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62화 (16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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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아들놈은 정말 키우는 보람이 없다

“헉. 헉.”

“잡아라!”

추격자들을 피해 산속을 헤매는 곰과 나. 곰의 등에 힘껏 매달려 있었지만, 울퉁불퉁한 지형으로 인해 곰의 몸이 계속 흔들려 매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메마른 땅을 박차는 곰의 발걸음 때문에 먼지가 일어나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곰! 곰!”

「조금만 참아라! 거의 다 왔다!」

“다 오다니. 어디를!”

“곰!”

「저기까지만 가면 따돌릴 수 있다!」

저기라니. 앞에 대체 뭐가 있기에 이렇게 확신에 찬 말투로 말하는가?

고개를 흔들어 먼지를 떨쳐내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앞을 내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진짜로. 파란 하늘 위에 떠 있는 뭉게구름이 전부였다.

아니, 잠깐. 왜 아무것도 없어? 마르긴 했지만 나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곰!”

「간다!」

우주에라도 간 것처럼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 눈앞엔 황토색 대지를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는 작은 강이 보였다.

“고오오옴!”

「하늘을 난다!」

“야, 이 멍청아!”

떨어진다. 네가 말하던 곳이 절벽이었냐!

하지만 나는 곰을 책망하지 못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와중에 내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은…….

“그거 표절이잖아!”

누가 아저씨 취향 아니랄까 봐 신세대는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드립을 치고 있어!

그 뒤를 이어 떠오른 생각은 오늘 이 곳에 도착한 직후의 일들이었다.

* * *

“으아악!”

일행과 함께 옹이구멍으로 들어온 나는 극심한 현기증에 비명을 질렀다.

텔레포트라는 거, 원래 이렇게 어지러운 걸까? 레벤토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시야에 보이는 거라곤 어둠뿐이었고, 다른 이들의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으엑!”

그리고 괴물의 입에서 뱉어지듯이, 차가운 대지에 떨어진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다.

“여기가…… 엘프의 숲?”

이걸 숲이라고 해야 할까. 지옥에도 숲이 있다면 여기가 그곳이 아닐까?

물기라곤 하나도 없는, 말라 죽은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내밀며 뜨거운 태양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땅은 몇 년간 가뭄에 시달린 것처럼 피부가 갈라지듯 여기저기 균열을 비추었다.

“아니, 잠깐. 다른 애들은?”

“고오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으로 커다란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바로 곰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나온 옹이구멍이 있었다. 우리 숲에 자라난 나무와는 달리, 이곳에 있는 나무는 다른 나무들처럼 바짝 마른 상태였다.

“곰…….”

「세상이 돈다…….」

“곰. 다른 아이들은?”

“곰?”

「무슨 소리냐?」

그래.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했지. 이제 막 빠져나와 정신 차리고 있는 곰이 뭘 알겠는가?

“일단 기다려 볼까.”

내가 빠져나오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 곰이 빠져나왔으니까 이동하는데 시간차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선 나는 곰과 함께 레벤토와 핀이 나오길 기다려보았다.

“곰. 곰…….”

「정말 끔찍한 순간이동이었다.」

“하긴. 나도 세상이 핑핑 돌아서 오금이 저렸다니까.”

“곰. 곰.”

「나는 그 이상이다. 육금이 저렸다.」

“…….”

“곰곰곰, 곰?”

「세상이 핑핑 돌았다고 했나? 그때 글을 쓰면 무슨 글이 나오는지 아나?」

“……뭔데.”

“곰.”

「뱅글뱅글.」

정말, 진짜로 이런 개그는 더 듣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말라붙은 숲에 대화를 나눌 상대는 곰밖에 없는 걸.

“곰. 너무 무리해서 개그하려 하지 마. 만약 이게 예능이나 만화였다면 지금 너랑 나 단둘만 화면에 비추고 있을걸?”

“곰. 곰. 곰곰.”

「무슨 소리냐. 억지로 하는 개그가 아니다. 개그맨은 일상에서도 본능적으로 개그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개그맨과 다르군. 적어도 내가 알기론 개그맨들이 화면에선 관객들을 웃기려고 노력하지만, 일상에선 여러 가지 문제로 우울하거나 보통 사람처럼 평범한 경우가 더 많다고 들었는데.

“그럼 적어도 신선한 아이디어라도 떠올려봐. 맨날 아저씨들이나 웃고 지나갈 개그만 하지 말고. 너만 웃긴 개그만 하고 있잖아.”

“곰……. 곰. 곰. 곰…….”

「아이디어……. 많이 떠올려 놨었다. 신선한 걸로. 그런데…….」

“그런데?”

“곰곰, 곰.”

「너무 묵혀뒀더니 아이디어가 어른디어가 돼서 아재개그가 돼 버렸다.」

너 그거 지금 즉석에서 떠올린 거지? 거의 짜 맞추기 수준인데?

그렇게 곰의 시답지 않은 개그를 들으며 조용히 다른 일행들이 오기를 기다리던 그때, 멀리서 들리는 부스럭 소리에 나는 그곳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저기…… 누가 오는데?”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초록빛의 옷들. 금발과 녹안(綠眼) 선명하게 햇살을 반사시키며 그 존재감을 비추고 있었다.

“엘프?”

그들의 모습은 익숙했다. 전부 원래 숲에서 보던 엘프들의 모습과 똑같았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를 보며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 레벤토가 필요하겠는데.”

왜 저렇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우리의 모습은 야생곰 한 마리가 어린아이를 덮치는 모습이지 않은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해 주려는 그 순간, 우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쏘아지는 화살의 비를 볼 수 있었다.

그 중 하나의 화살이 내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총알처럼.

그리고 뒤늦게 들려온 한 엘프의 목소리.

“쏴라!”

“이미 쏘고 있잖아!”

곰만 노린 공격이 아니다. 아니, 곰은 전혀 노리지 않는다.

내 주변에만 화살비가 촘촘히 박혀 땅에 나무처럼 자라나 있었다. 반면에 곰은 멀뚱히 나를 보며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건 확실히 나를 노린 공격이다. 근데 왜!?

“곰!”

「위험하다!」

나를 향해 달려드는 화살 비를 쳐내며 곰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막을 수 있는 것은 화살뿐. 이제 곧 엘프들이 우리가 있는 곳에 도착할 것이다.

“곰!”

「어서 타라!」

그 말을 듣고 나는 재빨리 곰의 등에 업혔다. 화살과 엘프들을 피해 도망치는 곰.

아아. 그동안 내가 곰을 오해했었구나. 위험한 순간엔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 * *

“……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뭐야!!!”

정말 절벽이 높기도 하다. 과거를 회상했는데 우리는 아직도 떨어지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져 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곰이 말했다.

“고오옴! 곰!”

「이것은 궁극의 탈출기! 살아남기만 하면 탈출 성공이다!」

“야, 이 미친……!”

자유낙하를 온몸으로 느끼며 미래가 보였다. 이건 살 수 없어. 분명 100%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야. 탈출은 불가능하다.

물론 지금 상태로 죽으면 나무로 정신이 돌아가겠지만…… 아픈 건 싫다고!

곰이야 뭐, 이 높이에서 떨어져도 살아남겠지만.

이대로 고통을 경험할 순 없다. 전력을 다해 마력을 조종해 우리 두 사람의 몸을 띄우려 노력해보았다.

떨어지는 속도는 어느 정도 감소되었지만, 내 힘으로 완전히 멈추는 건 불가능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 이 상태를 유지하며 최대한 고통이 느껴지기 전에 기절하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억지로 합리화하며 이 책임을 아버지께 떠넘겨 보았다.

‘아아. 아버지. 어째서 부유마법은 쪽지에 적어두지 않으신 겁니까.’

그리고 점점 가까워져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 * *

따뜻하다. 몸이 미지근한 물속에 있는 것 같다.

옅은 부유감이 내 몸을 감싼다.

혹시 이곳은 천국일까.

……잠깐. 나 또 죽은 거야?

흐음. 또 죽었다니. 나란 놈은 정말이지 내구도가 약하구나.

아아. 이번엔 또 뭐로 태어나려나. 설마 또 나무로 태어나는 건 아니겠지?

이번엔 좀 더 나무보다 편한 걸로 태어나고 싶은데. 돌이라거나, 허수아비라거나…….

다른 아이들은 뭐하고 있을까. 필로우는 숲을 잘 지키고 있을까? 곰은 멀쩡히 살아 있을까? 핀은…….

핀…….

“아, 안 돼! 죽기 싫어!”

머리가 멍하다. 갑자기 일어나서 그런지 허리가 바짝 땡기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꿈이란 역시 재빨리 기록해두지 않으면 금방 잊는 모양이다.

“여기는…… 어디지?”

어둡고 좁은 동굴 안에 작은 모닥불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몸이 뜨뜻했던 건 전부 이것 때문이었을까.

“곰…….”

옆에서 곰이 곰 하고 울며 나를 끌어안았다. 모닥불 때문이 아니라 이 녀석 때문에 따뜻했던 거군.

아직 기절에서 깨어나지 못한 곰이었지만, 옆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낯선 장소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사라지고 있었다.

“흠. 누가 강에 빠진 우리를 여기로 옮긴 건가?”

옷이 살짝 축축했기에 그렇게 추측할 수 있었다. 곰이 불을 피울 리는 없을 테고, 내가 피운 것도 아니니 우리를 옮겨준 누군가가 피운 거겠지.

“천만다행이군.”

그렇게 착한 사마리안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동굴 입구 쪽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비춰졌다.

나는 곰 쪽으로 몸을 최대한 밀착하며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인물을 바라보았다.

“일어났니? 다행이구나. 정신이 들어서.”

그는 보기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어서 순간 나의 경계심은 눈 녹듯 사라졌다. 한 벌로 된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때가 잘 탈 것 같은 새하얀 로브였다.

“자. 우선 마시려무나. 정신을 차리는데 물이 최고지.”

그가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바가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깨끗한 물이 안에 담겨 있어서 거울처럼 내 얼굴이 비쳐졌다.

“어…… 감사합니다.”

물을 마시니 정신이 좀 들었다. 그가 모닥불 옆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조금 부끄러웠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저기, 대체 저희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미 알고 있었지만 딱히 말을 걸 화제가 없어서 그냥 물어보았다.

“그건 내가 묻고 싶구나. 다행히 내가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강에 가라앉을 거란다. 어디 높은 데서 떨어진 것 같던데, 설마 절벽에서 떨어진 거니? 그런 것치곤 멀쩡해 보이던데…….”

“아. 그게…… 하하…….”

아. 부상은 입었지만 내가 가진 세계수의 마력 덕분에 기절한 동안 회복된 건가? 다행이다.

멋쩍게 웃느라 나는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보통 그런 상황에선 사람만 구하고 곰은 구하지 않아야 정상 아닌가?

“그나저나 저 곰이 소중한가 보구나. 꼭 붙잡고 떨어질 생각을 안했으니. 혹시 애완동물?”

“뭐, 그런 셈이죠.”

인상 좋은 중년의 아저씨. 하지만 나는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는 엘프의 숲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숲에 들어오기에 부적절한 복장을 입은 중년의 아저씨가 대체 왜 이 숲에 있는 걸까?

생명의 은인을 의심하는 건 좋지 않지만 자꾸 의심이 들었다.

“저기, 그런데 누구신지 여쭤도 될까요?”

“이름이라. 이름이란 서로가 친해지기 위해 부르는 이명에 불과하지. 그런고로 딱히 알려줄 이유를 못 느끼겠구나.”

친해지기 싫다는 건가. 인상과 다르게 쌀쌀맞은 태도였다.

“나는 곧 떠날 거거든. 여기엔…… 그저 관찰을 하러 왔을 뿐이지.”

“관찰?”

“그래. 관찰…… 그저 지켜보고, 떠나는 게 내가 할 일이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상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와 곰을 한 번씩 살펴보더니,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무사하니 다행이구나. 다쳤다면 더 보살펴 줬을 텐데.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라는 신의 뜻이겠지.”

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혹시 신전에서 오신 분이신가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 방그레 미소 짓고 동굴에서 떠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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