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54화 (154/200)

=======================================

[154] 스승과 제자와 제자의 제자(1)

용사는 말했다.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마물들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필요악이 없으면 인류는 다시 분열할 것이고, 평화는 사라지고 다시 예전과 같은 혼란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그래서 아버지가 만든 봉인에 구멍을 뚫지 않았던가?

그런 마물들이, 엘퀴라즈 숲뿐만 아니라 다른 곳까지 전부 사라졌다고?

“그게 정말인가요? 마물들은 쉽게 죽이기 힘든 끈질긴 녀석들 아니었나요?”

심지어 죽여도 마기가 남아 있는 한 바퀴벌레처럼 계속해서 나타나는 게 마물 아니었던가?

언젠간 기회가 된다면, 세상에 남아 있는 마기들을 없애기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녀야겠다는 마음도 먹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마물들이 전부 사라졌다니. 어째서?

“나야 모르지.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마물들의 힘이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하더군. 내가 모험가 생활을 할 때까지만 해도 쌩쌩했던 녀석들이 숲에서 수련 좀 하고 있자니까 어느 날부턴가 비실거리더니, 더는 새롭게 태어나는 녀석들이 없어지더군.”

“그 말은…….”

“마물이 진짜 무서웠던 이유는 아무리 죽여도 계속 나타나던 그 번식력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마물이 나타나지 않으니, 모험가들도 그렇고 국가에서도 그렇게 계속 퇴치하다보니 점차 줄어들더군. 그리고…….”

손뼉을 치며 홀랜드가 나의 주의를 끌었다.

“펑. 하고 흔적도 없이 죄다 사라져 버리더군.”

마물의 실종.

그것은 내게 중요한 일이었다. 마물이란 존재 아니, 마기란 존재는 운명처럼 자꾸 내 신경을 붙잡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요?”

“글쎄.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 반년도 안 됐을걸? 엘퀴라즈 숲의 마기가 정화됐다는 소문이 돌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으니까.”

“반년도 안 됐다라…….”

대략 반년 전이면 언제지? 숲이라 달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날짜개념이 희박해서 확실하게 기억할 수가 없다.

비루스 국왕이 군대를 이끌고 왔을 때였나? 아니면 훨씬 전이었나?

“그것 때문에 모험가들이 대부분 은퇴해서 직장을 구하느라 난리도 아니더라고. 여기까지 오면서 이 마을 저 마을 다 들렸는데 아주 그냥 취업난 때문에 직업 구하느라 바쁜 백수투성이더군.”

이세계의 경제불황인가. 하긴, 그 전에 모험가라는 직업을 하던 사람들이 죄다 다른 직종으로 갈아타고자 했다면 이래저래 혼란의 도가니였겠네.

“어쨌든 그런 의미로 네가 말한 방법은 이제 더 못 쓴다. 말했듯이 나도 처음엔 마물로 연습을 했었다고. 이런 말하면 좀 그렇지만, 마물들이 계속 남아 있었다면 혼자서도 완성할 수 있었겠지.”

“그럼 그냥 평범한 마법사들은 안 되나요? 꼭 저여야만 하는 건가요?”

“네가 그나마 마제랑 가장 수준이 비슷한 거 같아서. 평범한 꼬마는 아닌 것 같고.”

“……그런 정체불명의 꼬마를 스승으로 두고 싶다 이 말씀이시군요.”

“상관없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 그게 설사 말 못하는 나무 한 그루라도 스승으로 삼아주지.”

나무라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알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내 정체를 간파한 줄 알았다.

하아. 마물이라. 그것들이 다 사라졌다니.

아니, 지금 그게 급한 게 아니지. 눈앞의 이 고집불통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뭘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고민 안 하게 생겼어? 저런 아저씨를 제자로 두는 취향도 없는데다, 나는 누군 가르칠 재능도 없단 말이야.”

“가르칠 필요는 없다. 그냥 첫날 내게 했던 것처럼 마법만 써주면 된다. 그 뒤에 깨달음은 온전히 내 몫이니까.”

아라디온이 우리들의 의견을 각각 듣더니 고민하기 시작했다.

부디 아라디온.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어서 떠올려줘. 지금 홀랜드 녀석, 이마에 핏줄이 솟은 걸 보니 점점 인내심에 한계가 오는 것 같거든?

“아.”

아라디온이 손뼉을 쳤다. 아까 홀랜드가 친 것과 다른, 자신의 기발함에 놀라 치는 손뼉이었다.

“이건 어떨까요?”

“뭔데?”

“자. 그러니까…….”

* * *

“핀. 뭐해?”

나무 위에 올라가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핀에게 물었다.

아쉽게도 아버지가 알려준 마법 중에는 하늘을 나는 마법은 없었기에, 나는 아라디온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비몽사몽이여서 핀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정신을 차릴 만했을 땐 홀랜드 덕분에 다시 정신이 없어서 핀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내 불찰이다. 핀이 자존심이 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어제 홀랜드에게 패배했다는 사실도 기억하고 있는데도 관심을 가져주지 못하다니.

“…….”

“핀? 뭐하니? 응?”

옆에서 쫑알거리며 물었지만 핀은 반응이 없었다. 텅 빈 눈동자는 여전히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고, 마치 속이 비어버린 인형인지 의심될 정도였다.

‘설마 진짜 인형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핀의 볼을 손가락을 쿡 찔러보았다. 말랑말랑한게 진짜 사람의 감촉이었지만, 핀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흐음. 아니면 분신이라도 만든 건가?’

홀랜드에게 대비하기 위해 분신을 만들었을 수도 있잖아? 이름하여 환영분신술. 핀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기도 한데.

그런데 분신치고는 너무 정교한걸?

그나저나 이거 은근히 중독성 있다. 볼이 너무 말캉거려서 찌르는 재미가 있다. 살찐 애완동물의 배를 만지면 이런 느낌일까.

“아빠…… 그만하세요…….”

“흐익!? 뭐야. 핀. 진짜였잖아.”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아라디온 어깨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다행히도 아라디온이 손으로 받쳐줘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바닥에 떨어져 나무로 돌아갈 뻔했네.

……그러고 보니까 나, 나무로 돌아가서 말 걸면 되는 거였잖아. 이 몸에 너무 익숙해져서 생각을 못했군.

어쨌든 자세를 바로 잡고 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이제 좀 눈동자에 생기가 살짝 돌아온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핀. 여기서 혼자 뭐해?”

“숨셔요.”

“……으음. 그래.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당연히 숨은 쉬어야지. 그거 말고,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안 해요. 좀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데, 숨은 어쩔 수 없이 쉬게 되네요.”

중증이다. 이건 거의 자기비하로 넘어가기 직전이잖아. 아니, 이미 넘어간 건가?

이러다가 핀이 방구석 폐인이 될지도 모르겠어. 이 숲의 방구석 폐인은 나 하나로도 족하다고. 너까지 그러면 안 돼!

“핀. 너무 신경 쓰지 마. 살다보면 싸우는 일도 있고, 그러다보면 질 때도 있는 거지. 그런 걸로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어.”

“…….”

살짝 고개를 돌린 핀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분명 깊고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 파란색 눈동자가 흔들릴 리 없으니까.

“그렇죠. 질 수도 있는 거죠. 하지만, 저는 지면 안 됐어요. 아빠를 지켜주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다녔는데, 투제랑 싸워서 비기고 이제는 지기까지 했다고요.”

나는 왜 이렇게 핀이 우울한지 확실히 눈치 챘다.

핀은 언제나 나를 지켜주겠다고 말했었다. 소중한 무언가를 보호하는 것만큼 기분 좋은 희생은 없다.

게다가 자신은 분명 강하다. 그러니 자신감도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무승부를 경험했다. 거기까지는 핀도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패배는 안 된다. 모든 것을 잃는 것. 지켜야 할 상대를 지켜주지 못하는 게 바로 패배니까.

핀은 예전의 내가 그랬듯이 지금 삶의 목적을 잃은 것이다.

“나는 괜찮아. 아, 어제 내가 그 녀석 혼내줬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저도 봤어요. 저는 졌는데 아빠는 이기셨죠.”

아아. 더욱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눈동자가 공허해지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내 딸이 위험해져버렷!

미래가 그려진다. 어두운 동굴을 방으로 삼아 그 안에서 지내고 있는 핀의 모습이.

밖으로 나오지 않고 오로지 그곳에서만 생활하는 핀.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니 음식들을 가져다주는 내 모습이 보였다.

‘아빠!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핀…… 이제 제발 거기서 나오렴…….’

‘아! 내가 그거 물어보지 말랬잖아!’

‘피, 핀! 아빠는 네가 걱정돼서…….’

‘몰라! 아빠 얼굴 보기도 싫어! 그냥 문 앞에 놔두고 가!’

그리고 다음 날 가보면 다 먹은 그릇이 동굴 앞에 놓여 있고, 동굴 안에서 혼자 낄낄거리며 웃는 핀의 목소리가…….

“아, 안 돼!”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사태만큼은 막아야 한다. 나와 같은 흑역사를 쓰게 만들 수는 없지.

“핀. 넌 지금까지 잘 해왔어.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너 혼자만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거 잖아. 세상에 그 누가 가르침 없이 혼자서 강해질 수 있겠어? 홀랜드도 결국엔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서 강해진 거잖아. 수련도 별로 안 하고 지금처럼 강해진 네가 대단한 거야.”

나름 위로라고 해줬건만, 핀의 상태는 더욱 더 심각해졌다.

“그렇죠…… 수련도 안하고…… 맨날 놀기만 하고…….”

“아, 아니지! 수련도 했었잖아! 검도 휘두르고, 이상한 기술도 연습하고!”

“그러네요. 수련도 했는데 겨우 이 정도라니…….”

아아! 위험하다! 뫼비우스의 띠에 갇혀버렸어!

무슨 말을 해도 자기비하로 연결되잖아!

“아가씨. 때로는 마음을 비우는 편이 좋습니다. 너무 많은 짐을 어깨에 짊어지시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그 무게에 짓눌리게 마련이죠.”

나를 태우고 있던 아라디온의 말에 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좋아. 아라디온. 출격이다!

“제가 알던 사람 중에도 아가씨 같은 분이 계셨었죠. 모든 걸 혼자서 짊어지던 사람이. 강해지기 위한 수련도, 누군가를 지켜야겠다는 마음도.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하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잘 해내던가요?”

“아뇨. 실패했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짊어진 모든 걸 잃어버렸습니다.”

아, 안 돼! 이 상황에서 더 몰아붙이면 어쩌자는 거야! 핀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변했잖아!

“하지만, 모든 걸 잃고 나서야 깨닫더군요. 자신이 지켜주려 했던 사람들도 자신을 지켜주고 싶어 했다는 걸요. 많은 걸 짊어졌을 땐 그 무게에 짓눌려 주변을 보지 못했지만, 잃고 나서야 비로소 주변을 보게 된 거죠.”

“…….”

“그 후에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 줄 아십니까?”

“어떻게 됐는데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더 강해지기 위해 증오해 마지않던 사람을 스승으로 모셨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에 기꺼이 손을 내밀어 함께 걸어갔습니다. 예전엔 독함과 고독이 그를 좀 먹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했을 때 그는 더더욱 강해졌습니다.”

바람이 불어왔다. 핀의 머릿결이 하늘거리며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러니 아가씨도 너무 좌절하지 마세요. 아가씨에겐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깨달으셨다면 된 겁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새로 시작한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도 없고요.”

잠시 생각에 빠진 핀의 눈동자에 마침내 생기가 돌아왔다.

나는 아라디온의 얼굴을 보며 엄지를 척! 하고 내밀었다. 그는 무슨 뜻인지 몰라서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내 손을 보았다.

“그래! 나는 아직 젊어! 홀랜드니 투제니 하는 것들보다 훨씬! 그러니 지금부터 제대로 수련하면 더 강해질 수 있어!”

조금 핀트가 어긋난 해답이구나. 핀.

“위그드라실 님. 지금입니다. 말씀하시죠.”

아라디온이 내게 말했다. 그래. 여기 온 이유는 핀을 달래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 말을 전해주러 온 것도 있었지.

“핀. 더 강해지고 싶지?”

“네!”

“그럼…….”

기운차게 대답하는 핀. 과연 핀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까?

조금 걱정되는 마음으로 내가 말했다.

“홀랜드의 제자가 되지 않을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