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53화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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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배움에 나이는 중요치 않다

“스승.”

스승님이라.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내가 스승이라는 말을 쓸 일도, 들을 일도 없었는데 말이지.

아니, 그 전에 스승이라는 말보단 다들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쓰잖아? 스승이라는 단어는 졸업식 날 ‘스승의 은혜’를 부를 때만 쓰지 않나?

요즘 세상에 스승이라는 말을 쓰면 무슨 조선시대 양반 코스프레하는 줄 알 거다.

“스승. 내 말 무시하냐?”

“으음…….”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그런 걸까.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직도 숙취가 가시지 않는다.

숙취란 참으로 고통스러운 거구나. 관자놀이에 바늘을 푹 찔러 넣고 그걸 장난꾸러기가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다.

어제 홀랜드를 쓰러트리고 바닥에 쓰러진 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뒷이야기가 기억나지 않는다.

“후우. 스승…….”

……사실 다 기억난다. 그냥 잊고 싶어서 해본 말이다.

어제 대체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거란 말인가. 그 중2병스러운 대사들하며, 평소에 생각조차 안했던 요상한 야망까지!

술은 사람의 본성을 보여주는 마법의 물약이라고 하던데. 나도 모르는 또 다른 내가 마음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걸까?

“위그드라실 님. 저기, 아까부터 홀랜드 씨가 말을 걸고 계신데요.”

이제 다시는 술을 마시나 봐라. 으으. 이곳에 와서 흑역사 없이 깨끗했던 내 과거가 더럽혀지다니. 밤에 자다가 이불을 뻥뻥 찰만한 사건이잖아.

“스승!”

“으윽!”

머리를 짓누르는 악력에 잠잠해지던 두통이 두 손 들고 축제를 즐기듯 내 머릿속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두꺼운 가죽을 덧댄 것 같은 손바닥을 두 손으로 밀쳐내려 했지만, 아쉽게도 내 힘은 그를 떨쳐낼 수 없었다.

“그, 그만! 아니 아저씨! 제가 왜 스승입니까! 그냥 집에 가시라니까요!”

“싫다! 그 마법을 파훼하기 전까진 절대 안 돌아가!”

아아. 사람은 후회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나는 오늘 아침 내가 벌인 짓을 격렬히 후회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으으. 머리야.”

전날 술기운에 기절했던 나는 아침에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함께 일어났다. 이른 새벽이라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응? 이 녀석은…….”

비몽사몽한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인물을 발견했다.

내게 당해 큰 부상을 입고 아직 깨어나지 못한 홀랜드가 나무에 밧줄로 꽁꽁 묶인 채 잠들어 있던 것이었다.

아마 깨어나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다른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처리를 해둔 것 같았다.

“누구지? 많이 다쳤네.”

……아쉽게도 아직 가시지 않은 술기운과 잠기운이 콜라보가 되어 내 기억을 혼선 시켰고, 홀랜드를 그렇게 만든 주범이 나였다는 사실을 잊은 채 그냥 부상자라는 생각밖에 못했다.

“미라 같아.”

붕대를 칭칭 감은 홀랜드의 모습은 중상을 입은 환자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내가 가진 힘을 사용했다.

바로 치료.

“그러니까 빨리 그 힘을 다시 사용해 달란 말이야.”

뭐, 그 결과 다시 쌩쌩해진 홀랜드가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달려들게 됐지만.

응? 뭐라고? 근데 왜 홀랜드가 나를 스승이라 부르냐고?

“아니, 저는 스승 같은 거 할 생각 없다니까요.”

나도 모르겠다. 젠장.

부상에서 치료된 홀랜드는 아침에 눈을 뜨더니, 내게 넙죽 절을 하고는 그 순간부터 스승이라 부르며 나보고 싸우자며 졸라대기 일쑤였다.

“저는 싸울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좀 이제 숲에서 떠나주세요.”

“싫다! 네 녀석을 꺾기 전까진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계속 졸라대는 그의 행동에 짜증이 솟구쳤다.

대체 왜 이렇게 졸라대는 것일까?

“그러지 말고 두 분이서 차분히 이야기라도 나눠보시죠. 아침부터 서로 자기 의견만 우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흐음. 그것도 그러네. 스승. 나랑 대화 좀 하자.”

“끄응. 아라디온. 대체 누구 편이냐.”

“합리적인 해결책을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하긴. 이대로 가다간 죽을 때까지 다 큰 중년의 남자가 내게 매달리듯이 애걸하는 모습을 반복할 테니, 대화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호탕하게 자리에 앉은 홀랜드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마법 주머니였는지 팔꿈치까지 깊숙하게 들어갔다.

다시 빠져나온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그거 당장 집어넣으세요.”

“응? 진솔한 대화엔 술이 최고의 안주잖아?”

“……당신은 이렇게 어린 소년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싶으신 겁니까?”

“소년? 소녀가 아니라?”

“하아…….”

“흐음. 스승이 싫다면야 뭐. 아쉽군. 이 참에 사제의 잔을 나눠보려고 했거늘.”

실망한 표정으로 술을 도로 집어 넣는 홀랜드. 나는 그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해주길 기다렸다.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하지. 이봐. 그러니까…… 소녀?”

“그냥 위그드라실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위그드라실. 나를 네 제자로 받아다오.”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이럴 거면 대체 대화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대체 왜 제 제자가 되고 싶으신 건데요? 그 이유 좀 들어봅시다.”

“흠…… 이유라…… 설명하기 복잡한데.”

잠시 고민하던 홀랜드가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행히도 내 눈치를 살피더니 술은 꺼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아, 스승. 혹시 전설의 세 모험가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당신이랑 투제, 마제라 불리는 다른 모험가들이요?”

“그래. 그 녀석들.”

그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홀랜드는 살짝 추억을 엿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모험가 시절, 언제나 함께 다녔지. 모두가 세상을 떠돌며 수련을 하기 위한, 말하자면 나와 같은 수련광들이었다. 별로 명성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전설의 모험가가 되어버렸더군.”

그렇지. 전형적인 천재들이로군.

딱히 유명해지고 싶어 하진 않지만, 목표를 이루며 겪은 시련과 사건들이 쌓이고 쌓여 원치 않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는.

쳇. 이래서 천재들이란.

“어쨌든 우리는 각자의 수련을 끝내고 모험가 생활을 청산하기로 했지.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해지더라고. 과연 우리 중 누가 제일 강한 걸까? 사람들은 우리를 최강이라 부르지만, 최강은 단 한 명만 얻을 수 있는 칭호잖아? 최강이 세 명이 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래서 싸웠나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표정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설마 셋 중에 본인이 최약체였던 걸까? 그래서 내게 수련을 시켜달라고 하는 거였나?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하게 맞춘 홀랜드가 버럭 화를 냈다.

“아직 승패는 나지 않았어! 그런 표정으로 날 보지 마!”

표정관리 좀 해야지. 진짜 다들 내 표정만 보고도 내 생각을 읽잖아.

“근데 방금 싸웠다면서요. 그럼 승패가 갈린 거 아니에요?”

이제는 그의 표정이 침울하게 변했다. 참으로 표정변화가 극단적이라 보고 있자니 조금 재미있다.

“아쉽게도 승패는 내지 못했어. 으음. 이게 중요한데…… 하나씩 설명해 주지.”

홀랜드가 손가락으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작은 동그라미 세 개를 그려 넣고 그 안에 각자 ‘나’, ‘투제’, ‘마제’라고 글씨를 써 넣었다.

그리고 각 동그라미를 화살표로 이으며 관계도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우리들끼리 싸우긴 했지. 셋이서 동시에 싸우면 정당한 승부가 아닌 것 같아서 한 달 정도 날을 잡고 각자 한 명씩 번갈아 가면서 싸우기로 했어. 그래서 처음엔 투제 녀석과, 그 다음엔 마제 녀석과 싸우기로 했지.”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당황하고 있는 것일까.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숨기고 싶은 비밀을 억지로 말하게 되는 사춘기 소년 같았다.

“으음. 투제는 내가 이기긴 했지. 그 녀석이 강하긴 하지만 기술이고 뭐고 없는 녀석이니까. 꽤 간단했다고 할까? 근데 문제는 마제 녀석이었어.”

“졌군요?”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군. 그래도 나름 선전했다고! 3분이나 버텼으니까.”

3분. 컵라면이 익을 시간이군. 그걸 선전했다고 해도 될까.

“그럼 승부는 난 거잖아요. 마제라는 사람이 최강자다. 아닌가요?”

“아니. 그 녀석은 또 투제 녀석에게 졌다. 너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 이상한 기술을 쓰거든. 마법을 완전 봉쇄하는 기술. 나한텐 통하지 않았지만 마제 녀석에겐 확실히 효과를 본 모양이야.”

나는 그가 그린 관계도를 다시 한 번 보았다. 이제야 그가 승부가 나지 않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투제를 이겼지만 마제에게 졌다. 투제는 내게 졌지만 마제는 이겼다. 마제는 나를 이겼지만 투제에게 졌다. 그래서 승부를 내지 못했다는 거다.”

“가위바위보도 아니고…….”

“응? 그게 뭐지?”

“그런 게 있어요.”

어쨌든 이제 그가 내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내 마법을 깨트리면 마제에게 이길 승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너, 스승과 싸워서 마법을 파훼할 방법을 좀 더 알고 싶다. 내 나름대로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거늘, 스승의 마법은 전혀 흘릴 수도, 부술 수도 없더군. 꼭 마법이 내 몸 속에서 발동한 것만 같아.”

그거 맞는데. 마제라는 분이 어떻게 마법을 쓰는지 몰라도 나랑 싸운다고 해서 딱히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말한다고 이 양반이 과연 포기할까.

“저 같은 어린애를 스승으로 모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물론.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 비록 나보다 어릴지라도 배울 점이 있다면 스승으로 모시는 게 당연한 법. 설마 내가 널 무시하겠냐.”

그런 분이 제 머리를 한 손으로 잡아 드셨습니까. 스승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요.

아무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나보다. 내 입장에선 하루빨리 외부인이 숲에서 사라져 줬으면 좋겠는데.

흐음. 술이라도 마실까. 그럼 폭력적으로 쫓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다. 괜히 흑역사를 더 늘리고 싶지 않아.

“그렇게 수련이 하고 싶으면 그냥 마물이라도 잡으시면 안 되나요? 마물 중에는 마법 쓰는 녀석이 없나요?”

그럼 차선책이다. 나 대신 할 인물을 찾아보자. 마물이면 적당하지 않을까?

게임 속의 몬스터들은 마법도 쓰던데. 이 세계의 마물 중에는 마법을 쓸 수 있는 녀석이 없는 걸까? 마법만 쓸 수 있으면 충분히 연습할 수 있잖아?

“있다. 내가 지금까지 연습한 마법대비책이 설마 생각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그 녀석들이랑 더 싸우시지. 그걸로 연습은 충분하지 않나요? 제 마법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솔직하게 말하자. 그래야 포기할 것 같으니까.

하지만 나는 말하지 못했다. 그에게 떠넘길 차선책이…….

“무슨 소리야. 마물이 전부 사라진 게 언젠데.”

전부 없어졌다는 소리를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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