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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2)
“어제 하신 이야기. 다 들었어요. 이 가문을 집어 삼킬 생각이시죠?”
세렌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소리가 들릴까 봐 가슴을 움켜잡았다. 곧바로 도리스가 밖으로 나가더니 좌우를 살피고는 문을 잠갔다.
도리스가 세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아무도 없다는 신호였다.
조금은 가슴이 진정된 세렌이 다시 미소를 띠었다.
누군가에게 명령이라도 받은 것일까? 아직 어리디어린 아이가 입에 담을 말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잘 어르고 달래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런 치졸한 방법으로 공격을 가한 뒷배를 철저하게 파괴해 주리라.
“응?”
뭔가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배웠던 예의범절은 전부 까먹은 것일까.
세렌은 위그드라실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눈에 걸렸다.
“샤일록. 이야기할 땐 주머니에서 손을 빼야지.”
“아, 네.”
바로 말을 듣고 손을 빼는 모습에 세렌이 작게 웃었다.
역시 아이들은 다루기 쉽다.
그러니 지금처럼 이상한 말을 가르치는 것도 쉬울 것이다.
“그런 말, 누가 알려줬니?”
“누가 알려준 게 아니에요. 연회장에서 들었어요.”
“누구한테?”
세렌이 재차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물음은 모두 자신의 추측을 전제로 한 일방적인 물음이었기에,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대신 연회장에 있었던 그녀의 기억을 자극하는 대답이 그녀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당신이요.”
“뭐?”
“당신이 직접 말해줬잖아요. 거기 있는 도리스랑 이야기 나누면서.”
극심한 현기증이 몰아닥치며 세렌은 영혼이 뒤로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바로 앞에 있는 위그드라실의 모습이 점차 작아지며 몸이 붕 뜨는 느낌에 잠시 멍하게 있었지만, 옆에서 도리스가 건드리자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설마 숨어서 엿들은 거니? 좋지 않은 버릇이구나.”
“세렌!”
“괜찮아. 걱정하지 마.”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혐의를 시인하는 모습에 당황한 도리스와 달리, 세렌은 별 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여기서 말리면 안된다. 오히려 당당하게 나가는 쪽이 훨씬 더 유리하다는 것을 세렌은 잘 알고 있었다.
“어디서 엿들었는지는 몰라도 내게 물어보려고 오다니. 꽤나 어리석구나.”
“왜 어리석다는 거죠?”
“설마 내 약점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아니면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온 거야?”
위그드라실이 고개를 내저었다. 세렌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순진한 아이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의 진실을 알고 싶어 이곳에 온 것이었다.
세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뇨. 아무한테도 아직 말 안 했어요.”
“아직? 흐응. 그렇구나.”
고혹적인 콧소리를 내며 세렌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위그드라실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인자함이나 다정함 따위는 없었고, 적을 바라보는 적개심과 모자란 바보를 보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왜 내게 그 말을 하러 온 거지?”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어요. 린셀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린셀이 왜? 그 영감한테 내가 뭘 했다고?”
잠시 망설이는 위그드라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했는지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위장결혼이잖아요. 사랑하지도 않으시면서 전부 이 집안을 삼키려고 한 가짜 결혼. 아닌가요?”
이제는 더 이상 발뺌을 할 수 없다.
이 아이는 모든 것을 알고 온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세렌도, 도리스도 마음속에 감춰두었던 자신들의 비밀을 꺼내며 위그드라실을 압박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계획이 성공했지만 아직 밝혀져서는 안 된다. 최소한 몇 년간은 이 아이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한다.
“그런 노인네를 나 같은 젊은 사람이 사랑할 리가 없잖아. 이렇게 예쁜 사람이 곁에 있는데.”
“세렌…….”
도리스를 자신 옆에 앉힌 세렌이 계속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래. 맞아. 린셀이랑 결혼한 것도 전부 가짜야. 그 인간의 약점을 조금 잡아 비틀어줬지. 그랬더니 내가 원하는 대로 결혼하자고 하더라고.”
위그드라실이 뜻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 린셀의 약점이라니. 뭔가 일이 있었던 걸까?
“뭔지 궁금해? 사실 말이야. 린셀은…….”
“세렌. 그 이야기는 안 하기로 했잖아. 우리 자신을 상처 입히는 짓이라고.”
“…….”
그 약점에 대해 세렌이 이야기하려 했지만 도리스에 말에 세렌이 입을 다물었다.
그것에 대해 넘어간 세렌이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내가 이 집안의 실권을 잡는다는데 뭔가 문제라도 있어?”
“그건 옳은 일이 아니잖아요. 린셀을 마음대로 조종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권력을 휘두르다니. 그게 정말 옳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내가 묻지. 넌 지금 이 가문이, 린셀이 정상이라고 생각해?”
위그드라실은 반론할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해도 린셀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위그드라실을 보며 세렌이 웃었다.
“거봐. 아무 말 못 하잖아. 그런 사람을 대신해서 내가 일을 해주겠다는 건데 뭐가 문제야? 그리고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지?”
여기서 완전히 승기를 잡기 위해 세렌이 위그드라실의 약점을 말했다.
“너도 진짜 후계자가 아니잖아. 내 말, 틀렸어?”
“…….”
그녀가 위그드라실의 고발에도 침착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네가 후계자가 아니란 건 벌써 알고 있었어. 너는 나와 같아. 내가 몰락하면, 너도 몰락하는 거야. 알아? 네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퍼트리는 순간, 너에 대한 것도 내가 퍼트릴 거거든. 나야 그래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겠지. 이래 봬도 나 역시 귀족이니까.”
거짓말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귀족가문의 출생이라도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자리에서 끌어내려지고, 모든 것을 잃고, 재판을 거쳐 감옥에 들어가겠지. 그곳에서 지금의 아름다움과 청춘을 잃게 될 것이고, 풀려난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멸시와 비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협박할 땐 절대로 약점을 보여선 안 된다. 세렌은 그 규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런데 너는 어떨까? 네가 이 사실을 알리고, 가짜 후계자라는 사실이 들통 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마 귀족도 아닌 네 녀석은 귀족 사칭죄에 자신들을 능멸했다는 다른 귀족들에게 큰일을 당하지 않을까?”
세렌이 위그드라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턱을 손끝으로 치켜들었다.
“어쩌면 너는 곱상하니까 다른 귀족들이 몰래 빼갈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여자처럼 길러지고, 여자처럼 대해지겠지.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니?”
“……어렴풋이요.”
세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협박이 먹혀 들어간 것이다.
이제 채찍은 충분히 휘둘렀으니 당근을 줘야 한다.
그리고 동질감을 형성하여 공범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머리 꼭대기에는 자신이 올라가 있겠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아무한테도 그때 들었던 비밀을 말 안 하면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우리는 비슷하잖아? 나는 권력을, 너는 귀족이 되기 위해 속임수를 살짝 썼을 뿐이야.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
세렌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회유를 하며 위그드라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그를 껴안아 주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또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는 위그드라실을 보며 세렌이 이마를 찌푸렸다.
“다른 사람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는 건 예의가 아니지. 너도 귀족이 되려면 그 정도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어?”
대체 지난 삼 일간 예의를 가르친 선생은 뭘 한 것인가.
세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위그드라실이 주머니에서 한 물건을 꺼냈다. 광룡의 던전에서 가져왔던, 벨루스가 연설을 위해 준비했던 마법도구였다.
“저도 알아요. 그냥 전원을 끄려고 넣었을 뿐이에요.”
위그드라실의 손에 들린 물건이 무엇인지 세렌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모양새를 떠올릴 수 있었고,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무투대회에서 목소리를 증폭시켜주던 도구와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너, 너 그거 설마!”
“맞아요. 마이크예요. 아, 여기선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네요. 정확히 말하면 주변에 저희가 나눈 이야기를 다 퍼트렸다고 해야겠네요.”
“거짓말이야! 아무런 소리도 안 들렸어! 세렌! 속지 마!”
그것이 정말로 대화를 주변에 퍼트리는 마법도구라면, 방 안에 있는 자신들도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도리스가 속지 말라며 소리쳤지만, 위그드라실이 곧바로 반박했다.
“이게 만져보니까 설정이 좀 있더라고요. 반경 몇 미터 이상부터 적용이 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하긴, 그런 게 없으면 말하는 자기한테도 목소리가 울릴 테니 불편하겠죠?”
그 말을 끝으로 위그드라실이 창가로 달려갔다. 세렌이 그를 잡기 위해 뒤따라갔지만, 창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와 세렌보다 먼저 위그드라실을 낚아챘다.
복면을 쓰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핀이었다.
“그리고 저는 처벌 따위 안 받을걸요? 도망칠 거니까!”
그 순간, 복도 쪽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도리스가 몸으로 막으려 했지만, 성난 귀족들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꺄악!”
“드디어 꼬리가 잡혔구나! 이 요망한 년!”
도리스의 비명에 세렌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차 하는 심정으로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위그드라실은 사라진 뒤였다.
“이, 이건…….”
귀족들이 세렌의 곁으로 달려왔다. 쓰러진 도리스 역시 다른 귀족들의 손에 이끌려가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세렌이 중얼거렸다.
“꿈이야…….”
* * *
“아빠.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위그드라실이 핀의 등에 업혀 에반슈트 저택을 빠져나왔다. 밖에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다른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시민들이 위그드라실의 도구로 인해 이야기를 듣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귀족들에게 직접적으로 따지기 위해 왔다기 보단, 그냥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냥 떠나면 될 걸, 왜 굳이 이렇게 파고든 거예요? 그냥 놔둬도 상관없었잖아요.”
아직 사람은 많지 않았기에, 인적 드문 곳으로 빠져나가며 핀이 물었다.
“그래도 됐지. 근데…… 내가 살던 곳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거든.”
“지구요?”
위그드라실의 기억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핀이 되 물었다. 지구에서 이런 비슷한 일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아쉽게도 핀이 받은 기억에는 그 내용이 없었다.
“응. 꼭두각시를 앞세우고 뒤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사리사욕을 채우던 사람이 있었지. 비선실세라고…….”
위그드라실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뭔가 숲으로 돌아가면 작은 자동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는 생각했다.
에이. 여긴 이세계잖아. 설마 여기까지 보낼라고…….
숲을 생각하자 위그드라실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너무 오랫동안 집 밖을 나다닌 것 같아서 일종의 향수병이 도진 것이다.
이제는 숲이 그의 집이자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너무 피곤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