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59화 (15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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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159화 떠날 근심은 떠나고, 새로 올 근심은 또 오고

핀과 홀랜드가 대결한 곳은 사건의 여파로 인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황무지가 돼 버렸다.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사막과도 같은 황무지.

몇 년이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피부가 갈라지듯 대지가 쩍하고 벌어져 버린 그 땅에 엘프들이 모였다.

“으흑흑. 빈센트…….”

……물론 땅을 복구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지만, 그 전에 장례식을 치루는 걸 잊지 않았다.

나무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인 것일까. 엘프들은 그 땅에 자라고 있던 나무와 풀 한 포기까지 명복을 빌며 이름을 중얼거렸다.

“엘레나…….”

“세렌…….”

“내세에는 부디 좋은 꽃이 되길…….”

장례식이라고 하니 관이라도 하나 짜줄 줄 알았는데 그게 끝이었다. 하긴, 관을 짜려면 다른 나무가 필요할 테고, 나무를 자르면 또 그 나무의 장례식을 치러야 하니 또 다른 나무가…….

무한루프가 이래서 생기는 건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토지의 복구엔 다른 아이들도 동참했다. 필로우와 아라디온, 핀이 모두 모여 다른 엘프들과 함께 땅을 다지고 새로운 나무들을 구해 숲을 되살렸다.

“미안, 미안. 다들 너무 그렇게 슬퍼하지 말아줘.”

물론 이 사태의 주범인 핀은 복구 작업 내내 다른 엘프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몇 몇 엘프들은 차가운 시선을, 몇몇 엘프들은 또 이런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학살범을 보는 듯한 두려움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아쉽게도 엘프들이 존경하고 모시려는 자는 나뿐이고 핀은 하이엘프라곤 하지만 거기에 해당하지 않았다.

“끄응…….”

“아빠.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쉬셔도 돼요.”

“아냐. 나도 도와야지.”

이 숲에 사는 자로서 나 역시 한 팔 거들고 나섰다. 치우는 일은 엘프들과 아이들이 했으므로 내가 한 일은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그냥 심는 것은 아니다. 나의 기운을 약간씩 불어넣으며 심어주었다. 이렇게 하면 더 잘 자라겠지.

그냥 심으면 이 어린 나무들이 커질 때까지 수십 년은 걸릴 것이지만 내 기운을 넣는다면 금방 자라날 것이다. 지금보다 더 많이 불어넣는다면 바로 자라나겠지만, 그건 여러 가지 의미로 위험할 것 같아서 조금씩만 넣어주었다.

갑자기 자라나면 왜인지 돌연변이라도 될 것 같다. 그건 좀 사양하고 싶은데.

“끝났다.”

숲의 복구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막 시작한 과수원처럼 고르게 다진 땅과 심어진 어린 나무들을 보니 기분이 뿌듯했다.

빠르면 한 달 이내로 원래 숲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곰.”

「정리 끝났냐.」

……숲을 정리하고 왔더니 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녀석, 홀랜드를 돌본다는 핑계로 남아 있어놓고선 돌보기는커녕 옆에서 편안히 꿀이나 먹고 있었다.

손에 흥건히 묻은 꿀을 핥아먹으며 말을 거는 모습이 왜 이리 밉상일까. 아들놈은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한 가지 일을 끝내니 또 한 가지 일이 남아 있다. 홀랜드를 치료해 줄지 말지라는 아주 큰 문제가.

“아직 살아 있는 거 맞지?”

붕대를 칭칭 감아 미라가 된 홀랜드는 핀과의 전투 이후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어제 일처럼 홀랜드가 핀의 마지막 공격을 받아낸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니, ‘어제 일처럼’이 아니라 어제일이지 참.

‘하압!’

검을 치켜들고 핀의 원기옥(?)을 향해 일검을 날리던 홀랜드.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원기옥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하지만 반으로 갈라지면 뭐하는가. 똑바로 홀랜드를 향해 날아오던 원기옥이 갈라져 봐야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을 뿐, 바로 옆으로 두 개가 되어 떨어지지 않은가.

결국 양 옆에서 터지는 폭발로 인해 그는 큰 부상을 입고 기절해 버렸다.

내가 나서서 치료를 해주면 바로 깨어나겠지만,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홀랜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일어나면 또 싸운다고 난리칠까? 아니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숲에서 떠날까?”

그냥 평범한 모험가였으면 이런 고민 없이 치료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험가들 중에서도, 그리고 대륙에서도 최강이라 불리는 인물.

그 강함만큼이나 자존심도 센 인물이다.

그런 홀랜드가 정신을 찾는다면, 과연 핀을 가만 두려 할까? 아마 이길 때까지 싸우려고 하지 않을까?

어쩌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나쁜 짓을 저지를 지도 모른다.

내게 패배한 것과 핀에게 패배한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마법만으로 그를 쓰러트렸다. 그것은 마법에 대한 대비책이라는 그의 목표와 일치하는 점이 있었기에, 기꺼이 나를 스승으로 모시고 평화(?)롭게 대련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핀과의 싸움은? 그것을 과연 홀랜드가 마법이라 생각할까?

솔직히 마법도, 평범한 무투도 아니다. 그것은 이쪽 세상에 없는, 내가 살던 세상에도 없는 싸움법이었으니까.

인간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그림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전투. 과연 홀랜드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홀랜드를 보고 있는 내 어깨를 핀이 감쌌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핀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치료해 주셔도 될 것 같아요. 어차피 또 난리를 피우면 제가 상대하면 되니까요.”

“괜찮겠어? 또 숲을 엉망으로 만들면 눈치가 장난 아닐 텐데.”

“이번엔 좀 더 침착하게 싸우면 되겠죠 뭐.”

‘크큭. 선을 가른다거나…… 점을 찌르면 소란 없이 쓰러트릴 수 있습니다’라고 중얼거리는 핀을 보자 소름이 돋았다.

너, 설마 중2병 다시 돋은 거냐!

“그럼 어디.”

홀랜드의 몸에 손을 대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상처 입었던 그의 피부가 새살이 돋아나듯 순식간에 치료되었다.

“곰. 곰…….”

「새살이 솔솔 돋아나다니. 주인은 마데카…….」

“거기까지. 더 이상 말하지 마.”

“으으…….”

신음과 함께 몸을 꿈틀거리더니 홀랜드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눈을 뜬 그의 눈동자는 초점이 흐렸지만, 곧 정신을 차렸는지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낯익은 천장이다’라거나, ‘나는 분명…… 마지막에…….’같은 대사를 할 거라고 생각한 내가 잘못된 건가?

홀랜드는 아무 말 없이 눈만 뜬 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 상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누군가를 찾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누굴 그렇게 찾아요?”

“…….”

역시. 찾던 사람은 핀이었나. 핀이 말을 걸자마자 갈 곳을 잃은 그의 시선이 딱 고정되었다.

천천히 핀을 향해 다가오는 홀랜드. 혹시나 바로 덤벼들까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럴 생각은 없었는지 그의 몸가짐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나와 싸우며 썼던 그 기술들. 전부 마법인가?”

“아니요. 마법이 아니에요.”

“그럼…… 대체 그 기술들은 뭐지?”

“상상력의 힘이에요.”

“상상력?”

홀랜드가 핀이 한 말을 열심히 고민해봤지만 답이 떠오르지 않는지 찡그린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상상력의 힘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 그를 구제해 주듯이 핀이 설명을 덧붙였다.

“마법이니, 무투니 굳이 개념을 나눌 필요가 있나요?”

“응?”

“당신한테 수련을 받으면서 제 나름대로 해본 생각이에요. 굳이 한 길로만 팔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네 녀석은 그래서 실패하지 않았었나? 어중간한 마법…….”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정말로 내 마법이 어중간해서 진 건가? 그렇다면 내 마력은 쓸모없는 걸까?”

나름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구나. 홀랜드에게 수련을 받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무조건 강해지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드는 거예요. 둘 다 내 힘인데 굳이 그걸 나눠야 할까? 왜 나는 그동안 그 힘들을 나눠서 사용한 걸까? 힘이란 더하면 더할수록 강해지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마법과 무투를 더한다니.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

“들어본 적이 없으면, 본 적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건가요? 그동안 본 백조가 전부 하얀색이라고 해서, 다른 색의 백조는 세상에 없는 걸까요?”

핀의 말에 무언가 느낀 것이 있는 걸까? 홀랜드가 흠칫 떨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백조가 하얀색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백조가 전부 하얀색이라고 한탄할 게 아니라, 다른 색의 백조를 직접 찾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새로운 것을……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 이 말인가?”

“그래서 열심히 상상해 봤어요. 무투와 마법을 어떻게 합치면 좋을지. 그래서 나온 해답은…… 직접 경험해보셨으니 아시겠죠? 강해진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요? 상상해본 적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 이미 누군가가 발견한 경지에 도달해봤자 그건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잖아요?”

“나 역시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거늘…… 그 이상의 길이 있었구나.”

핀 앞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은 홀랜드. 그런 그에게 다가가 핀이 손을 내밀어주었다.

“포기하지 마세요. 아직 삶은 많이 남았고 몸도 멀쩡하잖아요. 지금부터 또 길을 찾으면 되지 않겠어요?”

홀랜드의 눈에 핀이 내민 손은 어떤 의미로 느껴질까?

패자에게 내미는 승자의 위선 섞인 동정일까.

아니면 길을 잃은 아이에게 내밀어진 구원의 손길일까.

그것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다시 길을 찾으려 노력할 거란 건 알 수 있었다.

핀의 손을 잡았으니까.

“고맙다.”

* * *

그렇게 쓰러진 홀랜드는 다시 힘을 되찾았다.

전처럼 자유분방하게 이야기하며 조금 버릇없는 모습도 그대로였다.

“이곳에 조금 머물러도 되겠나? 여기서 수련을 더 하고 싶군.”

“좋을 대로. 대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리 잡아줬으면 좋겠어.”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내 본체에 달린 방어막 같은 건 아직 작동하고 있고, 내 제안을 수락한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따로 지내기로 했으니까.

그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엘프들이 꽤나 두려워하는 것 같으니 이 방법이 최선이겠지.

가끔 나무로 돌아가 뭘 하는지 몰래 살펴보았다. 작은 동굴을 터전으로 삼은 그는 언제나 명상을 즐기며 햇살을 즐겼다.

“강함이란 무엇인가…….”

전처럼 몸을 움직이는 수련은 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대신 선문답처럼 조용히 명상하며 자신에게 묻는 것이 전부였다.

강해지기 위한 수련이라기 보단 득도한 고승처럼 보였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겠지.

심지어 동물도 죽이지 않는다. 가끔 과일을 따다 먹을 뿐, 그 외에 살생을 즐기는 것 같지도 않다.

이러다가 나중에 정말로 신선이 되는 건 아닐까. 우화등선이란 게 진짜로 있다면 가능할지도.

말하고 생각하는 나무도 있는데 신선이라고 없겠어.

뭐, 홀랜드와의 만남은 이런 식의 결말로 끝나 버렸다. 커다란 우환덩어리이자 폭풍의 핵일 줄 알았건만, 나름 괜찮은 결말로 끝난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던가.

사건이 끝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레벤토가 내게 와서 고개 숙이며 말했다.

“저는 이만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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