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65화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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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대화

수수하게 꾸며진 방. 물건이라곤 침대와 활, 화살을 정비할 때 쓰는 이름 모를 도구들이 정리되어 있는 책상과 함께 작은 의자 세 개가 전부.

여자아이의 방이라곤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심플한 방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하하…….”

엘프소녀, 오필리아가 감사하다고 했지만 반쯤은 내 책임도 있었기에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런데 어디를 가고 있었던 거야?”

내가 알기론 방에서 못나오는 근신처분을 받은 걸로 아는데. 잘못 들으려야 잘못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싸우는 소리까지 들었고.

“그게…… 저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리는 오필리아. 그녀가 무슨 마음으로 탈출하려고 했는지 내게 와 닿았다.

아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나 역시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을 때의 무력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아직 어리잖니. 조금은 천천히 가도 충분하지 않을까? 나중에 어른이 된다면, 그땐 네가 옆에서 거든다 할지라도 아무도 말리지 않을 것 같은데?”

“전 충분히 컸어요! 벌써 99살이란 말이에요!”

“어…….”

99살이면 엄청 많은 거 아닌가? 아니, 엘프니까 오래 살겠지? 그럼 엘프에게 99살은 인간으로 따지자면 어느 정도 나이인거지?

나는 레벤토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눈치가 빠른 레벤토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부족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00살은 돼야 성인으로 취급해 줍니다.’

‘으음.’

그럼 99살은 인간으로 치면 18세라는 거네. 좀 더 세부적으로 가자면 성인이 되기 일부 직전인, 고등학교 3학년 수능시험이 끝나고 겨울 방학에 들어간 12월 말의 학생 정도일까?

“혹시 몇 월에 태어났니?”

“예?”

“아, 아무것도 아니야.”

이 세상에 빠른 년생이 있을 리가 없잖아. 빠른 년생으로 치면 100살이라고 해도 되니까 성인으로 취급받아도 될 텐데.

하긴, 빠른 년생은 한국에만 있던 문화였지 참.

“어쨌든 너도 이제 다 큰 성인취급을 받고 싶다는 거네?”

“예. 맞아요.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절 애 취급 하신다니까요.”

일단 오필리아의 외모는 아직 성인이라고 말하기 부족했다. 살짝 어린 티가 나는 게 고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랑 비슷한 또래의 다른 집 아이들은 다들 정찰도 나가고, 숲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데다 사냥도 나가요. 심지어 인간들이 사는 도시로 가는 애들도 있죠. 근데 왜 저한테만 이렇게 뭐라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과보호’였다.

파테르라는 엘프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는 없었지만, 적어도 첫인상에서만큼은 결코 자기 딸을 구박하거나 미워할 만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이곳에 온 뒤로 파테르와 오필리아, 두 사람이 보여준 모습은 영락없이 티격태격하는 딸과 아버지의 모습이었지만, 부모가 자식을 구박하는 데는 꼭 밉거나 싫어서 그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일단 우리는 이곳에 온지 하루도 안 됐고, 다른 집안사정은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섣불리 말할 수 없으니 다른 의견을 좀 더 들어봐야겠다.

다른 의견.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의견은 어떨까?

“어머니는 뭐라 안 하시니?”

“……돌아가셨어요.”

아아!

신이시여!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이제 겨우 이야기하면서 어색함이 풀려가고 있는 상황인데! 왜 이렇게 다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신단 말입니까!

“어…… 미안해. 내가 말을 잘못했네.”

“아니에요. 모르고 계셨잖아요. 게다가 저를 낳다 돌아가셔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없는걸요.”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 분위기가 점차 심해로 가라앉고 있다. 이러다가 수압에 짓눌려 압사할 것만 같았다.

‘레벤토! 도와줘!’

라고 눈짓을 보내봤지만 그는 이미 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세계수님도 이곳에 모셔드렸으니, 저도 다시 숲에 가서 일을 해야겠군요. 위그드라실 님. 부디 편히 쉬시길.”

이 기회주의자 같으니라고! 혼자만 도망치다니! 방 안에 우리 둘만 남기고 도망가지 말란 말이야!

아아. 여자아이와의 상담은 비슷한 또래인 핀이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 핀이 몇 살이더라? 에라이. 그래도 비슷한 또래로 보이니까 괜찮을 거야.

그런데 핀은 어디 있지?

아. 그렇지. 파테르랑 같이 남아서 엘프들을 돕고 있었지. 내 정신 좀 봐.

그럼 성별은 다르지만 곰은 어떨까? 그런데 곰은 어디 있지?

아. 그래. 나 따라서 마을로 오려는 거 핀이 잡아서 같이 일하고 있었지.

결국엔 나밖에 없는 건가!

“어쩌면 아버지는 절 미워하시는 걸지도 몰라요. 마을 사람들한테 들었어요. 두 분 사이는 천생연분처럼 좋았다고. 근데 그 사이를 제가 갈라놓은 거잖아요.”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 파테르가 널 사랑하니까 그런 거야. 혹시라도 다칠 수도 있잖아. 나도 내 딸이 다칠지도 모르는 일에는 절대로 보내지 않을 거야.”

말을 하자마자 양심이 찔린다. 이미 보통 엘프라면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겪었을 일에 핀이 뛰어들었었는데.

“그럼 왜 다른 아이들은 해도 말리지 않는데 저만 말리는 건가요? 다른 아이들은 다쳐도 된다는 뜻일까요?”

또 한 차례 고비가 다가왔다. 여기서 그렇다고 한다면, 파테르는 내 아이만 소중히 하고 다른 아이들은 죽어도 상관 안 하는 그런 몹쓸 사람이 돼 버린다.

반대로 아니라고 한다면 오필리아의 말에 동의하는 꼴이 돼 버린다.

그렇다면 나의 선택은 중도를 택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기보단, 내 딸이니까 더 소중히 하려는 게 아닐까? 원래 소중한 것일수록 꽁꽁 숨겨두고 싶은 법이잖아?”

“…….”

선택지 실패인가. 기껏 이야기가 진행되나 했더니 다시 우울한 모습으로 돌아와 버렸다.

오필리아가 원하는 건 자신도 이 마을에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니면 파테르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일까.

지금의 우울함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만족시켜 주는 것뿐일 것이다.

“내가 보기엔 파테르가 널 미워하는 게 아니야. 방금 내가 말했듯이 소중해서 지켜주려는 거지.”

“그럼 전 대체 언제 다른 아이들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요?”

“으음. 더 이상 네가 어린아이가 아니라, 충분히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걸 보여주려고 해도 전부 금지해 버리는걸요.”

“그래. 이건 어때? 한 걸음씩 나가는 거야. 내일 숲에 나가 나를 도와줘. 내가 파테르에게 잘 말해볼게. 그런 작은 일부터 네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면 조금씩 너에 대한 신뢰가 쌓여서 조만간 큰일도 맡겨주지 않을까?”

“정말요!?”

일을 하러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이렇게 기뻐할 줄이야. 말을 꺼내보길 잘한 것 같다.

그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파테르에게 허락을 맡는 것뿐이겠군.

자. 어서 오려무나. 파테르. 너에게 상담가로서의 내 능력을 보여주지.

***

“절대 안 됩니다.”

단번에 거절당했습니다.

그래도 오필리아가 없는 곳에서 물어보길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만약 지금 대화를 들었다간 또 큰 싸움이 벌어졌을지도.

파테르가 돌아온 것은 내가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쯤이었다.

밤새도록 나무들에게 비료를 주며 일을 끝마친 그는 그다지 피곤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세계수님.”

친근한 인사. 좋은 표정. 협상의 조건은 상대의 기분이 좋을 때 빠르게 끝내는 것이 기본.

지금이 기회다!

……라고 생각했는데.

“왜 안 되는데.”

“절대로 안 됩니다.”

그는 철벽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지 그는 절대로 허락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제 오필리아도 99살이라며. 그럼 괜찮은 거 아니야? 마을에 다른 아이들도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다면서.”

“이제 겨우 99살인 거지요. 하지만 제 딸은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젠데?”

“하아…….”

파테르가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땅이 꺼질 만큼 무거운 한숨이었다.

“오필리아는…… 너무 의욕만 앞선 게 문제입니다. 무언가 일이 생기면 그걸 해결하고 싶은 나머지 주변을 둘러보지 않죠.”

“하지만 지금 데려가려는 일은 그냥 나무들을 되살리는 것뿐이잖아. 이런 작은 일 정도는 시켜줘도 되지 않을까?”

“아뇨. 오히려 그 의욕에 불씨만 살릴 뿐이죠. 작은 일은 방심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일은 끝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불씨가 되어 나중에 더 큰일을 하게 될 때가 온다면, 오히려 독이 되어 큰일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말을 하는 파테르의 표정은 오필리아를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설마 오필리아가 다칠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거야?”

“예? 어. 흠흠…….”

어제의 데자뷰가 떠오른다. 창문 밖으로 빠져나가려다가 내게 걸리곤 귀까지 빨개졌던 오필리아.

그 모습과 지금 파테르의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았다.

부전여전인가. 똑같아도 너무 똑같잖아.

“그렇구먼. 역시 딸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그렇다고 너무 감싸는 거 아니야?”

“아뇨. 흠흠. 이걸로도 부족합니다. 언젠간 오필리아도 세상에 나가는 날이 오겠죠. 그 날이 오기 전까지 앞만 보고 달리는 그런 성격을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세상은 위험하니까요. 특히나…….”

그의 얼굴에서 붉은 기운이 사라지며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인간만큼 위험한 종족은 없지 않습니까?”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반박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인간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전직 인간출신으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나쁜 건 아니지만, 모두 착한 것도 아니다. 정확하게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종족. 그것이 바로 인간이었다.

“하지만…… 세계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이번 일 만큼은 특별히 데리고 가드리겠습니다.”

“진짜로?”

“예. 세계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어찌 제가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이거. 말하는 게 꼭 권력에 짓눌려 어쩔 수 없이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말투다.

“이번 일을 통해 조금은 자존심을 살려주는 것도 좋겠군요. 이것도 세계수님의 힘일까요? 세계수님 곁에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풀어지는군요.”

역시 너에게도 나는 마약 같은 존재로구나.

어쩌면 엘퀴라즈 숲에 있는 엘프들이 광란의 엘프가 된 것도 나 때문일지도 모르겠네.

“그 아이가 비록 제대로 일도 해본 적 없어서 무능할지라도, 막무가내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려고 난장판을 벌여도, 아직 성인도 아니면서 성인인 척하려는 행동도 모두 세계수님이랑 함께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책임지고 돌봐줄게.”

어차피 바로 앞에 있는 숲으로 가는 일인데 무슨 일이 벌어지기나 하겠어?

“그럼 바로 가서 말해줘야겠네.”

허락도 맡았으니 오필리아에게 이 사실을 전해줘야겠다. 아마 기뻐서 방방 뛰지 않을까?

“……으으.”

“오필리아?”

하지만 그녀의 방으로 가려는 순간, 나는 문 뒤에 숨어서 우리를 보고 있는 오필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것 같은, 야수와 같은 표정이었다.

“설마…… 다 들었니?”

“……네.”

“어디서부터……?”

“그 아이가 비록 제대로 일도 해본 적 없어서 무능…….”

하하.

왜 꼭 이렇게 오해가 생기는 걸까. 앞에서부터 들었다면 파테르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해졌을 텐데.

“오필리아! 근신이라고 했을 텐데!”

“집 앞까지는 괜찮잖아요!”

“안 돼! 네 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면 안 된다! 그게 벌이야!”

두 사람 사이에 또 다시 싸움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불똥이 튀고 있는 그 순간, 마을에 살고 있는 한 엘프가 달려왔다.

“조, 족장님! 세계수님!”

그리고 그의 다급한 외침이 부녀간의 싸움을 단숨에 끝내 버렸다.

“나무들이 다시 죽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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