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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가뭄의 원흉
숲으로 향하는 우리들의 걸음은 다급하고 비장했다.
종종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는 나의 신체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오늘도 역시나 핀의 등에 업혀 모두와 함께 숲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동안 우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제의 즐거움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다들 침울하고 괴로운 표정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곰조차 개그를 하지 않고 묵묵히 숲을 향해 걸을 뿐이었다.
나는 거기에 더해 한 가지 추가적으로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내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한 인물의 눈치를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었다.
“…….”
싸늘하다. 다른 곳보다 내 주변의 공기가 더 무겁다.
말없이 함께 걷는 오필리아와 파테르 사이에서 떠다니는 공기들이 그들의 감정에 전염이라도 된 듯 너무나도 무겁다.
너무 분위기가 가라앉아서 공기가 살짝 푸르게 보일 정도다. 물 먹는 하마라도 들고 있노라면 분명 1분도 안 돼서 통이 가득 차 버릴 것만 같은 수준이다.
마을 밖으로 나오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필리아가 이번 일에 동행하는 것에 대하여 파테르가 허락을 했다는 점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나는 오늘 파테르의 집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파탄 나고 있는 부녀 관계 사이에 끼어서 등이 터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정말 다시 말라 버렸네.”
그 두 사람의 문제를 잊기 위해 나는 더더욱 숲에 전념했다.
도착한 숲의 나무들은 어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싱싱하게 복구됐던 나무들의 상태는 하룻밤 사이에 수억 마리의 모기에게 피를 빨린 것처럼 다시 메말라 있었다.
“핀. 나 좀 내려줘.”
“네.”
핀의 등에서 내려온 나는 마른 나무에 손을 대고 나무의 생명력을, 남은 마력을 느껴보았다. 처음 나무들을 진찰했을 때처럼 나무들의 생명력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네.”
다시 한 번 내 기운을 불어 넣자 나무는 점점 생기를 되찾으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눈앞에서 병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하고 나니, 나는 이 기묘한 질병인지 저주인지 모를 현상에 대해 한 가지 의구심이 생겼다.
‘왜 죽지는 않는 거지?’
이 괴이한 현상이 질병이라면 나무를 걱정하지 않고 병세가 진행되어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벌써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꼭 ‘네 돈 전부 다 내놔.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만원 한 장은 남겨두고’라며 삥을 뜯는 깡패처럼 아슬아슬하게 버틸 수 있는 생명력만은 남겨두었다.
이것이 저주라면…… 저주라면 뭐 손 쓸 방법이 없겠지. 하지만 이 세계에서 마법은 모두 마력을 이용한 행위다. 적어도 내가 진찰한 나무들에겐 나무 고유의 마력 외엔 다른 마력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두 가지 중 하나, 아니 둘 모두가 해당한다 할지라도 내 기운을 불어 넣었으면 해당사항이 없어야 한다. 저주든, 병이든 세계수의 기운이면 치료되지 않을까?
대체 무엇이 나무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인단 말인가?
그 순간, 나는 흠뻑 젖은 지렁이가 바닥을 기어간 것만 같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라붙은 대지에 남겨진 그 흔적은 나무의 밑동부터 시작하고 있었는데 모든 나무들이 어느 한 방향을 향해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이건 뭐지.”
자세를 낮추고 손으로 그 흔적을 더듬어 보았다. 흙은 푸석푸석했기에 물기라곤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 흔적에서 느껴지는 것이라곤…….
“내 마력이잖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상한 흔적은 나의, 세계수의 기운이 땅을 지나가며 남긴 흔적이었다.
그 증거로 다른 엘프들에게 땅에 남겨진 흔적을 보라며 말해봤지만 모두들 흔적을 보지 못했다.
오롯이 나만이 볼 수 있는 흔적이었다.
“핀. 내가 말해주는 방향으로 가줘.”
“네. 알았어요.”
흔적은 아주 길었고, 어제 되살린 모든 나무들에게서 시작되었기에 미로를 찾는 것만큼 힘들었다. 다행히도 흔적들은 어느 순간부터 한데 뭉쳐 커다란 한줄기가 되었기에 그때부턴 순조롭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엔 이 흔적의 끝에 모든 원흉이 있을 것 같아.”
필시 그러할 것이다. 이것 외엔 아무런 단서도 없으니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오필리아. 너무 앞서가지 말거라.”
숲에 가뭄을 불러온 원흉을 찾으러 가는 와중에 파테르가 오필리아에게 주의를 주었다. 오필리아는 나보다 한 발짝 앞서서 걷고 있었기에 중간 중간 계속 다른 길로 빠져서 허둥거렸다.
의욕이 앞선 건 알겠는데…… 확실히 파테르의 말대로 성과에 목말라 너무 급한 게 흠이구나.
그렇게 계속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흔적이 사라지는 경계를 만날 수 있었다.
누가 칼로 베어낸 듯이 흔적이 정확하게 일직선으로 끊어져 있던 것이었다.
“잠깐 멈춰줘. 도착한 것 같아.”
“절벽이네요.”
우리가 멈춘 곳은 깎아오를 정도로 높은 절벽이었다. 현대의 등산 전문가라도 유서를 써놓지 않고서야 쉽사리 도전할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 같은 험한 지형이었다.
흔적은 바로 그 절벽 아래에서 멈춰 있었다.
파테르가 절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흠. 절벽이라니. 이런 곳에 절벽이 있었던가? 세계수님. 저희가 먼저 올라가보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 줘.”
파테르의 말에 나는 이 절벽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곳에서 몇 백 년을 살아온 엘프도 있는 줄 알지 못했던 절벽. 심지어 다른 엘프들의 반응도 심상치 않았다.
“절벽…… 어. 절벽이네. 뭔가 흐릿한데…….”
“너 지금 어딜 가는 거야. 그쪽이 아니잖아.”
“응? 이상하네. 앞으로 가려고 했는데…… 언제 저쪽으로 가고 있었지?”
절벽으로 접근하려던 다른 엘프들은 방향을 잃은 새처럼 자꾸만 옆길로 새어나가려 했다. 그 모습에 파테르나 핀, 곰에게도 절벽으로 접근을 요청해봤는데 역시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상해요. 앞으로 가려고 했는데 자꾸 저도 모르게 옆으로 가네요.”
“역시. 수수께끼는 풀렸어!”
그동안 엘프들이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 다른 아이들은 볼 수 없었지만 내 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절벽을 둘러싸고 있는 기묘한 마력의 뒤틀림이 다른 사람들을 접근할 수 없게 공간을 왜곡하고 있었다.
비틀린 공간 너머로 손을 뻗자,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방향을 잃었다. 하지만 아무리 복잡한 미로라 할지라도 털실을 길게 늘어뜨린 이정표가 있다면 쉽게 헤쳐 나갈 수 있다.
미궁 속에 빠진 전설 속의 용사처럼 일그러진 마력을 헤치며 바른 길로 나아가자, 절벽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절벽이 아니야?”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절벽 역시 마력으로 만들어진 벽이었다.
손을 뻗자 영국 어느 지하철역에 있는 1/2 승강장처럼 내 몸이 쑥 빨려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일그러져 있던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정상으로 돌아갔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비로소 절벽 너머에 감춰져 있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동산이 메마른 대지로 만들어진 삭막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동산 한가운데 다른 나무들처럼 말라 죽어가고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절벽 앞에서 끊어졌던 흔적은 비틀린 마력으로 만들어진 환영이 사라지자 언덕을 따라 나무에까지 이어져 있었다.
“신기하군요. 이런 곳이 있었다니.”
마력의 일그러짐이 사라지자 다른 엘프들도 내 뒤를 따라 동산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나는 가장 먼저 앞서서 동산 위에 있는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식물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어쩐지 이 나무, 어디서 많이 본 것처럼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아쉽게도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르고 비틀린 상태였기에 무슨 나무였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거의 강제로 누군가 가지들을 붙잡고 괴롭히기라도 한 듯 멀쩡한 가지가 없었다. 다른 나무들이 그냥 마른 상태였다면, 이 나무는 임종을 훌쩍 넘긴 살아있는 시체처럼 보였다.
“여기 있었구나.”
가만히 손을 대고 느껴보니 내가 다른 나무들에게 불어넣어 주었던 기운이 모두 이 나무에 들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내 기운을 받았으면 활력을 되찾아야 정상이건만 나무는 활력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불꽃이 없어?’
그 이유는 이 나무가 이미 죽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나무들은 한줄기 희망처럼 생명의 불꽃이 일렁거리고 있었는데 이 나무에게선 그런 불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죽은 나무일까. 그런데 어째서 죽은 나무가 산에 있는 다른 나무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일 수 있었던 걸까.
“세계수님!”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위에서 느껴지는 위화감과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어!?”
나무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비틀려 있던 가지가 마녀의 손처럼 나를 향해 뻗어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나를 휘감아 잡아먹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지만 어째서일까. 두렵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
그 순간, 화살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화살촉이 있는 부분에 불덩어리가 달려 있었기에 마치 유성처럼 보였다.
날아온 화살은 나무에 꽂혔고, 말라 있던 나무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후우.”
“오필리아.”
뒤를 돌아보니 활시위를 놓고 긴장이 풀렸는지 숨을 내뱉고 있는 오필리아가 보였다. 유일하게 오필리아만이 지금 상황에 반응하여 나를 구해준 것이다.
분명 고마워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괜찮으세요?”
오필리아가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한 건 해냈다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마침내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을 이룬 것이다.
“……응. 고마워. 오필리아.”
나를 구해준 것은 고맙지만, 이상하게 꺼림칙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다.
뭐지? 이 기분은? 뭔가 놓친 것 같은…… 한 가지 빼먹은 것 같은 이 기분은?
“잠깐. 뭔가 이상한데?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는 분명…….”
바닥에 남은 흔적을 따라 온 거였잖아?
그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동산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갈라지는 대지 사이로 흉측한 뿌리가 연체동물의 다리처럼 올라와 나와 오필리아를 덮쳤다.
“초, 촉수!?”
파도처럼 우리를 덮치려는 나무뿌리들을 보며 외쳤다. 그 순간, 나는 겨드랑이를 파고 드는 작고 부드러운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세계수님! 피하세요!”
오필리아가 나를 잡아 던진 것이다. 엘프들에게 던져진 나의 신형을 핀이 받아들었다.
그리고 홀로 남은 오필리아가 나무뿌리들에게 덮쳐지려는 순간…….
“오필리아!”
파테르가 나무뿌리들 사이를 헤치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오필리아가 내게 했던 것처럼 그녀를 붙잡고 언덕 아래로 던져 버렸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는 오필리아. 언덕 위에 혼자 남은 파테르의 모습이 나무뿌리에 휘감겨 사라졌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