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청출어람이란 이런 곳에 쓰는 말(2)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숲.
쓰러진 나무들의 잔해와, 뒤집어진 땅이, 울이 생긴 장판처럼 지각이 뒤틀려 있었다.
그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핀을 보자, 나도 모르게 극심한 현기증이 올라오며 홀랜드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핀!”
홀랜드의 대한 분노는 잠시 접어두고, 핀에게 달려갔다.
복수는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핀의 상태니까.
하지만 나의 걸음은 뒤에서 내 어깨를 잡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이어지지 못했다.
“아라디온?”
언제 따라온 것일까? 아라디온은 내 뒤에 서서 손가락으로 핀을 가리켰다.
그의 표정은 세상사를 초월한 신선처럼,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가씨는 아직 쓰러진 게 아니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저기 쓰러져 있는데.”
“흥분하지 마시고 조금 더 자세히 보세요. 위그드라실 님의 특기가 관찰 아니었습니까?”
왜 이리 침착한 걸까? 그의 침착한 모습에 나도 동화되어 가는 것 같았다.
어깨를 붙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때문일까? 그의 온기가 어깨를 타고 들어와 나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관찰…….”
“후우. 후우.”
홀랜드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옆구리를 감싼 그의 모습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하아…….”
쓰러져 있는 핀에게서는 한숨소리가 들렸다. 고통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언가에 실망한 듯한 목소리를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일어서 있는 홀랜드는 고통스러워하고, 쓰러져 있는 핀은 평온해한다.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뀐 것 같은 호흡에 분노는 사라지고,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자. 그럼 여기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으니, 조금만 뒤로 가실까요?”
“아. 응.”
아직 끝나지 않았을 전투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뒤로 조금 떨어지자, 쓰러져 있던 핀이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었다.
“끄응차! 아. 아깝네.”
“방금 그 기술은 뭐지?”
홀랜드가 바로 덤벼들 줄 알았건만, 그는 옆구리의 고통이 심한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상처부위를 꾹 누르고 있었다.
내가 못 본 사이에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하신가요?”
“응? 아. 너 설마 처음부터 여기 있었어?”
“구경 좀 하고 있었죠.”
설마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이거였던 건가.
나는 중간에 있었던 일이 궁금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디온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핀이 홀랜드에게 싸움을 걸었고, 두 사람 사이에 대련 아닌 대결이 일어났다.
그것은 상대를 봐주지 않는, 목숨을 건 대결이었기에 중간에 위험하면 재빨리 나서서 말리기 위해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고 내가 말했다.
어쩐지 살짝 변명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아라디온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홀랜드가 핀의 공격에 대비하여 나와의 대련처럼 몸에 힘을 빼고 있었다. 나도 그의 자연체인지 뭔지 하는 회피 겸 공격술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핀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왜냐하면…….“마법을 포기한 게 아니었나?”
예상치 못한 핀의 마법 때문이었다.
나 역시 아라디온의 이야기를 듣고 의문을 금치 못했다. 마법은 봉인하기로 했던 게 아닌가?
홀랜드의 질문에 핀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장점을 말할 때처럼 즐겁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랬었죠. 하지만 수련하면서 생각해 봤어요. 과연 ‘내가 마법 때문에 약해졌던 것일까?’ 하고. 자세히 생각해 보니 마법 때문에 약해진 게 아니에요.”
“그럼 뭐지?”
“바로 초심을 잃은 거죠.”
초심을 잃었다니. 내가 아는 한 핀의 초심은 이상하리만치 내 기억 속 애니메이션에 입각한 괴상한 공격들…….
설마. 네가 찾았다던 초심이 그런 건 아니겠지?
“생각해 봤어요. 언제부터 제 공격이 쉽게 흘리고 파악할 만큼 단조로워졌는지. 그랬더니 답이 나오더라고요. 바로 상상력의 문제였어요.”
“사, 상상력?”
“네. 원래 제 스타일은 아버지가 주신 기억을 바탕으로 한 자유분방한 공격이었는데, 할아버지에게 힘을 받은 후부터 그것에 의존한 나머지 너무 단순해졌더라고요.”
“대체 무슨 소리야.”
우리들의 이야기를 알 리 없는 홀랜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핀은 딱히 알려줄 마음도, 이유도 없었기에 그의 말을 그냥 무시했다.
“그래서 이렇게 초심을 되찾은 것뿐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당한 공격은 마법이 아니랍니다.”
그럼 대체 무슨 공격을 한 거지?
홀랜드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 궁금해졌다.
“아라디온. 좀 더 자세히 알려줘. 대체 무슨 공격을 했기에 그러는 거야?”
“으음. 저도 처음 보는 형태의 공격이어서 뭐라 말씀 드리기 힘든데요, 굳이 설명하자면…….”
파지직!
“아. 저겁니다. 번개를 손에 두르고 날카롭게 찌르는 공격. 저런 방식의 공격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어…… 저거…….”
어디서 많이 본 공격이다.
닌자인 주인공이 노력 끝에 마을 이장이 되겠다고 선언했지만, 알고 보니 노력이 아니라 부모에게 받은 재능과 인맥이 금수저를 넘어서 다이아몬드 수저였고, 저주인 줄 알았던 몸속의 군식구는 친구가 되어 최상급 힘의 원천이 되어주고, 심지어 본인 자체는 과거 세상을 창조한 존재의 환생이기까지 했던 이야기.
노력이라는 주제가 순식간에 재능과 태생으로 결정되어 버린 그 만화.
그 만화에서 주인공의 라이벌이 쓰는, 끝까지 우려먹는 대표적인 필살기.
“완전 뇌…….”
“이제야 깨달았어! 나의 강함의 원천은 상상력이었다는 걸!”
아니. 그건 좀 아닌데. 상상력이 아니라 표절이잖아!
나의 마음 속 외침은 전해지지 못했다. 핀은 오른손에 두른 번쩍이는 번개와 함께, 홀랜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후우…….”
그동안 그와 대련하면서 많이 보아왔던 회피술이 다시 한 번 발동했다. 하지만 가시처럼 돋아난 번개와 그 팔은 스치기만 해도 홀랜드의 몸에 잔 상처들을 남기며 화상을 입혔다.
“크윽.”
“후후. 그냥 피하는 것만으론 부족할걸요?”
번개니까 근처에만 다가가도 피해를 입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어째서 홀랜드는 회피하지 못하는 걸까?
“아무래도 처음 보는 공격에 당황한 듯싶네요. 아무리 자연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예측을 해야 발동할 수 있는 법이죠.”
역시 나의 스피드 웨건. 설명 하난 빠르군.
“그럼 처음 보는 공격은 흘려낼 수 없다는 소리야?”
“뭐, 이제 막 확인한 공격은 피하기 힘들겠죠. 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금방 회피가 가능할 겁니다. 저기 보세요.”
아라디온의 말 대로였다. 처음엔 피하기에만 급급하던 홀랜드였지만,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능숙하게 핀의 공격을 피하며 드문드문 역공을 가하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당한 공격이니, 두 번은 힘들 겁니다. 고수에게 같은 수는 또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말이 있던가? 잠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홀랜드가 핀의 공격에 익숙해졌다면, 그럼 위험한 상황 아니야?
하지만 나의 걱정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빠르게 사그라졌다. 어느새 핀의 손에 어려있던 번개는 사라지고, 다른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람 머리통만한 구체. 그리고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마력.
수리검 모양으로 변한 그 구체를 핀이 홀랜드에게 날리고 있었다.
“크아악!”
단순한 투척공격. 하지만 그 공격을 흘려내려던 홀랜드의 몸이, 소용돌이치는 마력에 빨려들어 가듯이 영향을 받았다.
흘려내기는 했지만 그의 한 쪽 팔이 뒤틀리며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망가진 인형처럼 돼 버렸다.
에엥? 저 기술 완전 나선…….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아.
“이것이 바로…….”
홀랜드를 스쳐 지나간 핀의 공격이 바닥에 꽂혔다. 대지에 남은 상흔은 마치 작은 소용돌이가 땅을 파먹은 것처럼 보였다.
“상상력의 힘……!”
아니야. 상상력의 힘이 아니야.
그냥 만화 속 캐릭터들의 필살기를 네가 전부 끌어 쓰고 있는 거잖아!
마력이란 참으로 신묘하다.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을 가능케 해주니까.
거기에 핀의 육체는 세계수의 마력으로 인해 인간의 육체를 뛰어넘었고.
두 가지가 합쳐지니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는 힘이 되어버렸다.
“후후. 다음엔 무슨 기술을 써볼까. 모든 것을 태우는 검은 용? 아니면 달조차 날려 버리는 기공포? 그것도 아니면 살생을 금지한 자가 사용하던 검술?”
전부 위험하다. 특히나 첫 번째 게 제일 위험해. 홀랜드에게도 위험하지만 핀, 네 사춘기를 다시 불러올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하다고.
그게 바로 중2병의 원조니까. 모든 중2병의 어머니이자 아버지를 사용해서는 안 돼!
“그래. 마지막은 그것으로 끝내는 게 좋겠지.”
그 말을 끝으로 핀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만세를 하듯 손을 하늘 위로 뻗었다.
“숲의 주민들아! 내게 힘을 빌려줘!”
……그래. 선택은 좋네. 그것만큼 그쪽 세계를 대표하는 필살기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말에 화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근처에 있는 건 전부 나무들뿐인걸. 초능력자마냥 숲 전체에 텔레파시라도 하지 않는 이상, 화답해 줄 사람은 없다고.
물론 듣는다고 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손을 뻗을 리가.
“……아라디온. 뭐해?”
“힘을 빌려달래서요. 이렇게 손을 뻗으면 힘을 빌려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눈치가 빠르군. 어떻게 알고.
근데 말이지. 이건 만화가 아니라서 손을 뻗는다고 해서 네 힘을 빌려줄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핀의 머리 위로 생기는 작은 태양이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물론 아라디온이 힘을 빌려줘서 그런 건 아니다. 다른 엘프들이나, 나무들이 힘을 빌려준 것도 아니다.
그냥 순수하게 핀의 힘 그 자체인 것이다.
“모두들 고마워. 너희들의 힘, 소중히 사용하겠어.”
소중이고 자시고 지금 굉장히 사적인 일에 사용하고 있거든!
“하아. 하아. 그 공격은 대체 뭐지? 너, 그것도 마법이냐! 내게서 대체 뭘 배운거냐! 마법이 아니라 순수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치는 홀랜드. 이 와중에도 그는 검을 바로 잡고 핀의 공격을 베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미안하지만…….”
그리고 거대한 원기옥…… 을 던지며 핀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나보다 약한 녀석의 명령 따윈 듣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