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57화 (15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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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청출어람이란 이런 곳에 쓰는 말(1)

“흐아압!”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핀의 기합소리가 들렸다. 우렁찬 기합소리에 나무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나뭇잎을 떨궜다.

대체 얼마나 힘찬 대련을 하고 있기에 이런 기합소리를 내는 걸까?

핀이 강해지길 바라기에, 나 역시 핀이 강해지길 바랐다. 그런 부푼 마음을 안고 핀과 홀랜드가 대련하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으음…….”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까.

지금 이걸 대련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주먹을 불끈 쥐고 가만히 서 있는 핀. 그리고 그 앞에서 홀랜드가 검을 휘두르며 핀을 공격하고 있었다.

아찔하게 자신의 몸을 베어 가르려는 검격을 한 끗 차이로 피하고 또 피하는 핀의 모습은 너무 위험해 보여서 내 등골이 다 서늘할 정도였다.

심지어 눈까지 감고 있었다. 육감만으로 모든 공격을 피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보기엔 대련이 아니라 그냥 새디스트적인 고문을 하는 것만 같았다.

“이게…… 수련이야?”

“응? 아. 왔냐?”

홀랜드가 나를 보곤 손을 흔들었다. 이제 내게 볼 장 다 봤는지 스승이라는 말없이 그냥 반말을 일삼았다.

스승이라는 말을 붙였을 때도 반말이여서 딱히 위화감은 없었다.

“그냥 고문하는 거잖아 이건!”

“고문이라니. 엄연한 훈련이라고. 뭘 모르시네.”

홀랜드가 내 말을 받아쳤다. 그가 훈련을 중지했지만, 핀은 눈을 감은 채 여전히 집중 중이었다.

“이게 무슨 훈련인데?”

“흠. 그러니까 말이지…….”

나는 홀랜드가 실행하고 있는 훈련에 대해 들으며 깜짝 놀랐다.

그동안 핀의 주력 기술이 마법이라고 생각했거늘, 그의 훈련은 철저하게 육체 위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엔 마법 없이 잘만 싸웠었지?’

아버지와 싸울 때도 그랬었다. 비록 나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 때는 마법 없이 잘만 싸웠었다.

우선 기초가 중요하다는 뜻일까? 이런 방면으론 나의 지식은 빈약하기 그지없기에 홀랜드를 믿는 수밖에.

계속 옆에서 대련하는 모습을 구경했지만, 대련은 쭉 이 상태 그대로 흘러갔고 계속 구경했다간 너무 위험한 모습에 내 속이 타서 버틸 수가 없었기에, 그냥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핀. 열심히 해.”

핀을 불러봤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다. 정말 엄청난 집중력이다.

과연 이 수련으로 핀이 강해질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상하게 핀은 어렸을 적부터 힘에 목말라 있었으니까.

* * *

“…….”

이래저래 심심하기도 하고 이번엔 필로우가 있는 곳으로 와보았다.

내 예상대로 떨어지는 폭포수를 맞으며 필로우는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었다.

“춥지 않을까?”

“사람의 오감(五感)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달린 것. 결국 마음가짐에 따라 뭐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내 질문에 대답해 준 사람은 필로우가 아니라 아라디온이었다.

그의 대답은 꼭 고승이 해주는 해탈의 경지 같은 말이라 이해하기 어려웠다.

“혹시 아라디온. 이 수련법 네가 알려준 거야?”

“강해지고 싶다길래요.”

그냥 물만 맞아서 어떻게 강해질 수 있을까. 내 의문이 무럭무럭 자랄 무렵, 폭포수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위와 통나무들이 필로우를 덮쳤다.

“필…….”

깜짝 놀라 소리치려는데, 필로우가 눈을 뜨더니 재빠르게 그것들을 발로 차냈다.

상당히 날렵한 모습에, 그리고 자기 몸보다 큰 바위와 통나무를 차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응? 주공. 여기는 무슨 일이오?”“그냥. 뭐하고 있나 궁금해서.”

“수련 중이었소이다. 아씨가 열심히 수련하시는데 소인이라고 놀 수 없지 않소이까?”

“열심이네.”

필로우를 칭찬하자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르며 부끄러워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주, 주공. 지, 지금 젖었으므로 만지지 않으시는 편이…….”

“괜찮아. 괜찮아. 뭐 어때.”

필로우는 한사코 손길을 거부하려다 내 말에 포기한 듯 몸을 맡겼다.

물에 젖은 털이 축축하긴 했지만 그 아래 깔린 살가죽이 뜨끈해서 기분은 좋았다.

“으아아아…….”

요란한 신음소리를 흘리다니. 기분이 나쁜가?

몇 번 더 쓰다듬어 주니 어느새 털이 말라 보송보송해졌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 필로우를 꽉 끌어안았다.

꼭 인형 같은 느낌이다.

“허어억…….”

갑자기 품에 안은 필로우가 축 늘어졌다. 앞섬이 축축해지는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코피를 흘리며 기절한 필로우가 보였다.

“피, 필로우!? 괜찮아? 정신차려봐!”

갑자기 왜 기절한 거야. 이해를 못하겠네. 역시 찬물을 맞아서 그런가? 폭포 수련이라니, 전혀 효과가 없잖아.

“후우. 무자각도 병이십니다.”

아라디온이 뭐라 중얼거렸지만 그냥 무시하고 필로우를 치료해 보았다.

하지만 내 치료조차 먹히지 않은 이 증상은 대체 뭘까?

“필로우! 정신 차려!”

* * *

“아아. 술 마시고 싶다.”

홀랜드가 핀의 스승이 된지도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숲에 머무는 동안은 술을 마시지 말아달라는 위그드라실의 부탁에, 그는 억지로 금주를 행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거의 한계인지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목이 타 죽을 것만 같았다.

물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 아는 사람만 아는 술이 고픈 병에 걸린 것이다.

“후우. 앞으로 한 달은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가 보기엔 핀은 천재적이었다. 그녀의 신체능력은 이미 완성되어 있던 터라, 감만 잡으면 자신이나 투제만큼 강해질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질투심도 일었지만, 핀이 강해진다면 그것 또한 자신의 수련 상대가 늘어나는 것이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기쁜 건 기쁜 거고 술이 마시고 싶은 건 별개의 이야기.

그는 지금 몰래 숨어서 주머니를 열고 술을 꺼내고 있었다.

“한 병 정도는 마셔도 괜찮겠지?”

그 한 병이 두 병이되고, 두 병이 세 병이 된다는 사실은 본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야 말로 ‘한 병만 마시고 진짜로 그만 마셔야지’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팽배해 있었다.

“후후. 냄새가 달구나. 달아.”

그리하여 술을 마시려는 찰나,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술병을 떨어뜨려 버렸다.

“뭐하세요?”

“흐억!?”

쨍그랑.

놀람도 잠시. 술병이 깨지는 소리에 그가 바닥에 흐르는 술을 보며 탄식했다.

“아아. 내 술.”

그리고 유령처럼 다가온 누군가를 노려보았지만, 그 존재가 핀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거늘, 대체 언제 다가왔단 말인가? 핀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술병이 깨진 것 이상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술 마시면 안 되잖아요. 약속해놓고서 설마 몰래 마시려고 하신 거예요?”

“그냥 딱 한 입만 마시려고 한 거야. 아니, 그것보다 너, 말투가 또 왜 그래?”

말을 돌리고 싶던 홀랜드에게 핀의 말투는 절호의 찬스. 하지만 핀은 지지 않고 대들었다.

“왜요? 이것도 존댓말은 존댓말이잖아요.”

“좀 더 스승에 대한 예의를 갖춰서 말해야지.”

“이제 괜찮아요. 말투는 이 정도가 적당해요.”

괜찮다니. 스승에 대한 존댓말이 ‘요’ 자를 붙여도 된다는 법이라도 나온 걸까?

그럴 리가 있나. 홀랜드는 한쪽 눈을 치켜 올리며 스승으로서의 위엄을 보이려고 했다.

“이제 당신한테 배울 건 다 배웠으니까. 스승이 아니니까 이런 말투, 써도 괜찮죠?”

홀랜드가 처음 한 생각은 ‘내가 나도 모르게 술을 마셨었나?’라는 생각이었다.

술은 마시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은 ‘귀를 요즘 안 팠더니 잘 못 들은 것일까?’라는 생각이었다.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는, 덕지덕지 묻어나온 귀지를 후 불어 날려 버렸다.

“다시 한 번 말해볼래?”

“배울 거 다 배웠으니까 스승 아니라고요. 당신도 그랬잖아요. 아버지를 이기자마자 ‘배울 것도 다 배웠겠다, 이제 스승이라 안 불러도 되겠지?’라고.”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제자를 받은 적은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배울 게 없다며 이런 식으로 나오는 제자는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가 천재적인 속도로 자신의 가르침을 흡수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더 수련해야 했거늘?

설마 배우는 동시에 자신의 성취를 감추고 있었단 말인가?

그녀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인기척도 없이 자신의 옆으로 몰래 접근할 수 있었겠는가?

혼란스러웠다. 핀의 성취도에 혼란스러웠고, 최초로 반기를 든 제자의 행태에 혼란스러웠다.

그가 생각했다.

이성적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감성에 맡기는 수밖에.

“흐음. 그래? 배울 거 다 배웠다 이거지?”

“네. 한 번 붙어볼까요?”

“그래. 좋아. 어디 한 번 붙어보자고.”

검을 꺼내는 홀랜드. 날카로운 빛이 금방이라도 핀을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본격적으로 하셔도 좋아요. 죽일 생각으로…….”

“그럴 셈이었다. 죽어도 책임은 못 진다?”

“상관없어요. 그리고…….”

핀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차피 죽이지 못할 테니까.”

* * *

작은 손으로 부드러운 흙을 파고, 고랑을 만들어 씨앗을 심었다.

너무 세게 누르면 공기도 안통하고 물도 잘 안 들어갈 테니 조심스럽게 툭툭 두드린 후, 그 위에 물을 뿌렸다.

“주공. 뭐하고 계시옵니까?”

“그냥. 씨앗 심고 있었어.”

요즘에 느낀 게 있다.

핀도 열심히 수련을 하고, 필로우도 수련을 한다.

다른 엘프들도 다들 자기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며, 아라디온과 레벤토도 각자 자신의 일을 하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라디온은 뭘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숲을 총괄적으로 감시하는 듯 하고, 레벤토는 몇 주 전에 누군가에게 연락을 받은 이후로 뭔가를 찾으려는 듯 독서에 빠져 있었다.

“고옴…….”

유일하게 놀고 있는 사람이라곤 나와 곰뿐. 지금도 곰은 나무 아래에 누워 만화처럼 콧방울을 만들며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 사람이 할 일이 없으면 놀 수도 있지. 하지만 곰이랑 같은 등급이 되는 건 싫다고!

“무슨 씨앗이옵니까? 과일?”

“나도 과일로 심고 싶었는데, 엘프들이 또 난리칠까 봐.”

과일 씨앗을 심으려면 과일을 먹어야겠지. 하지만 그랬다간 엘프들이 광란하는 모습을 보일까 봐 두려워서 시도를 못하겠다.

“그냥 풀씨야. 숲에 많이 보이더라고.”

그냥 평범한 씨앗은 아니다. 내 마력을 조금 집어넣은 씨앗이니까.

아무래도 그냥 심었다간 언제 자라날지 기다리기 힘들어서 마력을 조금 집어넣어 심어보았다.

내 마력이 들어갔으니 빨리 자라지 않을까?

“오. 그럼 이름도 짓는 건 어떻소이까?”

“이름은 좀…….”

괜히 이름 지어줬다간 너희처럼 될까봐 무섭다고. 살아 움직이는 씨앗이라니. 그거 완전 만드라고라잖아.

씨앗을 전부 심고 나니 몸이 피곤했다.

이거 참. 귀농하러 온 도시인도 아니고 이 정도 움직였다고 피곤하다니. 방구석여포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

운동이라도 할까?

콰광!

……라고 생각하자마자 숲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그 방향은 핀과 홀랜드가 수련을 하는 곳이었다.

“필로우! 가보자!”

“알았소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평소 수련하면서 이런 소란이 일어난 적이 없는데.

나는 필로우를 데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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