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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으음. 내가 편견은 없는데, 이건 좀
사랑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남녀 간의 애틋한 감정을 사랑이라 정의해야 하는가?
과거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현대로 오며 사랑의 정의는 크게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남녀 간의 애틋한 감정에서 ‘남녀’를 빼고 ‘사람’으로 바꾼 것이 요즘 사랑의 추세이다.
말하자면, 더 이상은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해도 무죄이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해도 무죄이다.
물론 이런 변화에 눈살을 찌푸리며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이 존재한다. 폭력을 행사하며 이런 사랑의 변화에 저항하는 집단이나 단체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도리스…….』
하지만 그건 지구에서의 이야기일 뿐, 지금 내가 있는 이세계에서도 통용되는 관념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세렌과 도리스의 관계가, 그들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애정행각이 크게 잘못됐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세렌. 이러다가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여기 누가 있다고. 헤헤. 더 해줘.』
『으이그. 하여간…….』
한참동안 붙어 있던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보며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두 사람의 입술이 헤어지기 싫은 것처럼 다시 합쳐졌다.
저기, 죄송하지만 제가 보고 있거든요? 공공장소에서 그런 짓은 좀…….
으음. 내가 이런 말 할 처지가 아니군. 나도 지금 훔쳐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연리지처럼 서로 달라붙어 있는 두 사람은 각자의 팔로 상대의 등을 끌어안으며 하나가 되려는 듯 격하게 움직였다.
자세히 보면 입술과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그 사이로 그들의 혓바닥이…….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 너무 격렬해. 조금만 더 진도가 나갔다간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하아. 하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지고, 서로의 몸도 떨어졌다.
세렌이 달아오른 한숨을 내쉬며 도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열정으로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조금…… 더?』
저기요. 조금 더 라니. 무슨 말인가요? 키스를 조금 더 해달라는 뜻인가요? 아니면 조금 더 진도를 나가자는 뜻인가요?
공공장소에서 어디까지 하실 생각입니까?
『여기선 좀 그래. 나중에 저택으로 돌아가서 하자.』
그나마 도리스가 상황판단을 할 줄 알아서 다행이다.
이미 늦은 감은 있지만.
달아오른 세렌과 다르게, 도리스는 약간의 홍조만을 띤 채 스스로를 절제하고 있었다.
세렌이 도리스에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고개를 휙 돌렸다.
『치! 사랑이 식은 거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
『거짓말. 그럼 증명해봐.』
『…….』
흐음.
오우야…….
이, 이건 좀…….
응?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냐고?
묻지 마시라. 애인들이 서로의 애정을 재확인하고 있는 순간이니까.
내 입으론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신비로운 과정이 재생되는 순간이니까 집중 좀 하게 방해하지 말라고.
그나저나 여자 친구란 환상의 생명체가 아니었구나. 실제로 존재하는 생명체였어.
아. 잠깐 눈물 좀 닦고…….
두 사람의 애정확인 작업(?)이 끝난 뒤, 서로 한발 짝 떨어지곤 지친 몸을 의자에 앉혔다.
깍지를 낀 손이 서로의 온도를 느끼며 꼼지락 거렸다.
『그런데 린셀은 어디 두고 여기 온 거야?』
도리스가 물었다.
전형적인 불륜커플의 확인 작업이었다.
상대의 배우자가 어디 있는지 위치를 묻는, 혹시 모를 사태를 떠올리며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영감탱이? 나도 잘 몰라. 또 어디 가서 질질 짜고 있겠지.』
……말이 좀 심하신데요. 저기, 부부 아니셨어요?
그래도 미리 대비하고 있던 터라 충격이 조금 덜했다. 이전에 로베르토의 말을 듣고 나는 세렌이 사실 린셀을 싫어하는 건 아닌지 추측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결혼한 이유가 에반슈트 가문의 재산과 명예가 아닐까 생각해본 것이다.
그 예상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연회장에 와서도 사람들은 린셀을 옆에 두고 세렌에게 지시를 구했다.
그것은 세렌이 가문의 중대사를 결정한다고 비약할 수도 있었지만 확실하진 않았기에 그냥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그런 냄새나는 노인네 말고 우리 이야기나 하자. 응?』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렌은 린셀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같은 여자인 도리스였다.
『알았어. 이 귀염둥이. 하여간 질투심은 많아가지고.』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행동이었다.
두 사람이, 여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나 이래봬도 지구 출신이야. 동성애(同姓愛)에 대한 편견은 잃어버린 지 오래라고.
내가 잘못됐다는 건 동성애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지금 그들이 하는 행동이 불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사랑을 하는데 제약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결혼을 했으면 배우자에게 충실해야 하지 않은가? 왜 불륜을 저지른단 말인가?
한 때의 실수라고 말하기엔 두 사람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좋아 보였고, 린셀에 대한 험담은 이미 세렌의 마음이 그를 떠난 지 오래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꼬마는 어디있어?』
『글쎄. 방에서 자고 있겠지, 뭐.』
두 사람의 화제가 나로 바뀌었다. 역시나 별다른 관심을 못 받는지 세렌은 나를 집에 두고 온 강아지 취급하고 있었다.
……애견가가 들으면 분노할만한 비유로군. 정정하자. 집에 두고 온 식물? 아니야. 애식(植)가가 들으면 또 분노하려나.
『일이 너무 잘 풀려서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아. 어떻게 그런 아이가 거리에 있었을까.』
『진짜로 에반슈트 가문의 후계자잖아. 확인도 끝냈다면서.』
『응? 우힛. 히히히!』
세렌이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배를 붙잡고 의자에서 쓰러진 그녀는 도리스의 무릎을 벤 채 다리를 휘저었다.
한참이나 웃고 나서야 진정이 되는지 찔끔 흘린 눈물을 닦으며 그녀가 말했다.
『아. 그거. 다 가짜야.』
『뭐?』
『그게 가보라고 들었을 땐 나도 놀랐어. 그냥 비슷한 물건인 줄로만 알았거든. 그래서 귀족들이 후계자인지 아닌지 확인해본다고 했을 땐 나도 놀랐는데, 알고 보니까 가짜더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가보가 가짜라니?
『나도 거기 있었잖아. 분명히 빛이 났는데…… 게다가 그림으로 봐왔던 가보랑 똑같이 생겼던데.』
『나도 진짠 줄 알았어. 근데 말이야. 나중에 일이 끝나고 영감한테 가보를 보여 달라고 졸랐거든? 그래서 가보를 받아내 몰래 숨어서 거기에 내 피를 떨어트려 봤는데…….』
어? 잠깐. 설마…….
『빛이 나더라니까. 내가 에반슈트 가문 사람도 아닌데.』
……이제야 알겠다.
내가 망가뜨린 마법 때문에 아무 피에나 반응하는구나. 그걸 보고 세렌은 가짜라 하는 거고.
『그럼 대체 그 아이는 뭔데?』
『글쎄. 아마 사기꾼 아닐까? 자기는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그런 사람들 많았거든. 자기가 에반슈트 가문의 후계자랍시고 자기 자식 데리고 오는 사기꾼들. 어렸을 적부터 에반슈트 가문에 갈 때면 그런 사람들 때문에 골머리 앓고 있더라고.』
순식간에 후계자에서 사기꾼으로 강등되는 순간이로군.
『꼬마가 노린 건 아닐 테고, 아마 그 엘프 부부가 뭔 짓을 한 게 아닐까? 엘프니까 가보랑 비슷한 물건쯤은 쉽게 만들 수 있겠지. 거기에 아직 어린 고아 한 명 구해서 몇 년 잘 길러 부모로 인식하게 만들고, 마침내 때가 됐다면서 우리 집 근처에서 서성거린 거겠지. 자기들이 만든 가보가 눈에 잘 띄게 애한테 달아 놓고선.』
흐음.
전혀 사기가 아닌데 사기꾼으로 오해받으니까 기분이 나쁘다.
어쩐지. 그때 핀을 보는 눈초리가 사납더라니. 친부모에게서 아이를 빼앗으려 한 게 아니라 사기꾼이라 생각해서 그런 거였나.
『그러니 계속 눈치를 줘도 끈질기게 남아 있지. 일부러 밥도 줄이고, 식사도 맛없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그 쪽방만 난방을 꺼버렸는데. 더럽게 눈치 없다니까.』
그건 너무 하잖아!
왕따 시키는 것도 아니고!
애들아. 너희 고생하고 있었구나.
『뭐, 괜찮아. 그 꼬마, 잘만 이용하면 좋을 것 같거든. 안 그래도 이래저래 주변에서 날 욕하는데, 그 꼬마가 후계자가 되면 견제가 좀 줄어들 것 아니야?』
『뭐? 그럼 네가 가주가 되겠다는 꿈은?』
가주 자리까지 노리고 있었냐. 무서운 여자로군.
『상관없어. 아직 어린 애니까 잘 구슬려서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애로 만들 거야. 그럼 내가 가주가 되는 거나 마찬가지지. 안 그래?』
무섭다. 사극에서 이런 상황을 본 것 같은데.
왕은 꼭두각시고 뒤에 있는 왕의 어머니나 아내가 모든 걸 조종하는…….
실제 역사로도 있었고.
『아. 이제 그 늙은이만 빨리 죽어주면 딱 좋은데. 얼마나 오래 살려나. 그 변태 영감. 재수 없다니까.』
『흐응. 왜? 그 영감이 나보다 테크닉이 떨어져?』
위험한 발언이 계속해서 나오는군. 무섭다. 무서워.
『우웩. 징그러운 소리 하지마. 나, 그 인간이랑 잔 적 없거든?』
『부부잖아? 한 번도 없다고?』
『뭐, 그래도 부부니까 해줄까 말까 고민은 했었는데, 그쪽에서 알아서 안 건드리더라고. 나이가 있어서 그런가?』
『근데 왜 변태야?』
『그게 말이지. 사실 그 영감탱이가…….』
“그만.”
더 이상은 세렌의 저질스런 말투를 듣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목적지 없이 화면을 마구 돌렸다.
린셀의 무기력한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무기력한 걸까. 가족을 잃은 슬픔 때문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걸까?
어쨌든 이제 로베르토가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도, 에반슈트 가문을 더 이상 돕지 않는 이유도 모두 알 수 있었다.
이미 에반슈트 가문은 속 빈 강정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재산도 그대로고, 권력도 그대로이지만 그걸 다루는 인간이 한 여인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상태였다.
그러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일부 귀족들은 경멸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오랜 동반자라는 로즐리 가문 역시 정이 떨어진 것이겠지.
“응?”
아무 생각없이 화면을 돌리고 있는 그 때, 한 남자가 거울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린셀의 모습이었다.
“뭐하고 있는 거지?”
그는 사람이 없는 곳에 홀로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런 큰 연회를 개최한 귀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운 없는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에 동정심을 느낀 나는 거울을 끄고 밖으로 나가 곁에 가주려고 했지만, 린셀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는 것을 보고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아.』
그것은 사진이었다.
진짜 사진은 아니고, 사진처럼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이었다.
아마 전에 봤던 다른 물건들처럼 마법으로 만든 것일 것이다.
린셀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었다. 나는 그 그림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 화면을 확대했다.
아마 가족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누구지?”
그림 속에 있는 사람은 젊은 시절의 린셀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와 어깨동무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가 낯이 익어서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으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
상상으로 그림 속 남자에게서 머리카락을 지워보았다.
그러자 내가 잘 알고 있는 그 남자와 모습이 겹쳐보였다.
“로베르토?”
그림 속 남자는 로베르토와 판박이였던 것이다.
머리카락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