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1)
“정말이야? 도리스?”
“그럼요. 이번에 새로 나온 신상품인데 제게 써보라고 미리 줬다니까요.”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린셀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싸늘하다고 해야겠다.
“나도 나도! 나도 써볼래!”
“저택에 돌아가면 바로 드릴게요.”
화기애애한 대화는 세렌과 도리스 두 사람뿐이었다. 그들은 연회가 끝나자 목적을 달성한 악당이 파티라도 벌이듯 전보다 더욱 친밀한 모습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
그와 반대로 린셀은 연회가 끝나자 전보다 더 기운 없고 침울해 보였다.
이 사람이 정말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노신사와 동일인물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후후. 날도 저물었는데 올 때, 알지?”
“혹시 오늘부터 그 방에서…….”
거울 너머로 세렌과 도리스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면 지금 대사에 담긴 뜻을 몰랐겠지만, 이제는 저 대사가 얼마나 음탕하고 더러운 단어인지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그 행위(?)가 더럽고 음탕하다는 게 아니다.
바로 옆에 남편을 두고 말하는 그녀의 심성과 행동이 더럽다는 뜻이었다.
린셀은 과연 지금 옆에서 떠들고 있는 자신의 어린 신부가 벌이고 있는 행동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긴 세월을 한 가문의 수장으로 지내고, 오랜 경험을 쌓은 연륜이 있는데 설마 모르고 있지는 않겠지.
나는 거울 속 린셀이 보고 있던 사진을 떠올렸다.
로베르토에게 머리를 심어준 것 같은 청년과 다정하게 찍은 그 사진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봐선 안 된다.
내막이 궁금하지만, 린셀의 눈물을 떠올리자 괜스레 아픈 상처를 덧내는 것 같아 궁금해하고 싶지 않았다.
연회장으로 갈 때 품었던 의심의 싹이 완전히 만개했다. 더 이상 이전의 시선으로 린셀과 세렌을 볼 수 없었다.
내 마음 속에서 세렌의 모습은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는 미수범에서, 불륜을 저지르고 나를 통해 용사의 가문을 뒤에서 조종하려 하는 악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내 마음 속에서 린셀은 인자한 노신사인 동시에 용사의 후손인 고위 귀족 가문의 가주에서, 무기력하고 모든 일에서 손을 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우울증 환자가 되어 있었다.
“어머. 샤일록. 주머니에 뭐 들었니?”
그때였다. 세렌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한테 관심도 없더니만 하필이면 조금 가져준 관심이 내 주머니라니.
“그냥 종이에요.”
“으음.”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쪽지들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거의 그림을 그리듯이 쓴 아버지의 글씨체에 맞춤법도 여기저기 틀려 있어서 그런지 세렌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돌아가면 공부를 좀 더 해야겠구나. 못 알아보겠어.”
그것을 끝으로 세렌이 쪽지를 돌려주고는 다시 도리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휴. 다행이다. 쪽지로 끝나서.
꽤나 가슴 졸이는 순간이었다. 혹시나 세렌이 내 주머니를 뒤지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져온 물건의 감촉을 느꼈다. 다행히 주머니 속에 잘 들어 있었다.
모든 진상을 파악한 순간, 나는 한 가지 계획이 떠올랐다.
다만 실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큰 고민이 되었다.
‘하아.’
저택으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 * *
“아빠. 다녀오셨어요.”
“응…….”
“왜 그렇게 기운이 없으세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큰 거사(?)를 치루고 온 터라 온 몸에 기운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난 괜찮아……. 그나저나 얘들아. 혹시 지내면서 불편한 일 없었니?”“으음. 딱히 없었는데요?”
“밥이 맛없다거나, 이상한 게 들어있지는 않았어?”
“으음. 가끔 벌레가 나오기도 하고, 머리카락도 나오고, 상한 게 나오기도 했는데 잘 골라먹었어요.”
“……방이 춥다거나 하지는 않았고?”
“으음. 이불 덮고 자니까 괜찮던데요. 게다가 저희 튼튼하다고요.”
“……그러니.”
이럴 때 눈치가 둔한 게 참으로 도움이 되는구나.
그래. 악의(惡意)를 품고 누군가에게 공격당했다 하더라도, 본인이 행복하면 아무런 피해도 없는 거로군.
이것이 고승들이 말하던 득도(得度)이자 깨달음인가.
“왜 그러세요?”
“아냐. 아무것도.”
아이들이 멀쩡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나는 내일 벌어질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핀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그럼 내일 숲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아마도. 그러니까 미리 준비하고 있어.”
“알았어요.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왜?”
“혹시 모르잖아요. 그 여자가 아빠를 공격할지도.”
“괜찮아. 그럼 오늘은 피곤하니까 돌아갈게.”
딱히 위험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핀은 내가 다칠까봐 걱정이 됐나보다.
하지만 나 역시 마차에서 모두 계산한 일. 세렌은 결코 나를 공격하지 못한다.
왜냐고? 내가 없으면 그녀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거든.
그녀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언젠가 내가 쓸모없어지게 되는 날이 오면 토사구팽(兎死狗烹)당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일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녀는 내게 손을 댈 수 없다.
“히잉.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지…….”
“의심받으면 안 되잖아? 그럼 잘 자.”
“네…….”
아이들에게 인사를 마친 뒤, 내 방으로 돌아오자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역시 오늘 너무 무리한 것 같아. 방구석 폐인인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인사를 하게 되다니.
일주일치 에너지를 전부 거기서 소모한 것 같아.
“후우.”
침대에 눕자마자 눈을 감았다. 바로 잠이 올 줄 알았는데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보니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 일이 벌어지고 나면, 이 가문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일 떠날 사람인 내가 그런 일을 벌여도 되는 것일까?
“그래도…….”
하지만 그런 꼴을 그냥 보고 지나치고 싶지 않다.
린셀에게 큰 피해가 가겠지만, 썩은 살을 도려내지 않으면 전체가 썩어버릴 테니까.
아마 그라면 잘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해야겠지……?”
확답은 내릴 수 없었다. 린셀의 상태는 위태위태했으니까.
그의 무기력함이 이번 사태의 충격으로 해결될 것인지, 아니면 더더욱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한다면, 더더욱 비참한 삶을 살다가 생을 끝마치겠지.
“모르겠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번 일은 반드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최고의 귀족이라는 가문이 모든 귀족들의 분열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된다면, 앞으로 이 나라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귀족이란…….’
갑자기 로베르토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귀족이란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을 책임지는 것이 귀족이라고.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기도 하고, 안 왔으면 좋겠기도 하고.
박쥐도 아니고 심란하다 심란해.
* * *
“우후후.”
이른 아침부터 세렌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 평소 잘 부르지 않던 콧노래를 불렀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순간이 어제부로 거의 마무리되었으니 마치 두 번째 생일을 맞이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혼자 방을 쓰는 게 이렇게 기쁘다니.”
거기다가 그동안 준비해두었던 각방을 확실하게 본인방으로 사용했다. 린셀과 결혼한 이후로 도리스와 밤을 즐기는 날이 아니면 이곳에서 잔 적이 없었지만, 이젠 린셀과 완전히 각방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일어나 이 잠꾸러기야.”
옷을 다 갈아입은 세렌이 침대로 다가가 그대로 뛰어 들었다.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자고 있던 한 여인이 그녀 아래에 깔려 ‘억’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으으. 세렌. 우리 새벽에 잠들었잖아. 벌써 일어난 거야?”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침대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의 정체는 도리스였다.
어젯밤 마차에서 이야기한대로 그녀는 세렌과 함께 하룻밤을 보낸 것이다.
“후후. 세상이 전부 내 것이 된 것 같아. 즐거워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으음. 나는 조금 더 잘게…… 게다가 오늘 쉬는 날이라고…….”
“같이 아침 먹어야지. 그만 자.”
야근이라도 뛰고 온 남편처럼 이불 아래로 다시 기어들어간 도리스를 깨우기 위해 세렌이 이불을 잡아 걷었다. 속옷만 입은 채 자고 있던 도리스가 팔을 쓰다듬었다.
“하여간……. 알았어.”
급작스러운 추위에 잠이 달아나버린 도리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렌이 말했다.
“누구부터 할까?”
“응? 무슨 소리야?”
“날 괴롭혔던 녀석들. 어떤 녀석부터 족칠까?”
세렌은 잊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 시집 온 뒤로 끊임없이 매도하던 다른 귀족들을.
그녀가 처음부터 이런 짓을 계획했던 건 아니었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오랫동안 함께 해오던 에반슈트 가문의 가주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들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린셀을 만나는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갑자기 악마가 들이닥쳤다.
그는 너무나도 무기력했다. 이런 사람이 귀족의 왕이라 칭해지고 있었다니.
차라리 그 힘을, 그 권력을 내게 준다면 이 세상을 위해 힘껏 노력할 텐데.
여자라고 무시하는 이 나라를 뿌리 채 바꿔버릴 텐데.
지금에 와선 그 때의 마음이, 세상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그 다짐이 사라져버렸지만 적어도 그동안 자신을 무시했던 귀족들에게 언젠가 복수하겠다는 마음은 남아 있었다.
“글쎄. 그건 우리 가주님이 알아서 하셔야죠. 우리 가주님은 그 영감처럼 꼭두각시가 아니잖아요.”
“후후. 그래도 자기한테 한 번 물어보고 싶었어.”
도리스의 준비가 끝나고 두 사람이 식당으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그 때,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에 두 사람은 방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들어오세요.”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그녀의 꿈을 이루게 해준, 도리스 다음으로 소중한 존재인 샤일록이었다.
“어머. 무슨 일이니? 혹시 엄마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별로 아이를 키울 마음도,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는 세렌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만큼은 다르다.
적어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 반드시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린셀과 같은 허수아비로 만들어야만 했다.
비록 부모가 곁에 있지만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벌써 어떻게 할지 계획까지 모두 세워뒀으니까.
본인이 생각하더라도 잔인하고 끔찍한 계획 이였지만 뭐 어떠한가.
이제 그 누구도 자신을 심판 할 수 없다.
자신은 이 나라의 최고이니까.
“그게…….”
망설이는 아이를 보고 세렌은 조금 후회했다. 어제의 연회로 너무 들 뜬 나머지 아이에게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았다.
“왜 그러니? 응? 엄마한테 말해보렴.”
세렌이 최대한 친절하고 인자한 미소로 말했다. 어차피 어린 아이의 칭얼거림 따윈 쉽게 받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상치 못한 한 마디에 그 인자한 미소를 날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제 하신 이야기. 다 들었어요. 이 가문을 집어삼킬 생각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