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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첫 술자리는 자기 주량껏
“자. 그럼 어디 한 번 덤벼 보거라. 검은 뽑지 않을 테니까. 이 아저씨가 싸움을 좋아하긴 해도 너 같은 애한테 까지 휘두를 정도는 아니란다.”
그런 말을 하는 홀랜드의 손은 검 손잡이에 올라가 있었다.
별로 신용이 안 되는 말인뎁쇼. 손이나 떼고 말하시죠.
예전이라면, 오늘 오전까지의 나라면 지금 그의 모습에 쫄아서 아무것도 못했으리라.
분명 ‘싸움은 나쁜 거야. 평화롭게 해결해야지’라고 생각하며 대화로 이번 일을 해결하려 했겠지.
하지만 어째서일까. 몸 한구석에 곤히 잠들어 있던, 또는 꽁꽁 묶여 나오지 못했던 용기가 풀려난 기분이다.
싸우고 싶다. 저 불청객 녀석을 이 숲에서 쫓아내고 싶다.
힘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힘이 깨어나는 기분이다.
“흐음? 대체 언제 시작할거니? 오줌이라도 마려운 게냐?”
나를 도발하는 홀랜드. 그 자신만만하면서 거만한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의 착각을 부서주고 싶은 마음에, 나는 기습하려던 생각을 바꿨다.
“벌써 시작했는데요.”
그의 주변에 존재하는 마력을 한 움큼 집어 모래에 벌레를 가두듯이 꾹 눌러보았다.
몸이 짓눌리는 감각을 느낀 홀랜드가 손을 움직이려 해보았지만, 움찔거리기만 할 뿐 내가 만든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방식이었나. 저 엘프도 신기하지만 꼬마 너는 더 신기하군. 마법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군.”
주절거리는 그가 팔에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힘을 팍 주었다. 예전에 아버지의 꼬리를 잡았을 때만큼 굉장한 힘에 압력을 유지하는데 힘이 부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힘으로 빠져나올 거였으면 아버지도 당하지 않았었다고. 게다가 지금은 왠지 그 때보다 더 성장한 기분이라 결코 놓치지 않을 것 같다.
“힘으로는 역시 안 되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홀랜드가 몸에서 힘을 풀었다. 앞서서 핀과 싸우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내가 이겼다고 착각했겠지만 지금 행동이 제대로 싸우겠다는 뜻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후우…….”
손에 잡은 물고기가 꿈틀거리듯이 홀랜드의 몸이 점차 내 압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장어를 잡고 있는 것처럼 미끌 거리며 벗어나던 홀랜드는 마침내 완전히 빠져나와 내 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 이제 제대로 가볼까!”
“검은 안 뽑는다며!”
검을 뽑고 무자비하게 달려드는 홀랜드의 모습에 방금 전까지 나를 감싸던 용기와 불만이 한 순간에 달아나버렸다.
하지만 이미 물러설 수 없는 일. 나는 숨겨두었던 비장의 수를 써보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어머니께 드리려고 만들었던 쪽지.
읽기만 해도 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르며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준 그 쪽지.
“정지!”
“으잉!?”
내게 달려오던 홀랜드의 몸이 멈추었다.
아까 전에 썼던 압박과 똑같은 효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 없던 홀랜드는 같은 방법으로 내 구속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고수에게 같은 방법을 다시 쓰다니. 이거 참. 아마추어가 따로 없구먼.”
하지만 이번 구속은 다르다. 그것을 홀랜드가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응? 뭐야? 왜 안 되지?”
쉽게 풀 수 없을 거다.
이번 구속이 전과 다른 점은 내부에 있는 상대의 마력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전의 구속은 마력을 조종하는 내가 대기 중에 떠다니는 마력을 응축하여 상대를 붙잡았다. 하지만 홀랜드는 그것을 흘려 내거나 파훼할 수 있었기에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의 몸 속에 있는 마력을 이용한다면?
말하자면 손으로 물고기를 붙잡으면 꿈틀거리고 미끄러져서 빠져나오기 쉽지만, 낚싯바늘로 입 안을 꿰차면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크윽!”
내부의 마력이 모두 소진되기 전에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생명체라면 마력이 생명력과 같으므로, 홀랜드가 이 구속에서 빠져나오려면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할 것이다.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이 마법을 어머니께 전달하려 했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분명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어머니가 피를 보지 않게 하기 위함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때마침 아버지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 예상이 맞을 거야.
『누군가 그녀를 괴롭히는 놈이 있다면 이걸로 구속시키게 하자. 그 다음엔 이 몸이 나서서 죽도록 패줄 테다. 세상에 둘도 없는 죽음을 선사해 주지. 아, 그래. 고문도 해야겠지?』
……그냥 본인 손으로 처단하고 싶어서 그런 거였습니까!
“흐음. 이런 구속이라니…… 그렇다면…….”
이제 모두 끝난 줄 알았는데 홀랜드에겐 다른 방법이 남아 있었나보다.
그가 다시 몸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본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듯이 눈을 감았다.
홀랜드 몸 속의 마력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그를 포기시키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포기하세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지 않겠어?”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모험심 넘치는 소년과 같은 표정으로 내 마법을 파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노력에 보상이라도 받듯이 녀석의 마력이 점차 나의 통제에서 벗어나 구속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딱히 놀랍진 않았다. 왜냐하면…….
“요령을 알고 나니 별거 아니군.”
“그렇게 좋냐?”
내가 풀어준 거니까.
아직 사용할 마법이 많이 남았거든. 고작 그거 하나로 끝나면 오히려 내 쪽이 섭섭하지.
“응? 너, 말투가 뭔가 바뀐 것 같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 줄 알아?”
가슴이 끓어오른다. 분노가 아니다. 그동안 갇혀 있던 내 안의 무언가가 해방되는 느낌이다.
이것이 자유인가.
왜 지금 와서 이런 해방감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분이 좋다.
“뭔데?”
“자기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녀석에게 엿을 먹이는 일이다!”
음. 이 대사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상관없어!
말을 마치는 순간, 나는 마법을 시전했다. 홀랜드가 흠칫하며 내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그의 다리는 이미 얼어붙어 있었기에 달려올 수 없었다.
“대체 뭐야!? 마력이 움직이는 징조조차 느끼지 못했거늘…… 설마 너 같은 꼬마가 마제놈이랑 같은 수준이라는 거야?”
상대를 꽁꽁 얼려버리는 빙계마법. 이것을 사용하는 순간 또 다시 아버지가 이 아법을 만든 저의가 떠올랐다.
『그녀는 꽃을 좋아하니까. 겨울이 되기 전에 이 마법으로 꽃들을 다 얼려버리면 계속 볼 수 있겠지.』
아버지. 핀트가 조금 벗어나셨는데요.
그래도 상관없어!
“크흐흐. 내가 왜 전신을 얼리지 않았는지 궁금하지 않아?”
나도 모르게 악당처럼 웃고 말았다. 기분이 한껏 상승한 게 확실히 느껴졌다. 내 자신이 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이 기분.
그래도 상관없어!
“왜, 왜 그런 거지?”
하반신에서 올라오는 추위에 이를 덜덜 떨면서 홀랜드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평범한 마법이라면 모를까 이번 마법 역시 그의 마력을 이용한 마법이기에 흘려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기쁘다. 이렇게 훌륭한…….
“내 마법을 실험할 허수아비로 쓰려고.”
“뭐!?”
“뇌신(雷神) 강림!”
하늘 높이 손을 치켜들고 주문의 이름을 말하며 아래로 손을 세차게 떨어트렸다. 홀랜드의 몸에 남아 있던 마력이 전기가 되어 그의 전신을 돌아다녔다.
응? 아버지가 알려주신 마법이름이 뇌신강림이냐고?
그럴 리가! 내가 지어낸 거지! 이래야 멋있잖아!
“으어어억!”
『이 마법으로 상대를 지져 버린다면, 필시 기절할 것이다. 그럼 그 녀석을 잘 묶어놓아라. 그럼 내가 나중에…….』
“지옥의 업화!”
“으아악!”
『상대를 태울 듯이 안태우는 이 마법이라면, 죽지는 않겠지만 필시 큰 상처를 입고 기절할 것이다. 그럼 내가 나중에 가서…….』
“죽음의 데스!”
“꺄아아악!”
『아주 그냥 죽일 듯이 말 듯이 생사를 가지고 노는 신이 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이 마법은 상대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곤죽으로 만들 것이다. 그럼 그놈을 잘 보관하고 있으면 내가 나중에 가서…….』
홀랜드의 비명과 아버지의 코멘트를 함께 들으며,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마법들을 계속해서 전개했다.
“후후.”
그리고 그 결과물은 보시다시피 바닥에 쓰러져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홀랜드의 시체…… 가 아니라 살아서 숨만 쉬고 있는 홀랜드만 남았다.
“이 힘이라면…….”
그래. 이 정도 힘이라면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버지는 본인이 직접 상대를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어머니께 알려드린 마법의 위력을 전부 대폭 감소시켰다. 덕분에 홀랜드는 내 마법을 모두 받아내고서도 아직 살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그 누가 몸 속에서부터 발동하는 마법을 막을 수 있겠는가.
“크흐흐. 평화? 웃기지 말라 그래. 힘이 있는데 무슨 평화야. 이제 세상은 내 아래서 재편성 될 것이다. 이 몸의 야망을 위해!”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입에서 저절로 중2병스러운 대사들이 자동응답기처럼 저절로 읊어졌다.
그래도 상관없어! 뭔가 멋있잖아!
“저기, 위그드라실 님?”
하아. 몸이 뜨겁다. 이것은 내 열정이 물리적으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뜨거운 정열의 증거일까? 입을 벌리고 숨을 내쉬면 용처럼 브레스라도 나올 것만 같다.
“후아아아아!”
“……위그드라실 님?”
제길! 역시 나오지 않는군!
하지만 괜찮아. 시도란 언제나 좋은 거니까.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이게 바로 노력이자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 아니겠어?
기분이 좋다. 둥실둥실 떠 있는 기분이야.
가만 보자. 혹시 마법 같은 거 없이 하늘을 날 수도 있지 않을까? 슈퍼맨처럼 하늘을 나는 초능력이 생기는 거야!
“부우우웅!”
아쉽게도 날지는 못하는가. 하늘로 손을 뻗고 슈퍼맨 자세를 취했는데 왜 내 몸은 땅에 붙어 있는가? 혹시 저 하늘이 내가 올라가면 자기한테 오던 모두의 시선을 내게 빼앗길까봐 질투해서 그런 건 아닐까?“위그드라실 님!”
“자꾸 왜 불러!”
“얼굴이…… 많이 빨개지셨는데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얼굴을 만져봤지만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히 평소보다 많이 뜨거운 것 같기는 한데, 그건 내 열정의 증거잖아?
“자요. 여기 거울.”
작은 손거울을 꺼내 내게 들이미는 아라디온.
그 안엔 한껏 익은 사과처럼 빨간 얼굴의 내가 있었다.
“응? 내 얼굴 왜 빨갛지?”
“위그드라실 님. 아무래도…….”
갑자기 세상이 돈다. 나는 멀쩡히 서 있는데 세상이 쳇바퀴마냥 지 멋대로 돈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다.
“취하신 것 같은데요?”
응? 나 술 안 마셨는데? 그건 그렇고 너 언제 그렇게 키가 커졌냐?
아. 내가 누워 있는 건가?
“하아. 설마 술 냄새에 취하실 줄이야…….”
그게 내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