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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남의 집 싸움만큼 어색한 것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일이 무엇일까?
길을 걷다 친구의 뒷모습을 보고 달려가 끌어안았는데 알고 보니 모르는 사람일 때?
친구와 대화하던 도중 나도 모르게 그 친구가 겪은 슬픈 이야기를 꺼내버렸을 때?
인터넷 상에서 채팅으로 대화하던 상대를 만났는데, 막상 만나니까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전부 아니다. 가장 어색한 순간은 바로…….
“편히 계셔도 좋습니다. 저희 집을 세계수님의 집처럼 생각하고 사용하시지요.”
남의 집에 갔는데 그 집 식구들이 싸우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다.
파테르의 집은 아늑하고 좋아 보였다. 평범한 나무판자와 돌을 쌓아 만든 집은 아니었다.
마법을 이용한 것인지 큰 나무에 옹이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안에 여러 방이 만들어져 있는 형태였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신비로운 분위기였지만, 아쉽게도 숲이 죽어가는 현상에 휩쓸린 나머지 집도, 집안의 공기도 메말라 있었다.
“오필리아. 방안에서 얌전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
“잠깐…… 인사드리려고 나왔어요.”
“근신처분이 우습게 들리더냐? 당장 네 방으로 들어가!”
나무가 말라서 공기도 말라붙은 것만은 아니니라.
편하게 지내라면서! 지금 광경을 목격해 버렸는데 어떻게 편하게 지내!
두 엘프가 말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뻘쭘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곰과 레벤토에게 시선을 보냈다.
“곰.”
「배고프다.」
그래. 그게 너 다운거지.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곰 녀석은 그냥 평소와 똑같고. 아. 레벤토는 어떻지? 나무 안에서 사는 이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할까? 정상적인 엘프로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이 녀석이 그 자연사랑 광신도 엘프들의 수장이잖아.
“크윽…….”
아니나 다를까 레벤토는 주먹을 불끈 쥐며 열심히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 분노가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나무 안을 파내 집으로 쓰고 있어서 그런건진 알 수 없었다.
“레벤토. 괜찮아?”
“예? 저는 괜찮습니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이미 다 봤다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레벤토와 이야기나 나눠야겠다.
“레벤토. 그런데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한참이나 기다렸는데 나랑 곰 말곤 아무도 안 나오던데.”
“죄송합니다. 숲의 이변으로 인해 이동 방식에 착오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대로라면 위그드라실 님이 나오셨던 나무로 저희도 함께 나왔어야 했는데, 반대편에서 저희를 받아줘야 할 나무들이 모두 말라죽는 바람에 그 통로가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와야 할 구멍이 모두 무작위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응?”
“말하자면, 위그드라실 님이 나온 구멍은 원래 저희가 나왔어야 할 통로가 아니었단 말이었습니다. 통로는 하나가 아니니까요. 다른 엘프족들이 설치해 둔 통로도 존재하지요. 그것이 엉켜서 서로 다른 통로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들어간 입구는 같지만 나온 출구는 서로 달랐던 거란 말인가.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그럼 곰이랑 내가 같은 출구로 나오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란 말인가. 잘못했다간 나 혼자만 따로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다는 거네.
소름끼치는 상상을 하며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사이, 파테르와 오필리아의 대화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알았어요! 방 안에 있으면 되잖아요! 계속! 아무것도 못하는 잉여처럼! 그걸로 만족하시죠?”
“어디서 감히 두 눈 똑바로 뜨고 버릇없게 대드느냐!”
쾅!
세게 문을 닫는 소리가 집안 전체를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순간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합니다. 세계수님. 딸아이가 워낙 버릇이 없어서…….”
“하하. 아냐. 괜찮아. 원래 저 나이 땐 다들 그렇잖아?”
“언제쯤 철이 들는지…….”
내가 볼 땐 아이한테 너무 빡빡하게 구는 것 같은데. 집안마다 다들 양육 방식에는 차이가 있는 법이니 어떻게 참견할 수도 없고.
그냥 이대로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다. 아무 문제없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일 없이.
“그런데 숲이 왜 이렇게 된 거야? 대체 언제부터?”
“후우……. 저희 숲에 관심을 가져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터져 나오려는 근심 섞인 한숨을 내 앞이라고 억지로 참는 것 같았다.
“사실 이런 경우가 하루 이틀은 아닙니다. 과거에도 몇 번씩이나 숲을 죽이는, 나무와 풀을 죽이는 역병은 발병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저희는 필사적으로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 덕분에 그 어떤 역병이 닥쳐와도 막아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나무가 죽는 병이라. 지구에서도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무슨 병인지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지금 이곳의 나무들처럼 하얗게 말라가며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병이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그 기억이 도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나의 기억은 이번 사건에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역병은…… 역병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알아본 결과, 나무들은 병이 아니라 생명력 자체가 빠져나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병이 아니라 그냥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어디 나무전용 뱀파이어라도 출몰한 것일까? 아니면 나무들이 집단 자살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섬에 살고 있던 쥐떼들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집단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수만, 수십만 마리의 쥐들이 스스로 강으로 돌진했다고 했었나? 과학자들이 열심히 조사해봤지만 결국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지 아마?
“저희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봤습니다. 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다시 나무들을 건강하게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영양분을 공급해줘도, 그것을 흡수는 하지만 건강해지지는 않더군요.”
“흡수는 하지만 건강해지지 않는다라.”
그럼 빨아들인 영양분은 전부 어디로 간 거지?
이렇게 집안에서 이야기만 들을 게 아니라 직접 관찰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이곳으로 오면서 보긴 했지만, 아이들과 따로 떨어졌다는 생각에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다.
“우리들을 숲으로 안내해 주지 않겠어?”
“예. 물론입니다.”
파테르가 우리를 안내해 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를 포착한 그의 표정은 곧 분노로 물들었다.
“오필리아!”
“그, 그냥 열어본 거예요!”
또다시 시작된 아버지와 딸의 말싸움.
손님으로서 너무 견디기 힘든 순간이라 빨리 이 집에서 벗어나고픈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제발. 싸우지 좀 마!’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나는 쭈구리인걸. 이런 일에 나설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냥 조용히 있어야지.
***
부녀간의 말싸움의 결과는 결코, 절대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내며 끝이 났다.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아빠는……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라며 엘프 소녀가 문을 잠그는 것으로 끝이 났다.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직 파테르와 친한 것도 아니고 중요한 사안은 따로 있었기에 숲을 살펴보는 데만 집중하기로 했다.
마을 자체가 숲에 있었기에 나무들을 살펴보러 가는 길은 매우 짧았다. 나는 하얗게 메마른 나무에 손을 대고 마력을 느껴보았다.
마력이란 곧 생명력과도 같은 것이니까.
“으음…….”
거의 죽은 미라와 같은 나무들이었지만, 아직 마력의 불씨는 살아있었다. 하지만 그 불씨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만 같았고, 조그만 충격에도 나무들은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했다.
“영양분을 줬다고 했지? 이 나무도 줬었어?”
“예. 그렇습니다. 모든 나무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해 봤습니다.”
그럼 평범한 방법으론 안 되겠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영양분을 준 상태가 이 정도라면 보통의 방법으론 되살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손을 댄 나무에 내 기운을 불어넣어보았다. 세계수의 마력은 치유에 특화된 마력이니까 나무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오오……!”
엘프들의 탄성이 들려왔다. 나의 기운이 스며들수록 꺼져가던 나무의 마력이 점점 활기를 되찾아가는 것을 느꼈다.
“나무가…… 되살아난다!”
줄 수 있는 기운은 다 주었다. 건강한 나무였다면 모를까, 죽어가는 나무라서 그런지 이 이상으로 기운을 불어넣었다간 오히려 해가 될 것 같았다.
모름지기 약이라 할지라도 너무 과하면 좋지 않으니까. 게다가 다른 나무들에게도 불어 넣어줘야 하니 한 나무에 너무 집중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휴. 성공이네.”
방금 전까지 말라죽어가던 나무가, 이제는 건강한 활기를 되찾았다. 방 안에만 갇혀 하얀색 피부에 빼빼 마른 폐인을 건강하게 탄 구릿빛 피부의 건장한 청년으로 변화시킨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아아. 세계수님…….”
“으흠. 뭐 이 정도로.”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아아. 나무로 태어난 지 어언…… 날짜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꽤 긴 시간을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칭찬 받을 일을 해본 기억이 없거늘, 드디어 내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현실에 어깨가 절로 으쓱거렸다.
“이제 다른 나무들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연하지. 다른 나무들도 나한테 맡…… 겨…….”
순간 하늘로 승천하던 나의 기분이 악마에게 낚인 천사처럼 땅으로 추락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죽어가고 있는 나무는 한 두 그루가 아니었다.
장판파에서 적군과 대치한 장비의 기분이 이러할까. 도저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나무들이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거부하겠는가. 다들 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마지막 글자를 말해 버렸다.
“……줘.”
* * *
“허억. 허억.”
“괜찮으십니까?”
“으, 응. 나는 괜찮아.”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 레벤토의 등에 업혀 다시 엘프 마을로 돌아가는 나는 거친 숨을 그의 등에 몰아쉬고 있었다.
대체 몇 그루의 나무를 되살린 걸까. 대략 천 그루까지는 세 봤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조금 쉬고 내일 다시 시작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래. 내일 다시 시작해야지. 추가수당 없는 야근은 불법이라고.
“그러게. 마력은 충분한데…….”
나무들을 되살리는 데는 아주 약간의 마력만이 필요했다. 지금 마력석에 충전된 내 기운만으로도 숲을 몇 번이고 되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일을 안 해서 그런 것일까. 갑작스러운 사회활동에 내 몸은 점차 지쳐갔고 이제는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릴 듯이 죽 늘어져 있었다.
“우선 파테르의 집에서 한숨 주무시지요.”
“주인도 없는데 괜찮을까?”
파테르는 내가 되살린 나무들을 좀 더 보살피고 돌아오겠다며 숲에 남았다. 비료로 보이는 포대를 열심히 엘프들이 나르는 것을 보아선, 혹시나 또 말라 버릴까봐 열심히 관리할 예정인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내 집처럼 편하게 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럼 좀 쉬어야겠어. 이러다가 죽겠네.”
그렇게 레벤토의 등에 업혀 마을로 돌아간 나는, 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그의 등에서 내려왔다.
“위그드라실 님?”
“잠깐만. 이 집도 나무잖아.”
일단 다른 집은 몰라도 내가 잘 집인데 이렇게 메마른 상태로 두는 건 실례인 것 같아서, 지친 몸이지만 다시 건강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손을 대고 기운을 불어넣었다.
역시 이 집도 나무라 그런지 내 기운을 흡수하자마자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말라붙은 가지와 이파리에 활력이 돌아왔다. 굵은 동맥처럼 자라난 나무의 힘줄이 다시 생기를 찾아가며 힘차게 부풀어 올랐다.
“자. 이제 들어가서…….”
“끄아악!”
갑자기 들려온 비명 소리에 나와 레벤토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비명 소리는 집 뒤편에서 들려왔기에, 우리는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으윽…… 모, 몸이…….”
그리고 우리는 엘프 소녀가 집 뒤편에 난 창문에 끼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생기를 되찾아준 나무가 부풀어 오르는 통에 소녀의 허리가 창틈에 끼어 상체만 빠져나온 상태였다.
정확히는 허리가 아니라 그 아랫부분이지만. 민망해서 말하기가 좀 그렇군.
“저기…….”
“아앗. 세, 세계수님!”
나를 발견하자마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는 엘프 소녀. 오필리아. 벌써 기다란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부끄럽고 민망할 것이다. 보고 있는 나도 그러니까.
“도와줄까?”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