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47화 (14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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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뱀(외전)

그에게 소란은 익숙했다.

세상 모든 것이 용기만 있으면, 굳은 신념만 있으면 해결될 것이라는 젊었을 적 치기어린 시절에도 한바탕 소란을 겪었었고, 가족을 잃고 사람들의 아우성이 여름날 폭풍처럼 자신을 맴돌 때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자의 딸을 만나고, 그녀와 강제적으로 재혼했을 때도 소란은 늘 그의 곁에 있었다.

린셀이 집무실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어두침침한 방안을 만드는데 일조한 커튼을 살짝 걷어 밖을 내다보면, 여전히 시민들이 팻말을 들고 저택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실을 밝혀라!』

시민들은 벌써 이틀 째저택 앞에서 농성중이다.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걸 린셀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런 마음으로 린셀은 언제나 소란을 견뎌냈다.

이번에도 그렇게 쉽게 지나갔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건 무리라고, 불가능하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끝인가.’

최후의 최후. 마지막까지 염두에 두던 만약의 상황이 막상 벌어지자 신기하게도 마음이 차분했다.

언제나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미리 상상으로 대비할 때는 가슴이 벅차고 땀이 흥건하게 날 정도로 긴장되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차분했다.

마치 지금 벌어지는 상황들이 모두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책을 읽는 것처럼 모든 일이 이야기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책을 읽는 독자라고 느꼈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일 뿐, 나와는 관계없다. 한 발짝도 아닌, 한 차원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약간의 흥미가 있을 뿐, 책을 덮으면 지금 일들도 모두 머릿속에 잠시 동안 맴돌다 사라질 것이다.

편한 마음으로 커튼을 다시 치고 자리에 앉았지만,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린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힘들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무섭고 두려웠다.

“에반슈트 님. 손님입니다.”

“……들어오세요.”

입술을 깨물고 린셀이 출입을 허가했다.

누군가가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는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에 책상 서랍을 만지작거리며 그 안에 있는 뱀 한 마리를 꺼낼지 말지 고민했다.

‘지금 꺼내면…… 들키겠지?’

꽤나 오래 전에 시장에서 구입한 뱀이었지만, 여전히 윤기 있고 튼튼한 녀석이라 지금도 새 것 못지않게 쓸 수 있었다.

그것은 진짜로 뱀이 아니었지만, 린셀은 뱀으로 부르고 있었다.

『어서 나를 꺼내줘. 뭐하고 있어?』

어린 시절, 동화 속에서 주인공을 유혹하는 등장인물은 항상 뱀이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순히 혐오스럽게 생겨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린셀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록 그 이유가 짜 맞추기 같은 억지였지만, 뱀처럼 생긴 그것을 산 순간부터 언제나 끊임없이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에반슈트 공.”

멍하니 서랍을 바라보던 린셀이 손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많이 본 얼굴이다. 신문에서 봤던가? 유명한 비평가였던 것 같지만 정신이 몽롱해서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번 사건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 좋습니다. 네. 무엇이 궁금하신지요?”

“하!”

손님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린셀도 그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었기에 딱히 그런 행동을 지적하지 않았다.

설사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에게 더 이상 누군가를 지적할 여유는 없었다.

그 후로 손님은 이번 사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찌나 지독하게 캐묻던지 린셀은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 사생활까지 모두 파헤치려는 도굴꾼처럼 느껴졌다.

『뭐해. 날 쓰고 싶지 않으면, 그냥 저놈한테 써버려.』

“시끄러워.”

『어차피 모두 끝났잖아. 사람 하나 죽인다고 해서 더 이상 네 평판이 떨어질 일도 없어. 마지막인데 한 번쯤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지?』

“시끄럽다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린셀이 헛기침을 하며 손님을 보았다. 갑작스러운 호통에 손님 역시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뇨. 이해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 후에 손님은 조그맣게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고 있다’라며 수첩에 적었다.

과연 그것이 필기할 때의 그의 습관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인지 린셀은 알 수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끝나고 혼자 어두운 집무실에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럼 감사합니다. 지금 말씀하신 내용은 내일 자 신문에 실릴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예. 잘 알겠습니다.”

긴 시간이 흘렀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최근에 벌어진 사건에 관한 심정까지.

손님은 그 모든 걸 약탈해 가듯이 수첩에 적어갔고, 내일 벌어질 일들을 기대하라며 통보하듯이 말하곤 집무실에서 사라졌다.

마침내 혼자 남은 린셀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천장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없었기에, 집무실 옆에 딸려 있는 작은 창고로 몸을 옮겼다.

“여기는 있군.”

다행히 창고에는 그가 찾던 물건이 있었다.

의자를 가져와 올라가 손을 뻗어보니, 다행히 그것에 손이 닿았기에 그는 만족하며 불안한 한숨을 내쉬었다.

“뭐하십니까?”

“윽!?”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떨어지는 린셀.

다행히도 그를 떨어트린 목소리의 원흉이 그를 재빨리 받아 들어서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아. 로베르토. 고맙네.”

“……대체 창고에서 뭐하십니까?”

“그냥 잠시 위에 뭐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살펴보고 있었네.”

린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런 식으로 이 아이와 대화하는 게 몇 년 만이더라.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린셀은 지금 상황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즐거운 시간을 허튼 생각으로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로베르토. 무슨 일인가?”

“알고 계실 텐데요. 작금의 상황을. 설마 그런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타락하신 겁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원하던 즐거운 대화는 시작도 되기 전에 좌초해 버렸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제 두근거림 따윈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 친구와 닮은 로베르토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흥분감에 그런 걸까. 아니면 그 친구와 닮은 로베르토에게 매도당할 두려움 때문에 그런 걸까.

“이번 사건에 대해 세렌에게 모두 들었습니다.”

“순순히…… 다 말하던가?”

목소리가 떨린다. 대체 어디까지 들은 걸까?

그에게 매도당할 거라는 생각에 린셀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눈을 다시 떴을 때, 그는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 멈추는 것만 같았다.

로베르토의 경멸어린 시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말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아버지와 찍으신 사진. 다시 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중한 부탁의 탈을 쓴 강요. 린셀은 체념하며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냈다.

그 친구와 찍었던 자신의 유일한 사진이자 보물이 그의 손에서 떠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친구의 아들에게 넘어간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감사합니다.”

모두 알고 있다. 린셀은 로베르토의 차가운 눈동자를 보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로베르토는 사진을 건네받자마자 잘게 찢어버렸다. 린셀의 마음 역시 그와 동시에 찢어져버렸다.

떨어지는 사진 조각을 보며 그가 축축해진 눈가를 소매로 닦았다.

“제발 역겨우니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당신은…….”

뒷말을 삼키는 로베르토. 차마 린셀의 정체를 알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친구에게 독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아버지를 욕보이게 한 자라 할지라도. 로즐리 가문의 피가 그에게도 이어져 있다는 증거일까.

『더는 못 참겠어? 그냥 꺼내. 이제 때가 온 거야. 그만 망설여. 뭘 더 망설이고 있는 거야?』

린셀이 서랍으로 눈을 향했다. 뱀의 속삭임이 더욱 커졌다.

“뭐 더 있으십니까?”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로베르토가 서랍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물건을 보더니, 바로 닫아버렸다.

“…….”

린셀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신의 서랍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세렌도 한 번 그의 서랍을 들여다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체 이런 걸 왜 넣어둔 거죠?’라며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과연 로베르토라면 자신을 이해해 줄까? 그리고 서랍 속의 악마를 꺼내어 방금 찢은 사진처럼 갈갈이 찢어주지 않을까?

그렇게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와 동시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서랍 속의 물건을 들키는 바람에 다시는 그것을 시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몇 번 시도하려고 마음먹었었지만, 번번이 용기가 없어서, 미련이 남아서 미수로 그쳤다. 하지만 그 미수조차도 이제는 시도할 수 없을지 몰랐다.

천 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로베르토의 입술이 떨어졌다.

“어쩌면 그게 바른 행동일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이 지금 처한 상황을 타계하려면…… 죗값을 치르려면 말이죠.”

매정하게 문으로 나서는 로베르토가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부디 유서에 저희 아버지 이름은 남기지 마시길. 저희 아버지까지 구렁텅이로 끌어들이지 마시라는 뜻입니다.”

문이 닫혔다.

린셀의 마음도 함께 닫혔다.

이제 드디어 결심의 때가 온 것이다.

홀로 남은 방 안에서, 그는 미적거리며 조용히 침묵을 즐겼다.

빠르게 행동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기다리며 그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해가 지고, 저녁이 다가왔다. 아무도 자신에게 식사를 하라며 오지 않았다.

그는 죄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특히나 세렌이 모든 것을 말한 게 확실했다.

그러니 로베르토가 사진을 찾아 찢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녀는 내 동료라고 생각했거늘.’

세렌에게서 나름 동질감을 느꼈다. 그녀 역시 자신과 같았으니까.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 혐오하기 그지없는 존재들.

하지만 그런 동질감은 린셀만 느꼈을 뿐, 세렌은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모든 상황을 이 지경으로 이끌었다.

‘도리스는 어떻게 됐을까.’

상당히 재능 있는 친구였는데. 하지만 귀족인 자신조차 그것을 들키자마자 경멸의 눈초리를 받았다. 귀족도 아닌 한 낱 비서이자 하녀장인 그녀의 말로가 어떻게 될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과연 그것을 들킨 게 더 큰 죄일까.

아니면 세렌이 권력을 휘두른 게 더 큰 죄일까.

린셀이 서랍 안에서 뱀을 꺼냈다. 죽은 듯이 축 늘어진 뱀이지만, 곧 팽팽하게 당겨지며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릴 것이다.

창고로 이동한 그가 눈여겨 본 그것에 뱀을 묶었다. 몇 번 당겨봤지만 뱀은 튼튼했고, 늙은 자신의 육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자. 그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망설이며 계속해서 문 쪽을 보던 그가 마침내 뱀에 몸을 맡겼다.

그의 예상대로 뱀은 꿈틀거렸고, 살아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린셀과 함께 그 움직임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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