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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스승과 제자와 제자의 제자(3)
드디어 기다리던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핀은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아무 생각도 없었다.
황당함의 극치. 강해지기 위해 하는 것이 수련이 아니던가. 자신의 문제점을 찾기 위해 온갖 수련을 빙자한 구타를 시도해 놓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 ‘넌 너무 강해’라니.
강하면 수련이 왜 필요하겠는가? 자신을 처참하게 이겨 놓고, 좌절까지 시켜놓고, 굴욕을 참아가며 수련까지 받았건만 마지막에 하는 이야기가 ‘넌 너무 강해’라고?
“지금 장난하시는 거예…… 겁니까?”
핀이 따지듯이 물었다. 반말을 하려했지만 욱신거리는 통증에 급하게 존댓말로 바꿨다.
홀랜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정정했다.
“정확히 말해주지. 넌 강해. 육체적인 면만 따지자면 투제 그 녀석과 맞먹을 정도로 강하지. 하지만 투제와 싸워본 내가 말하는데, 너는 투제보다 뒤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저, 그 사람이랑 싸워서 비겼습니다.”
“제대로 안 싸웠겠지. 목숨을 걸고, 진심으로 싸웠다면 졌을 거다. 너, 어디서 싸웠지?”
“으음. 도시에 있는 공원에서 싸웠습니다.”
“역시. 그런 곳에서 싸웠으니 제대로 싸우질 못하지. 그놈은 조절이란 걸 모르거든. 진심으로 싸웠다가 그 주변이 초토화됐을 거다. 그런 곳에서 제대로 싸웠을 리가 있나.”
“그, 그럴 리가!”
믿을 수 없었다. 핀은 하늘이 무너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녀의 자존심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던가?
벨루스에게 받은 마력을 기초로 하는 마법과,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리라 여겼던 육체능력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무투에서는 투제와 비기고, 마법에서는 홀랜드에게 격파당했다. 후자는 몰라도 전자에 대해서는 ‘그래도 비겼으니 나름 괜찮은 성적이었어. 그 정도로 만족하자. 그 사람,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자였잖아?’라며 자기 합리화를 시도했건만.
그게 사실 제대로 싸운 게 아니었다고?
좌절한 핀이 몸에 힘을 풀었다. 축 늘어진 어깨가 금방이라도 땅에 닿을 것만 같았다.
“이런. 끝까지 좀 들어. 그 날 투제와 싸울 때 마법을 썼었나?”
“아뇨. 쓰고 싶었는데…… 써지지가 않았어요…….”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가 평상시의 말투로 돌아왔다.
“싸우는 중에도 계속 써보려고 노력은 했고?”
“계속 써보려고 했는데…… 싸움이 끝날 때까지 나가지 않았어요…….”
“역시. 생각대로군.”
지금까지 핀과 대련하면서 홀랜드는 그녀의 전투가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에서야, 그리고 그녀의 대답으로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네가 나를, 그리고 투제를 이기지 못한 이유가 뭔지 아나? 그건 바로 마법 때문이었어.”
“……네?”
축 늘어져 있던 핀이 고개를 들었다. 마법 때문이라니. 자신이 가진 마법의 위력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던 그녀는 홀랜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충분히 몸으로도 가능한 일이거늘, 너는 마법에 너무 얽매어 있었다. 어떻게든 마법을 한 번이라도 더 쓰고자 정신이 분산되고, 정신이 분산되니 그 뛰어난 몸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 것이지.”
핀의 마법을 지금까지 겪은 홀랜드는 단언할 수 있었다.
“너의 마법은 초보 수준이다. 위력만 보자면 뛰어난 것은 확실하지. 어쩌면 마제 녀석과 비슷할 정도로 위력 하나만큼은 뛰어나. 하지만 그것뿐이다. 그 마법을 다루는 능력, 말하자면 조작은 중급 마법사만도 못한 게 현실이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럼 묻지. 너는 마법을 배운 적이 있더냐?”
대답할 수 없었다. 마법을 직접 배운 적은 없으니까.
벨루스에게 마력을 건네받기는 했지만, 그냥 떠올리면 나가는 게 마법이 아니던가?
“하지만 저는 마법을 쓸 수 있다고요!”
“사용하는 것과, 그것을 응용하고 다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지.”
“위력 면에선 문제없잖아요!”
“그래. 위력은 말했던 대로 뛰어나. 하지만 그게 다야. 맞추지 못한다면, 나처럼 그걸 흘려내고 받아칠 수 있다면 아무 쓸모도 없어. 네 방식대로 위력만으로 최강이 되려면 적어도 지금보다 십수 배는 더 강해야 할걸?”
“그, 그건…….”
홀랜드의 논리에 핀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마법으로 최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근거는 모두 과거 벨루스의 행적 때문이었다.
벨루스 역시 마법을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고, 자신처럼 마음껏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최강이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자신은 벨루스가 아니다. 그의 힘의 작은,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약해지고 또 약해진 극히 일부분만을 물려받았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강하다 말할 수는 있었겠지만 최강이라고 불릴 수는 없던 것이다.
“여러 가지에 능하면 스스로 강하다 착각할지 모르지만, 어느 것 하나 대성하지 못하면 결국 잡기에 불과한 법. 무엇 하나 끝까지 수련해본 적 없는 네가 최강을 논할 게 아니니라.”
“내가 약했던 이유가…… 마법 때문에……?”
“그래. 일반인 입장에선 약하다고 할 수 없겠지. 네가 그동안 만났던 녀석들도 그 분야에서 최강을 논할 수 없는 녀석들뿐이었을 거고. 그러니 자기가 강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진짜 최강이 되기 위해선 한 길을 파야한다.”
이제 받아들여야 한다. 그의 말이 맞았다.
흐느적거리던 핀이 몸을 바로 잡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좋은 눈빛이군. 마법을 포기하라고 하진 않겠어. 다만, 뭐라도 하나 제대로 마스터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마법과 무투. 그 중에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무투뿐이군. 검술을 기반으로 한 내 기술들.”
핀이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 그를 스승으로 모실 때 하지 않았던 정중한 인사였다.
강해지겠어. 그리고 다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어.
그녀의 다짐이 큰 목소리가 되어 숲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 * *
“아아. 심심하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들을 보며 생각했다. 원래 숲이 이리도 무료했던가?
홀랜드가 있는 동안에는 나무로 돌아가지 않고 이 상태로 지내기로 결정했기에, 나는 조용히 내 본체 그늘에 누워 졸음이 쏟아지는 눈꺼풀과 씨름했다.
“다들 조용하네.”
숲은 조용했다. 고요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으려나.
전에도 말했듯이 엘프들은 전부 홀랜드를 피해 정찰이라는 명목으로 피난 간 상태고, 남은 사람이라곤 곰과 필로우, 아라디온과 레벤토가 전부였다.
그중에 필로우는 ‘아씨가 수련하는데 소인도 질 수 없소이다.’라며 홀로 숲 어딘가로 떠났다. 아마 무사답게 폭포수 아래에서 물을 맞으며 수련하지 않을까.
따라가서 구경하고 싶지만 오늘은 날이 너무 좋아서 그냥 이러고 있어야겠다.
“레벤토도 바쁘고.”
레벤토는 어제 누군가에게 연락을 받은 이후로 명상에 빠졌다.
옆에서 본 바로는, 수정 구슬로 다른 엘프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부터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심각한 그의 표정 때문에 물을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그냥. 아무 생각도.”
그나마 아라디온이 옆에 있었지만, 딱히 아라디온과 할 놀이도 없었고 내 무료함은 그대로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거나 한 번 물어볼까?
“아라디온. 너 여행 갔었다고 했지? 천 년이 넘게 어디서 뭘 한 거야?”
“으음. 제 이야기가 듣고 싶으신 건가요?”
“심심하니까.”
전에 만났을 때 이야기해주려던 걸 끊었던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좀 들어봐야겠다.
“그냥 좀 먼 곳에 가서 인간들도 만나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싸우기도 하고, 열심히 구르다가 돌아왔네요.”
“……이야기해 주기 싫은 거야?”
전엔 그렇게 이야기해 주고 싶어 하더니.
슬쩍 눈을 떠서 아라디온의 표정을 훔쳐봤다. 평소의 모습과 다르게 고민이 잔뜩 묻은 얼굴이었다.
그런 표정을 지으니까 묻고 싶어도 못 묻겠네. 레벤토도 그렇고 아라디온도 그렇고 왜 이리 고민들이 많아.
“나중에 이야기해 주고 싶으면 해줘.”
“하하! 넵. 나중에 꼭…… 기회가 되면 이야기하겠습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아라디온. 괜히 애매하게 이야기가 끝나서 그런지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곰…….”
「따뜻하다…….」
“아잇! 깜짝이야!”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등골이 삐쭉 솟을 만큼 놀랬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곰이 내 옆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뭐야. 언제 온 거야. 깜짝 놀랐잖아.”
“……곰.”
「……내가 먼저 누워 있었다.」
응? 먼저 누워 있었다고? 그런데 왜 못 봤지?
……요즘 들어 존재감이 더 희미해져서 그런가?
“고오옴!”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이런. 내 마음대로 생각도 못 하겠네.
조용히 누워서 하늘을 감상했다. 아까도 그랬지만, 여전히 하늘 위에는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누워 있는데 곰이 말을 걸었다.
“곰.”
「구름이 하나 사라지면 뭔 줄 아나?」
“……뭔데.”
“곰.”
「팔름.」
아.
할 말이 없다. 이런 시시콜콜한 개그를 들어야 한다니.
근데 너무 할 일이 없다보니 조금 웃겼다.
“그런데 위그드라실 님. 아가씨는 뭐하고 계시죠?”
“특훈 중. 엄청 열심히 하던데.”
요즘엔 핀의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핀과 홀랜드의 대련은 다른 양상으로 바뀌었다. 전에는 마법이고 육탄전이고 죄다 동원하던 핀이거늘, 이제는 마법은 안 쓰고 오로지 싸움만 거듭하고 있었다.
심지어 홀랜드는 검까지 뽑아 들고 싸웠는데 나름 밀리지 않고 선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아마 나 때처럼 봐준 게 아닐까?
“흐음. 그렇군요.”
“아. 차라리 홀랜드랑 싸우고 싶다.”
홀랜드와 나의 대련은 어제부로 끝났다. 정말 천재라는 단어를 알기만 했지 진짜 천재가 어떤 존재인지 처음으로 만난 것 같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내 마법을 파훼하는 법을 알아내버린 것이다.
‘그래. 이제 알겠군. 스승. 다시 덤벼봐.’
그 한 마디와 함께 시작된 어제의 대련은, 나의 패배로 끝이 났다. 어떻게 했는지 물었는데 그의 설명을 들어도 당최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고호홈.”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된다. 어차피 형님은 이길 수 없다. 그냥 포기하고 낮잠이나 자는 편이 편하다.」
“넌 누구 편이냐.”
핀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대로 누워 있는 것도 괜찮지만 지금 뭐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읏차.”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풀들을 탁탁 털어냈다. 어째 여행을 다녀온 뒤로 내 나태함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서 기쁘다.
“오랜만에 한 번 구경이나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