을 잃었던 자신을 찾기 위해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지 않았던가?

술을 빚는 일을 도와주겠다며 양조장에 뛰어 들어갔었던 일. 제대로 씻지 않아 양조장의 술들이 모두 쉬어 버렸을 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을 보았다.

마물을 사냥한다고 했을 땐 어땠던가? 아직 숲에 마물이 남아 있던 무렵, 그때도 혼자 숲으로 뛰쳐나가 마물을 발견하자마자 마구잡이로 활과 마법을 쏘아대지 않았던가? 그래서 마물을 쓰러트렸던가?

아니, 흥분한 마물에게 덮쳐지기 직전, 찾아 나온 아버지가 구해줬었지.

“뭐야. 나. 전혀 어른이 아니잖아.”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뭘 보고 나는 날 어른이라고 칭했던 걸까. 어딜 보나 철없는 애송이에 불과한데.

오필리아는 생각했다.

평생 어린아이처럼 대해줘도 좋으니 아버지만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 괴물에게 생명력을 흡수당하지 않고 멀쩡하게…….

“……!”

무엇인가 깨달은 오필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쩌면, 자신의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기 위해, 그리고 소중한 가족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가둬두던 방 안에서 뛰쳐나갔다.

* * *

괴물을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모두가 보물을 발견하려는 사냥꾼처럼 땅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그리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괴물을 찾기 위해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까지 엘프들이 없는 곳이 없었다.

“으으.”

나 역시 그 사냥에 동참하고 있었다.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파왔지만,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고 괴물의 흔적을 찾기 위해 땅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무들에게서 마력을 흡수한 흔적. 그리고 동산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쫓아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아쉽게도 그 흔적은 점차 지워지고 있어서 눈에 힘을 잔뜩 주지 않으면 보기 힘들었다.

“눈이 빠질 것 같아.”

“조금 쉬시는 게 어때요? 하루 종일 일하셨잖아요.”

눈덩이를 문지르며 잠시 쉬는 사이, 핀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핀 역시 괴물을 찾기 위해 숲을 돌아다녔지만 딱히 성과는 없었는지 내게 이야기 하지 않았다.

“쉴 수는 없지. 빨리 그 괴물을 찾아야 하잖아.”

나는 순간 파테르를 구해야 하잖아. 라고 말할 뻔했다. 생명력을 흡수하는 괴물에게 끌려 지하로 사라진 그가 살아 있을 확률은…….

“세계수님!”

그때 멀리서 달려오며 나를 애타게 찾는 한 엘프 소녀가 보였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달려오다가 내 앞에서 간신히 멈춰 섰다.

“오필리아?”

방에 계속 있을 줄 알았는데. 왜 여기까지? 혹시 아버지를 찾기 위해?

“헉. 헉. 아버지는…… 아빠는 살아계실지도 몰라요.”

“응?”

“헉. 헉. 괴물…… 그러니까 괴물은 지금까지 아무것도 죽이지 않았잖아요.”

무슨 소리일까. 그런 괴물에게 잡혀 갔는데…….

그 순간, 내게도 한 가지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나무들의 생명력은 흡수했지만, 지금까지 죽은 나무는 한 그루도 없었다.

마치 살생을 피하려는 듯, 괴물은 목숨은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마력은 남겨두고 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물론 나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했다. 괴물이 설사 그의 생명력을 남겨두었다 하더라도, 땅 속으로 끌려 들어간 그가 살아 있을 확률은 지극히 희박했다.

아무리 목숨이 붙어 있다 하더라도 숨은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 줄기 희망을 간신히 붙잡고 밖으로 뛰어나온 이 애처로운 소녀에게 진실을 말할 용기는 없었다.

게다가 그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일단 괴물을 찾아야 뭔가 되지 않겠는가?

“세계수님. 아직 괴물을 찾지 못하신 거죠?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뭔데? 말해줘.”

다른 엘프들도 그녀를 보고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오필리아가 천천히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말해주었다.

“괴물은 땅 속에 숨어 있잖아요? 그럼 발견하기가 힘들어요.”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열심히 찾아도 성과가 없는 거고.”

“반대로 하면 어떨까요?”

“반대로?”

“네. 저희가 찾을 수 없다면 괴물이 저희에게 오게 하는 거예요.”

“흐음. 하지만 괴물이…….”

올까? 라고 말하려 했지만 올지도 모른다. 괴물이 원하는 것은 생명력이지 않은가?

왜 괴물은 생명력이 넘치는 엘프들은 그냥 놔둔 것일까? 나무가 잡기 편해서? 아니면 나무들의 생명력이 괴물의 입맛에 맞는 것일까?

그렇다면 싱싱한 나무를 미끼로 삼는다면 괴물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물론 땅 밑에서 접근하겠지만, 미리 함정을 파두고 기다린다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을 이해한 나는 이야기를 빠르게 진행시켰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그럼 미끼는? 지금 산에 멀쩡한 나무가 없잖아.”

“나무는 필요 없어요. 마력만 있으면 되니까.”

오필리아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가 말한 미끼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세계수님. 마력 좀 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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