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60화 (16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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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160화 늦버릇만큼 무서운 건 없다

사람의 이미지란 참 중요하다.

평소에 깐죽거리던 친구라거나, 장난기 많은 친구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면 ‘이것도 혹시 날 속이려는 게 아닐까?’하는 의문이 먼저 든다.

고로 그런 친구와는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가 꽤 힘들다. 평소 이미지와 전혀 맞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다보면, 이 친구가 과연 내가 알던 그 친구가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갑자기 왜? 어딜 떠난다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만약 곰이 떠난다고 내게 말했더라면,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곰이 떠난다고 해봐야 숲 속 어딘가에 말년병장마냥 짱 박혀서 시간을 축낼 거라는 상상밖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벤토는 다르다. 가끔 분위기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부 외압(?)에 의한 불가항력이었으니 세이프다.

언제나 진지한 표정으로, 과묵하며 말해야 할 때만 말하는 듬직한 엘프들의 수장.

그런 이미지의 레벤토가 장난을 치거나 ‘사실 근처 마을에 좀 다녀오려고 합니다’ 같은 맥 빠지는 짓을 할 리가 없다.

“어디서부터 설명드려야 할지. 우선 홀랜드 씨가 온 지 얼마 안 됐던 시기에 있었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군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더라?

레벤토에 대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딱히 떠오르는 건…….

하나 있었다.

“수정구슬로 누구랑 이야기를 나누던데. 그것 때문이야?”

“예. 맞습니다. 알고 계셨군요.”

“내용은 몰라. 듣지는 못했으니까. 그냥 그 날부터 네가 생각에 잠겨 있기에 한 번 말해본 것뿐이야.”

분명 그 때부터 레벤토는 혼자 생각에 잠기거나, 명상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무언가 떠올리려는 듯이,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스스로 답을 찾으려는 선구자처럼 말이다.

“그날 제가 연락을 받은 사람은 다른 엘프족의 장로였습니다. 저희 부족과는 그다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지만, 엘프족 사이에선 아주 유명한 부족이지요.”

“친밀하지 않다고……? 왜?”

“아시다시피 저희 부족이 조금 특이하지 않습니까? 다른 엘프들이랑 여러 가지로 충돌이 많았지요.”

한 번에 이해가 됐다. 근데 조금, 조금이라고? 완전 특이한데?

엘프에 대한 내 환상을 부순 게 너희들이라고!

아니, 그 전에 핀을 보고 부서질 듯이 금이 가 있었긴 하지만. 그래도 결정타는 너희가 날렸어!

“어쨌든 그 부족에서 얼마 전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들이 사는 숲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하더군요. 저희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부족에게 연락을 보내봤지만, 아쉽게도 해결책은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해결책이라. 그래서 연락을 받은 이후로 계속 고민하고 있던 건가?

그 문제의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사람이라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거나, 이리 저리 묻고 다니거나, 직접 실험하면서 알아볼 텐데. 엘프들은 오래 살아서 그런가. 자신의 지식을 믿는 경향이 강하구나.

“그런데 대체 무슨 문제기에 그렇게 고민했던 거야? 보통 큰일이 아닌 거야?”

“저도 자세한 사항은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숲의 나무들이 말라 죽고 있다더군요.”

“나무들이? 그럼 큰일이잖아.”

“예. 그렇죠. 다른 엘프들이 저희처럼 식물을 광적…… 열광적으로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집으로 여기니까요. 집이 무너지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죠.”

너도 너희 부족이 조금 심하다는 생각은 하는구나. 방금 속마음이 드러났다고.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보니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연락을 해보려 했지만, 일이 바쁜 건지 다른 문제가 생긴 건지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물론 허락해 줘야지. 그런데 잠깐.”

“왜 그러시죠?”

“방금 식물이 죽어간다고 했지? 그럼 내 힘을 사용하면 될 것 같은데.”

“예!?”

왜 이리 놀라는 걸까? 내 힘에 대해선 잘 알고 있지 않았나? 마치 처음 들어보는 것처럼 놀라네.

하지만 그가 놀란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 그렇지만 위그드라실 님. 밖에 나가셔도 괜찮으십니까?”

“응? 별문제 없는데?”

“저번 여행에서 돌아오셨을 때 엄청 피곤해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으음. 피곤하긴 했지.”

“게다가 하루 종일 누워서 ‘아. 이대로 가만히 있고 싶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라고 말씀도 하셨고요.”

“……그, 그랬나?”

“또 ‘이제 내가 여행 간다고 하면 발목을 잘라버려. 죽어도 못 가게 말려줘’라고도 하셨죠.”“…….”

“심지어 ‘역시 집이 최고라니까. 집 나가면 개고생이야. 다시는 나가지 않겠어’라고도 하셨죠.”

“내, 내가 그렇게까지 말했었나?”

아아. 레벤토가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가려 했던 이유를 알겠다.

그들에게 있어선 신이나 마찬가지인 내가 그런 식으로 숲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데 어떻게 부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건 마치 직장에서 부장이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 내가 쏜다!’라고 말해놓고선 전화기에 대고 ‘미안, 여보. 이번 달도 돈이 없어서…….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라고 감성팔이를 하며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 거랑 똑같잖아.

내, 내가 꼰대라니! 나도 모르는 사이 꼰대가 돼 버렸어!

“아니야! 그 정도로 심각하진 않다고! 그건 그냥 해본 말이었어. 설마 내가 그런 위기 상황에 빠진 숲을 그냥 보고 지나칠 리가 없잖아.”

“그 말씀은 설마……!?”

“그래. 내가 도와줄게. 같이 가자.”

순간 레벤토의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내 말에 감동한 듯이, 어깨를 살짝 떨며 울고 있던 것이었다.

아니, 같이 가준다는 게 그렇게 감동적이었어? 대체 내 이미지가 어떻기에 눈물을 흘려!

“가, 감사합니다! 제가 웬만하면 안 우는데 눈물이 나네요. 죄송합니다.”

“……감사하다면서 죄송하다는 표현은 하지 마. 그리고 앞으로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나, 그렇게 정 없는 녀석 아니야. 내 사람들한테 도움도 못 줄 정도로 귀차니스트도 아니고.”

“귀차니스트요?”

“그런 게 있어.”

아무튼 함께 떠나기로 결정했으니, 일정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출발은 언제 할 건데?”

“나무가 다 자라나면 할 예정입니다.”

“나무?”

“아, 이것도 아직 말씀 안 드렸군요. 함께 보실까요?”

레벤토를 따라가니, 우리가 복구 작업을 한 숲이었다. 오늘 오전에 심은 나무들이거늘, 내 기운을 불어 넣어서 그런지 어느새 죽순처럼 쑥쑥 자라나 있었다.

“이 나무입니다. 오늘 복구작업을 하는 중에 심어두었죠.”

“으음. 이 나무는…….”

내가 기운을 불어 넣지 않은 나무다. 내가 심고 기운을 불어 넣은 나무는 전부 느낄 수 있었지만, 이 나무에서는 내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무들과 똑같이 자라나 있었다.

“나무지만 나무가 아닙니다. 떨어진 나무껍질을 이용해 마법으로 만든 도구지요.”

“나무껍질? 도구?”

두 가지 경우로 놀랐다.

나무라면 환장을 하는 부족이면서 나무껍질을 이용했다니.

그리고 그냥 나무로밖에 안 보이는데 사실은 나무가 아니라 마법도구라고?

“예. 껍질 정도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어차피 땅으로 돌아갈 일부분. 그 정도 융통성은 저희도 있습니다. 게다가 평범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생명은 없으니 도구로 사용한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지요.”

“흐음. 근데 무슨 도구야?”

“다른 엘프들의 숲으로 이동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두 개가 한 쌍으로서 다 자라게 되면 커다란 옹이구멍이 생기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쪽의 옹이구멍으로 나올 수 있게 되지요. 예전에 그쪽 숲에 갔을 때 허락을 맡고 만들어 두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신기하네.”

화려한 마법은 아니지만 신기하다.

게다가 편리하기까지. 귀찮게 이리 저리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순간이동처럼 바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니 몸이 힘들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언제쯤 다 자랄까?”

아직은 나보다 조금 더 큰 정도에 불과하니, 사람이 들어갈 옹이구멍이 생기려면 어린왕자에 나오는 바오밥나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이틀 정도면 다 자라납니다. 모레 다시 오면 될 것 같군요.”

“그럼 그때 다시 찾아오자.”

이동수단도 확보했겠다, 편안 여행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여행이 힘든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이동수단 때문이지 않은가?

지하철이든 버스든 극한의 편의를 추구한다지만 불편하기 그지없으며, 자가용이 있더라도 본인이 운전하면 피곤한 건 매한가지다. 자전거는 가까운 뒷동산에 갈 때나 쓸 만하고 도보는 말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순간이동이라면 그런 피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 이거 라임 좋은데? 피로를 걱정할 필요……. 필요가 피료로 읽히니까 피로를 걱정할 피료…….

곰한테 옮았나 보다. 확실해.

“자. 우리 둘만 가면 좀 그러니까 다른 아이들도 같이 가자.”

“알겠습니다.”

이쪽에 대해선 생각해 둔 바가 있다.

핀은 무조건 간다고 할 게 분명하고, 아라디온은 같은 엘프니까 따라오지 않을까?

“찬성! 아빠! 저도 갈래요!”

“엘프마을이라…… 저도 오랜만에 가보고 싶네요. 위그드라실 님께 엘프마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역시 둘의 반응은 내 생각대로였다.

그럼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남은 두 명의 아이들.

곰과 필로우.

둘 중 누구를 데려갈 것인가!

곰은 지난번에 함께하지 못했으니까 함께 가는 편이 좋을 테지만, 필로우도 무사를 자청하며 나를 지키겠다고 따라올 텐데.

두 사람 모두 따라오면 숲은 누가 지키지? 엘프들이 있긴 하지만 한 사람 정도는 남아줬으면 좋겠는 게 내 심정이다.

“소인이 남겠소이다. 이번엔 무뢰한에게 양보하겠소.”

다행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필로우가 먼저 나서서 본인이 남겠다고 해주었다.

무사라서 나를 지키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이 틀리다니.

“소인은 지난번에 따라가지 않았소이까? 이번엔 무뢰한이 가는 게 형평성 있다고 생각하오.”

‘그리고……’라며 뒷말을 붙이던 필로우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휙 돌렸다. 얼굴이 살짝 상기된 게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던 것 같은데.

굳이 본인이 말하기 싫은 걸 억지로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곰.”

「귀찮은데.」

말로는 귀찮다고 하지만 몸은 솔직하군. 입 꼬리가 대놓고 올라가 있잖아.

츤츤거릴 거면 표정 관리는 생명이지.

“그럼 모두 결정됐으니 모레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네.”

“감사합니다. 이렇게 흔쾌히 동행해 주실 줄이야. 진즉에 말씀 드릴 걸 그랬군요.”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꼭 말하라고.”

“예. 알겠습니다.”

기뻐하는 레벤토의 모습을 보니 나까지 기분이 좋다.

나 역시 돕게 되어 기분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편하게 여행을 떠난다는 즐거움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게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니 방구석 폐인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 같아서 기뻤다.

그리고 광란의 엘프(?)들 말고 조금은 정상적인 엘프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또 한 번 설렌다.

“그런데 이번에 가게 될 엘프마을 말이야. 어떤 곳이야?”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벤토에게 물었다. 괜히 기대만 부풀리다가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 부디 내가 아는 그런 엘프들이길.

“으음. 그냥 평범한 엘프들입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숲을 지키는.”“다른 특이사항은 없어?”

“글쎄요…….”

잠시 고민하던 레벤토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손바닥을 주먹으로 툭치며 말했다.

기대는 하지 말자. 기대가 낮을수록 현실을 직시하며 얻는 행복은 더욱 증가하니까.

“그러고 보니…….”

그러나 그 엘프마을의 특이사항은 결코 흘려들을 수 없었다.

“천 년 전 엘프족 용사가 그 숲 출신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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