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49화 (14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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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술을 좋아하는 사나이

“뭐하냐! 한 잔 따라봐라!”

거뭇거뭇한 수염이 턱 선을 따라 잔디처럼 자라난 남자는 언제 갈아입었는지 모를 때가 탄 옷까지 합쳐져, 어디 지하철역이나 야산에서 노숙하는 거지처럼 보였다.

좀 더 좋게 말해주자면, 지금 우리가 있는 숲이라는 배경을 더해 ‘자연인’이라고 불러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곰!”

「여기 있다!」

곰이 호리병을 들어 남자의 잔에 술을 따랐다. 곰발바닥으로 용케도 술잔을 잡고 술을 따르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오랜만에 술로 대적할 놈을 만나기 기쁘기 그지없구나!”

단숨에 술을 비운 남자가 이번엔 곰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곰 역시 남자처럼 단숨에 잔을 비우곤 우리가 있는 쪽을 보며 트림을 꺽하고 내뱉었다.

“곰…… 대체 얼마나 마신 거냐.”

“곰!”

「흥겨운 자리를 깨지 마라!」

콧바람을 흥! 하고 뿜으며 곰이 반박했다.

눈꺼풀이 반쯤 감긴데다 눈동자가 완전히 풀린 게 딱 봐도 거하게 취한 모습 그 자체였다.

“고옴…….”

「나를 버릴 땐 언제고…….」

곰은 이젠 술잔으로는 만족 못하겠는지 병나발을 입에 물고 술을 들이켰다. 입가로 술이 줄줄 흘러나오며 냄새가 확 퍼졌다.

팔로 입가에 흘러나온 술을 닦으며 곰이 말했다.

“곰!”

「이제 와서 챙겨주는 척이냐!」

……역시 예상대로 삐져 있었다.

나도 할 말은 많았다. 데리고 가고 싶어도 곰은 곰(?)이라 데리고 갈 수 없었다고.

괜히 데리고 갔다가 도시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으면 어쩔 뻔했어.

하지만 그대로 말했다간 더 삐질 것 같아서 속마음을 감췄다.

“곰. 미안해. 다음엔 꼭 데리고 갈게. 그러니까 술 좀 그만 마셔.”

“곰…….”

「으음…….」

용서해 주는 걸까? 잠시 생각에 잠긴 곰이 감겨오는 눈꺼풀을 열심히 밀어 올리며 내게 말했다.

“곰?”

「선물은?」

……선물이라.

선물…… 못 샀는데. 열심히 도망쳐 나오기도 바빴는데 선물은 무슨 선물.

빈손을 보이기 싫어 뒷짐을 진채 꼼지락 거리자 곰이 눈치를 챘는지 또 한 번 콧방귀를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곰.”

「그럴 줄 알았다.」

“잠깐. 곰.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그럴 줄 알고 선물을 준비해 왔습죠!”

내가 변명이라도 하려는 찰나, 아라디온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역시 아라디온. 처음엔 못미더웠는데 이젠 신뢰가 붙어서 그런지 믿음직하구나! 선물은 또 언제 준비했어!?

“자. 루카스 왕국 특산품입니다.”

아라디온의 손 위에 올라온 루카스 왕국의 특산품.

고운 선이 완벽한 원을 그리고 있는 둥근 색의 물건은, 고운 사포로 문지른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털 하나 묻지 않은, 때 묻지 않은 깨끗한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에 안식을 가져다준다.

애완동물? 아니. 한때 지구에서 유행한 적이 있지만, 이곳에선 애완동물이라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애정을 다해 기른다면 분명 언젠간 보답을 해줄지도 모르는 그 물건.

“고오오옴!”

「그게 뭐냐아아아!」

바로 돌이였다.

본인도 민망한지 차마 곰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봐도 나랑 곰이 대화하는 동안 주워온 것 같은 작은 돌멩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라디온 손 위에서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이, 이건 그냥 돌이 아닙니다! 루카스 왕국 특산품인 애완돌입니다!”

애완돌이라. 나름 머리를 썼군.

지구에서도 그런 식으로 돌을 애완용이라며 팔아치운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에서 꽤나 유행했었다지?

다른 애완동물이랑 다르게 먹이도 안 들고 산책시킬 필요도 없어서 현대인들에게 상당히 인기품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은 특이한 물건이라 잠시 유행을 탔던 것에 불과했지만.

“곰!”

「돌을 어떻게 키우냐!」

“왜요. 잘 쓰다듬어 주고, 이끼가 안 생기게 물기도 제거해 주고…….”

“아라디온. 그만해. 안 통하는 것 같으니까.”

“예…….”

아라디온이 돌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곰이 그 모습을 보더니 다시 한 번 술을 들이켰다.

너 그렇게 많이 마셔도 되는 거냐.

“곰! 곰곰! 곰곰곰!”

「흥! 이제 나는 형님을 따를 거다! 다른 가족보다 형님이 차라리 백배 낫다!」

“형님이라니. 설마 저 사람?”

앞에 앉아서 함께 술을 들이키던 남자는, 우리의 시선이 쏠리자 안주로 굽고 있던 정체불명의 고기를 한입에 덥석 물었다.

“응? 아. 곰이 날 형님으로 모신다고 하든? 그거 좋네. 제대로 된 아인족 친구가 있었으면 했는데.”

“아인 족이라뇨. 곰은 그냥 야생 곰인데요.”

나도 모르게 몸에 베인 습관 때문에 태클을 걸어버렸다.

어딜 봐서 곰이 아인족이라는 거야. 아인의 인(人) 자가 뜻하는 사람 모습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에이. 설마. 아인족도 아닌 평범한 곰이 사람 말을 이렇게 잘 알아들을 리가 없잖아.”

그게 무슨 말일까? 아인 족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지라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응? 반응들이 왜 그래?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아인족은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잖아. 그래서 아인족인 줄 알았는데. 설마 진짜 곰이었던 거야?”

“그게 정말인가요?”

처음 듣는 정보에 흥미가 동했다. 아인 족에 대해 아는 게 없다보니 그가 하는 소리가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아인족은 갓 태어났을 땐 평범한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 그리고 자라나면서 점차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게 일반적인 아인족의 성장인 거야. 다만, 딱 한 가지 바뀌지 않는 게 있는데 그게 바로 귀와 꼬리지. 그래서 이 곰 녀석도 아직 어린 아인족인 줄 알았는데.”

성장해 가면서 인간의 모습을 갖춘다라.

그럼 어렸을 땐 완전히 동물이다가 사춘기쯤 되면 반인반수가 되고, 성인이 되면 꼬리랑 귀만 남는 건가?

……완전 모에 캐릭터잖아?

“곰!”

「어쨌든 난 이제 형님을 따를 거다!」

자리를 옮겨 남자 옆으로 이동한 곰이 우리를 분노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남자는 오히려 그런 곰의 행동이 더 마음에 드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뭐라 하는진 모르겠지만 거 참 마음에 드는군! 주변에 술 한잔 제대로 못 마시는 녀석들 투성이었는데!”

“곰!”

「형님! 한 잔 받으시죠!」

둘이서 아주 좋아라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그때, 뒤에서 그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던 핀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아빠.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저 사람. 누구예요?”

모두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곰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곰이야 뭐, 늘 삐지고 토라지는 게 일이니까.

그런 것보다 지금 중요한 건 침입자인 저 남자가 아니었을까?

“고오옴!”

「나를 무시하지 마라!」

우리의 표정을 읽은 것일까. 곰이 버럭 화를 내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핀이 쿨하게 그런 곰을 무시하고 의문의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음? 참 빨리도 물어보는군.”

“곰!”

「무시하지 말라니까!」

“나야 뭐, 그냥 이리저리 세상을 떠돌며 수련하는 모험가랄까. 이 숲에 광룡이 산다기에 한 번 싸워보고 싶어서 와봤지.”

“광룡과…… 싸워보고 싶다고요?”

“곰?”

「내 말 안 들리냐?」

“그래. 예전에 내 제자가 이곳에 와서 패배했다고 들었거든. 그때 평범한 엘프에게 졌다고 했는데…… 여기까지 오면서 요즘 소문을 들어보니까 평범한 엘프가 아닌 것 같더라고.”

남자가 칼을 뽑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 누구도 그가 칼을 뽑는 모습을 막지 못했다.

“너지? 그 광룡이라는 소문의 주인공이.”

핀과 필로우가 긴장한 채 사내에게 경계심을 품었다.

방금 전까지 태평하게 술을 마시던 모습과 다르게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투기가 느껴졌다.

“곰!”

「아니, 진짜! 내가 무슨 투명인간이냐!」

……애처로우니까 그만해.

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눈을 붉게 물들이며 남자를 계속 경계할 뿐이었다.

“흠. 속지 않는군. 투기와 살기는 구별할 줄 아는 건가.”

남자가 다시 검을 내렸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채 핀과 아라디온을 번갈아 가며 살펴보았다.

“근데 저 뒤에 있는 남자도 강해 보이는데. 둘 중 누가 광룡이지? 듣기론 여자 엘프 쪽이 광룡이라 들었거늘. 애매하구만.”

“아니. 잠깐만요!”

나는 뭔가 살벌해지는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이야기 사이에 끼어들었다.

다행이 일이 터지기 전에 그들의 시선을 잡아둘 수 있었다.

“갑자기 왜 싸우시려는 거예요.”

“응? 방금 말했잖아. 수련이라니까. 강한 녀석과 싸워야 뭔가 강해진 느낌이 들어서 말이지. 최근엔 그런 녀석은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간만에 단련 좀 하려고.”

“아니, 그것보다 당신은 누구신데요. 아까부터 계속 물어봤는데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잖아요.”

“아. 그러네.”

씻지 않아 까치집이 진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난 남자는, 우리들을 보며 귀찮다는 듯이 자신을 소개해 주었다.

“나는 홀랜드 S. 브라이든. 그냥 평범한 모험가다. 아까도 말했듯이 그냥 한 번 싸워보고 싶어서 온 것 뿐이니까 너무 경계하지 말라고.”

“홀랜드…… 홀랜드!?”

그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일까. 이름을 몇 번 되 뇌이던 아라디온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설마 그 천검이라 불리는 모험가!?”

“아. 그…… 건 너무 말하지 말라고. 창피하니까.”

낯간지러운 소리를 들었다는 양 남자, 홀랜드가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얼굴이 목까지 빨개진 것은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런 것일까.

그런 홀랜드의 태도와는 관계없이 아라디온이 설명충이라도 빙의된 것처럼 계속 그에 대한 신상정보를 줄줄 외웠다.

“역대 최고의 모험가 세 명 중 한 명이자, 검술의 대가이며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은둔 고수의 표본이라 불리는 사내. 역대 최강이지만 역대 최악이라 불릴 정도로 술을 좋아하며 그와 친해진 이들은 하나같이 간이 망가져 사경을 헤매게 된다는, 일명 간을 망가트리는 킬러!”

“에이 참. 민망하게스리.”

저기, 마지막은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아라디온. 그런 건 대체 어디서 조사한 거야.”

“아가씨가 무투대회에서 싸울 상대에 대해 조사하면서 같이 얻었죠. 당연히 우승이라 생각하고 투제에 대해서 조사해 봤거든요.”

응? 그게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투제랑 저 양반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지?

그때였다. 나의 기억력이 온 힘을 다해 무투대회에서 들었던 한 단어를 쥐어짜냈다.

“마제. 투제. 천검…… 잠깐. 설마!”

“예. 그렇습니다.”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워하는 홀랜드를 보며 아라디온이 말했다.

“저자가 바로 전설의 모험가 중 한 명. 천검(天劍) 홀랜드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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