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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한 토끼의 고민(외전)
“벌써 자랐네.”
위그드라실이 거대하게 자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잭과 콩나무처럼 하룻밤 새 자라난 건 아니지만, 고작 이틀 사이에 십 수 명의 사람이 둘러쌓아야 할 만큼 자라난 나무는 굉장했다.
그 나무에 뚫려 있는 거대한 옹이구멍. 성인남성도 가뿐하게 들어갈 수 있는 둥그스름한 구멍너머를 보며 위그드라실은 지금부터 건너갈 엘프의 숲을 보려했지만, 아쉽게도 직접 들어가기 전엔 알 수 없는지 검은 어둠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다녀올게.”
“다녀…… 크흑. 오십시오.”
“……울지 마. 아라디온.”
떠나는 일행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는 아라디온.
아쉽게도 엘프의 숲으로 떠나기 전, 위그드라실의 결정에 의해 멤버가 바뀌어 버렸다.
‘그래도 한 명 정도는 남아서 엘프들을 통솔하는 게 좋지 않을까?’
레벤토와 아라디온이 모두 떠난다면, 숲에서 엘프들을 통제할 사람은 필로우밖에 없었다.
엘프들 입장에선 필로우가 비록 위그드라실의 가족이라곤 하지만, 육식을 즐기는 그들에게 고기로 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판단한 나머지 한 사람을 남기기로 했고, 지난번에 외출을 했다는 이유로 아라디온을 남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서 가시죠. 위그드라실 님.”
“아. 응.”
“크흑!”
떠나는 일행의 모습을 보다 못한 그가 눈물을 흘리며 도망가 버렸다. 위그드라실은 그를 붙잡으려했으나 어차피 반쯤 개그캐릭터 같은 그의 성격상 진심으로 상처 입은 건 아니라 판단했는지 다른 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필로우. 정말 남아 있을 거야? 아라디온이랑 다른 엘프들이 있으니까 함께 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오. 소인은 남아 있겠소이다. 무사란 언제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는 법이외다.”
“곰곰곰. 곰!”
「으흥흥. 빨리 가자!」
뒤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보채는 곰을 보자 위그드라실은 어쩐지 속이 타는 느낌이었다.
아들놈의 자식들은 어째 하나같이 속 썩이는 재능이 있는 것일까. 어쩐지 여행에 데리고 가면 큰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본인이 가지 않겠다는데. 나쁜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숲을 지키기 위해 남겠다는데.
위그드라실은 잠시 동안의 이별을 희석시키기 위하여 필로우를 꼭 껴안아주었다.
“그럼 부탁할게.”
“소인만 믿으시오.”
평소와 다르게 침착한 필로우. 그동안의 수련의 성과가 빛을 발한 것일까.
그렇게 위그드라실 일행이 옹이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으어어어!”
필로우가 괴성을 지르며 폭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거칠게 쏟아지는 폭포수 아래로 뛰어 들어간 필로우. 그녀는 방금 전 위그드라실과 맞닿은 부분이 뜨거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소인은 무사이올시다! 결코 주공에게 헛된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오!”
차가운 물을 맞으며 그 온기를, 그 뜨거움을 잊으려 연신 중얼거리는 필로우.
그동안 숲에 들어와서 했던 그녀의 수련은, 사실 강해지기 위한 것이 아닌 지금의 감정을 잊기 위한 수련이었다.
“아니 되느니라. 아니되…….”
번뇌를 잊으려는 수도승처럼 머리를 텅 비워봤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물조차 그녀의 열기를 식혀줄 수 없었고 몸에 남아 있던 열기가 머리로 올라가며 그녀의 머리를 뜨겁게 달구었다.
‘필로우.’
그리고 억지로 만들어진 그녀의 공허한 머릿속을 이상한 망상으로 가득 채웠다.
‘그렇게 폭포수를 맞으면 춥지 않아? 엄청 추울 것 같은데.’
‘춥소이다. 소인이 털가죽을 가졌다 해도 이런 물을 버티기엔 너무 나약하오.’
‘그렇지? 꽤 춥겠네. 이리와 필로우.’
‘주, 주공!?’
펼쳐진 이부자리. 두꺼운 이불들. 그리고 그 안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위그드라실.
살짝 들린 이불 안으로 보이는 위그드라실의 하얗고 매끈한 복근.
어린아이의 부드러운 살결과 근육조차 보이지 않는 물렁물렁한 모습이었지만, 그 비단결 같은 몸매가 필로우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자. 어서. 이리로 들어오도록 해.’
“으어어어! 다, 다른 수련이 필요해!”
폭포에서 뛰쳐나온 필로우가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력으로 만든 실을 이곳저곳에 설치하며 침입자를 대비한 함정을 설치했다.
“그래. 일에 집중하자. 그럼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외다.”
그물을 치며 함정을 만드는 필로우. 하지만 그녀의 상상회로는 또다시 발동해 버렸다.
‘필로우?’
“주, 주공! 거기서 뭐하고 계시오! 위험하오이다!”
그녀가 설치한 함정에 걸려 있는 위그드라실. 마력의 실이 그의 몸을 감싸며 옥죄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실이 걸려 올라가면서 그가 입고 있는 옷자락을 여기저기 찢어버렸다.
‘이런. 옷이 찢어졌네.’
“허, 허억!”
은밀한 부위만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찢어진 옷가지. 그리고 그곳에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다리가 묶인 위그드라실.
‘필로우. 이것 좀 풀어줄래?’
“조, 조금만 기다리시오!”
하지만 위그드라실은 모두 그녀가 만들어 낸 상상. 풀어주고 싶어도 풀어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풀어주려 할수록 상상은 더욱 더 발전했고, 이젠 완전히 묶여 나무에 매달린 상태가 되었다.
애벌레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린 위그드라실의 상상. 마력의 실이 그의 몸을 묶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필로우. 이거 혹시 귀갑 묶기…….’
“으아아아아!!!”
필로우는 함정 설치를 포기하고 자신의 망상에게서 열심히 도망쳤다.
하지만 망상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온 환상. 장소를 불문하고 어디로 도망치든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숲이 없는 바위 지대에서도.
‘필로우. 햇살이 정말 따사로워. 이리로 와서 함께 일광욕을 즐기지 않겠니? 자연을 즐기는 거야. 옷은 벗고.’
“으아아아!!!”
졸졸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서도.
‘아. 왔구나. 함께 우리 수영하지 않을래? 물이 정말 시원해. 자. 이리와. 옷은 벗고.’
“으아아아!!!”
이름 모를 들풀들이 나부끼는 들판에서도.
‘정말 바람이 시원하구나. 필로우. 우리 함께 바람을 즐기지 않을래? 옷은 벗고.’
“으아아아!!!”
그렇게 필로우는 비명을 지르며 숲을 돌아다녔다.
“소인은 가죽이라 옷을 못 벗소이다!!!”
* * *
그녀의 망상이 멈춘 것은 발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고갈된 후였다. 지친 몸을 나무에 기댄 필로우가 하늘을 보며 소리쳤다.
“허억. 허억. 신이시여!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주나이까!”
그리고 그에 회답하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일인데?」
또다시 망상인가. 하지만 이번엔 위그드라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구의 목소리면 어떠하리. 그분의 목소리만 아니면 된다. 조금은 마음이 진정된 필로우가 상담하듯이 그 목소리에 회답했다.
“하아. 망상이라곤 하지만 어찌 소인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겠소이까?”
「괜찮아. 이 토마스 님이 상담해 주마. 어서 말해봐.」
목소리의 주인공은 망상이 아니었다.
숲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멈춘 곳이 바로 토마스 앞이었던 것이다.
「할 일은 많지만, 이런 상담도 소설을 쓰는데 아주 중요하지. 자료가 되니까.」
극한의 무료함을 참지 못한 그가 말을 먼저 건넸다. 말로는 소설을 써야 한다곤 하지만, 그가 완성한 작품은 현재까지 제로.
여러 가지 소설을 구상은 많이 했지만 모두 한 편 내지 두 편만 쓰고 때려 친지 오래였다.
「딱 보아하니 연애에 관한 고민인 것 같은데. 이 몸이 또 연애 전문가 아니겠어?」
참고로 이 나무는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 말에 필로우가 고민하다 이야기를 꺼냈다. 어차피 자신의 망상이 아닌가. 상담을 해봐야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과 같으니 딱히 상관없지 않을까?
“소인은 무사이올시다. 그런데 어찌 주공을 사랑할 수 있겠소. 대체 이 마음을 어떻게 진정시켜야 한단 말이오?”
「사극 같은 이야기로군. 주인을 보필하는 남장무사. 하지만 자신의 주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점점 커져가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그의 곁을 떠난다…….」
“아, 아니오! 소인은 결코 주공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애만 태우고 있을 거야?」
“참을 수 있소. 무사란 모름지기 참는 데서 시작하는 법이오.”
「근데 무사라면서 주공을 사랑하고 있잖아? 이미 그 순간부터 무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평범한 여자가 아닐까?」
“그, 그건…… 소인에게 성별 따윈…….”
「게다가 계속 참다가 정말로, 진짜로 못 참게 되면 어떻게 할 건데?」
망상…… 이라 포장된 토마스의 말이 맞았다.
처음엔 이 정도로 심하지 않았다. 조금 부끄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점차 그와의 스킨십을 겪고 나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것이야 말로 점점 사랑이 커져간다는 증거이지 않는가?
“그럼 결국 소인은 주공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로구려.”
가슴이 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터질 것만 같았는데, 이제는 커다란 바늘로 심장을 쑤시고 비트는 것만 같았다.
그의 곁을 떠나서 내가 살 수 있을까?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상상도 하기 싫은 미래였다.
「뭐, 굳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는 없지. 간단한 방법이 있잖아?」
“간단한 방법?”
「자기 마음을 인정하는 거지.」
“소, 소인의 마음을 말이오!? 어찌 그런!”
지금까지 그 마음을 잊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던가. 그런데 그 마음을 인정하라니.
「문제 될 거 있어? 너무 고리타분한 생각에 갇혀 사는 것 같네. 무사라고 해서 꼭 옛날 방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잖아? 요즘은 열린 시대라고. 딱히 네가 주인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지.」
필로우의 귀가 팔랑거렸다. 토마스의 언변에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엔 아직 큰 장애물이 남아 있었다.
“하, 하지만 어찌 소인이…… 아씨도 계시거늘.”
「잉? 그 난폭녀가 무슨 문제야? 어차피 두 사람은 가족이잖아?」
“그래도 소인이 보기엔 아씨는 주공을 사모하는 것 같소이다.”
「물론 두 사람이 혈연적으론 이어지지 않았지만 사회적으론 이미 아빠와 딸이라고. 게다가 주인님은 둔감한데다 소심한 성격이라 절대로 난폭녀랑 결혼 안 할걸? 따지고 보면 유리한 건 너라고.」
“소인이…… 유리하다?”
「그래. 피도 이어지지 않았지. 무사라서 곁에 있어도 뭐라 할 사람 없지. 게다가 주인님도 너한텐 경계심이 없어서 스킨십을 마구마구 해대잖아? 그걸 기회삼아서 우리 둔감한 주인님의 마음에 사랑의 불씨를 피워보라고. 이 숲에서 그 누구보다 가능성 있는 사람은 너니까.」
“…….”
「좀 더 적극적으로 어필해 보란 말이야. 요즘 시대에 여자라고 해서 감정표현을 못하게 하진 않아. 그건 전부 구체제의 유물들일 뿐이지. 모두가 평등한 시대. 여자도 마음껏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요즘이라고.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야. 유교가 지배하던 시대가 아니라고. 네가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둔감한 주인님이 어떻게 네 마음을 알겠어.」
“적극적으로…….”
열심히 억누르던 마음의 불씨가 타올랐다.
그래. 이 마음을 잊을 수 없다면 표현하리라. 핀이라는 거대한 시련이 남아 있지만 그 시련을 멋지게 이겨내 보이리라.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으어어어!!!”
아쉽게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필로우가 다시 폭주하며 숲을 뛰어다녔다.
아무래도 바로 생각이 바뀌기란 쉽지 않은 법이었다.
「하하. 참 내. 바쁜 아가씨로구먼.」
하지만 시간은 많다. 위그드라실이 언제 돌아올 진 모르지만 그 때까지 굳게 마음을 다지면 되는 것이다.
홀로 남은 토마스가 자신의 주인, 필로우, 핀 세 사람을 생각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여자들끼리 사랑이라. 시대가 많이 변했어.」
그의 입장에선, 나무의 입장에선 정신체는 비록 남자지만 위그드라실은 영락없는 암나무였다.
「게다가 종족을 초월한 사랑이라. 아! 좋아. 영감이 떠올랐다. 다시 집필을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