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43화 (1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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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위그드라실과 비밀의 방(3)

“으으.”

차가운 바닥의 온기를 손으로 딛고 간신히 정신을 차리자, 내 앞에 보인 것은 넓은 공터와 같은 방이었다.

“여긴?”

이곳은 창고처럼 보였다.

이리저리 흩어져 쓸모없어 보이는 잡동사니들이 가득 찬, 그러면서도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이 몸을 눕힐 만큼 넓고 높았다.

아무도 오지 않아 먼지가 쌓이고 벌레가 기어 다닐 법한 어두침침한 곳이었지만, 집주인이 무슨 수를 썼는지 먼지도, 벌레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낯이 익었다.

아주 많이, 한때 이곳에서 살았던 것만큼이나 아주.

잠시 방을 둘러보자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긴 아버지가 주무시던 방?”

확실히 떠올랐다.

이곳은 미궁 최하층에 있던 아버지가 계시던 방이었다.

방이 넓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선 원룸 자취방처럼 좁게 느껴졌던 그 방.

한구석에 소중히 보관해 온 책 한 권과, 언젠가 이곳까지 도달할 손님에게 주기 위한 여러 가지 물건들.

그 모든 것이 시간이 멈춘 세상에 남겨진 듯 그대로 있었다.

“이제 좀 무슨 일인지 알겠네. 그래. 기억났다.”

석상이 있던 그 방.

아버지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그곳에 무슨 장치를 해두셨는지 내 머릿속에 한 편의 영화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 * *

『크아악! 인간 놈들! 도대체 뭐가 힘들다고 이 몸이 계신 곳까지 내려오지 못하느냐!』

벨루스는 오늘도 거울을 보며 분노에 찬 울음을 내뱉었다. 그의 울음소리는 최하층에서 시작되었지만 미궁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거울 속의 모험가들은 또 몬스터들이 모여 있는 첫 번째 방에서 쓰러져 그 운명을 다해 버렸다.

『고작 이 정도 시련도 헤쳐나오지 못하다니. 크으으…….』

그는 나름 인간들에게 관심을 가져줬건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편법을 써야 하는가.』

그가 막 모험가들이 전멸한 방으로 순간이동 했다.

그의 등장에 몬스터들이 좌우로 밀려나며 두려움에 떨었고, 도망치지 못한 몬스터들은 그의 육중한 덩치에 깔려 자신들이 방금 죽인 모험가들과 그 운명을 함께했다.

『흐음. 어디가 좋을까.』

그가 말하는 편법이란 인간들이 말하는 ‘운’이라는 요소를 첨가한 것으로서, 함정으로 보이지만 사실 함정이 아닌, 자신이 사는 최하층으로 이동시켜 주는 장치를 설치하려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운’도 실력이라 했었지 아마? 그럼 그 실력을 이 몸이 평가해 주겠노라.』

* * *

“……그래. 그래서 그 석상이 모여 있는 방에 아버지가 최하층으로 순간이동시켜 주는 일종의 함정을 설치하셨지.”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무리 ‘운’이 절대적이라 할지라도, 너무 실력이 없는 자가 오면 자신의 바람에 부응하지 못하는 법.

아버지는 실력 있는 자가 만졌을 때만 함정이 작동하도록 조작을 가한 것이다.

“문제는 아버지가 말하는 실력의 기준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라…….”그렇다. 아버지는 최소한 실력 있는 자가 오기를 바랐고, 아직 어머니를 만나기 전이었던 아버지는 그 실력의 기준을 자신으로 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과 비슷한 마력을 지닌 자가 만졌을 때만 함정이 발동하도록 만든 것이다.

극한의 나르시스트였던 아버지다운 생각이다.

“그래서 내가 만졌을 때 비로소 발동한 건가.”

나는 함정을 생각해 보았다. 그 함정은 꽁꽁 숨겨진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난 천 년 간 아무도 발동을 하지 못한 이유는 아버지와 비슷한 마력을 지닌 사람이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래도 아버지가 관리를 잘해두셔서 깨끗하긴 하네.”

일종의 상태유지마법을 걸어두셨기에 아버지의 방은 오랫동안 사람이 방문하지 않은 것치고는 깔끔했다.

“아무도 방문한 적이 없군.”

방에 있는 얼마 안 되는 물건들은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만약 사람이 들어왔다면 이런 물건들을 전부 가져갔겠지만, 다행히 들어온 사람은 없었다.

아마 미궁의 함정과 몬스터들이 모두 작동을 중지한 뒤에도 사람이 들어올 수 없던 이유는 이곳이 숨겨진 곳이기 때문이다.

최하층 바로 위까지 모험가가 도착하면, 아버지가 직접 이곳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구조였기에, 아버지가 떠난 이후로는 이곳으로 오는 통로를 열어줄 자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전부 쓸 수 있으려나?”

나는 구석진 곳에 주인을 잃고 덩그러니 놓여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만져봤다.

이곳에 놓인 물건들은 금은보화만큼이나 값진 마법물품들뿐이었기에 나의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돈 때문은 아니고 아버지의 기억으로는 상당히 위험한 물건투성이였거든.

“무겁네.”

첫 번째 물건. 청동으로 만들어진 투구.

이걸 쓰면 몸이 투명해지면서 누구에게도 보여 지지 않는다.

나는 손에 든 투구를 한 번 써보았다. 투구는 착용하는 순간 저절로 줄어들면서 내 머리 크기에 딱 알맞게 변화하였다.

“……아무것도 안 보여.”

투명인간이 세상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몸이 투명해지면, 그 사람의 안구 역시 투명해지기에 반사된 빛을 받아들이지 못해 장님이 된다는 과학적 연구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

……마법의 세계이거늘, 왜 이것만 과학적인 거야!

“이건 못 쓰겠네.”

투구를 벗어 던지고 다른 물건을 찾아보았다.

두 번째로 발견한 물건은 끄트머리가 세 개로 갈라진 창이었다.

포크처럼 생긴 이 창은…… 그냥 삼지창이라고 불러야겠다.

“무겁네.”

물건을 잡는 순간 아버지가 이 창에 집어넣은 기능들이 떠올랐다.

이 창의 기능은 바로 물을 다루는 마법.

인간계를 살펴보던 아버지가 비를 내려달라고 기우제를 지내는 인간들을 보고 떠올린 마법도구였다.

“나한테는 쓸모가 없잖아.”

엘퀴라즈 숲에 계곡이 있긴 하지만, 물 부족으로 시달리지도 않고 딱히 물을 가지고 장난치고 싶은 마음도 없기에, 나는 창을 투구 옆에 내려놓았다.

세 번째로 잡은 도구는 벼락 모양의 지팡이였다.

……생긴 것처럼 전기를 다룰 수 있는 마법도구였다.

“……아버지. 그리스 로마신화라도 읽으셨습니까!”

물론 읽지는 않으셨겠지. 대부분의 도구는 인간의 원초적 공포심에 기인하여 만든 무기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 역시 인간의 공포심이 신으로 의인화된 이야기니, 일부 겹치는 부분이 있을 뿐이었다.

“이건…….”

다른 도구들을 살펴 보던 그 때, 나는 마이크처럼 생긴 도구를 발견했다.

내 손바닥만큼 작은 마이크는 주머니에 쏙 들어가게 생겼고, 작은 버튼이 달려 있었다.

“흠. 어디에…… 잠깐!”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나는 손을 멈췄다. 이 도구가 어디에 쓰는 도구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이 도구는 최하층에 도달한 모험가들에게 주기 위한 물건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연회장에 있는 귀족들한테 들킬 뻔했다.”

물건의 능력은 ‘이곳에 말한 목소리를 주변 100㎞ 내의 다른 생명체에게 전달’하는 능력이었다.

마이크처럼 생긴 녀석이 진짜로 마이크와 비슷한 능력이 가지고 있다.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아버지도 참. 연설까지 준비하시다니.”

아버지는 이것을 이용해 인간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설파할 작정이셨던 것 같다.

아쉽게도 그 계획은 어머니를 만남으로서 우선순위에서 내려가 버렸지만.

“하나같이 내가 쓸 수 없는 것들뿐이네.”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조금 기대했었다.

언제나 핀과 아이들에게 전투를 맡기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기에, 좋은 물건을 발견하여 나도 함께 싸우는 희망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전부 사용하기엔 미묘한데다, 너무 크고 무거워서 내가 쓸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응? 이건…….”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눈에 들어왔던 책을 주었다.

이건 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전에 무슨 물건인지 알 수 있었다.

“식물 대백과사전.”

아버지의 기억을 처음 들여다봤을 때, 어머니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아버지가 읽었던 식물에 관한 백과사전이었다.

나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으며 책을 넘겨보았다. 얼마나 읽으신 건지 보존마법이 걸려 있는데도 책장이 흐물흐물했다.

후드득.

책장을 계속 넘기고 있는데, 아래로 쪽지들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책을 잠시 내려놓고 그 쪽지들을 주워서 펼쳐 보았다.

“이건…….”

뭐라 쓴 건지 하나도 못 읽겠다.

쪽지에는 복잡한 수식과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마구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쪽지를 읽는 순간, 아버지의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더니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마법이구나.”

아무래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마법을 알려주고 싶으셨나 보다.

떠오른 기억들은 아버지가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었는지, 그 마법을 어떻게 쓰는지 까지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이건 도움이 되겠네.”

나는 떨어진 쪽지들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삼십 개나 되는 쪽지들이었지만 부피가 작아서 모두 주머니에 넣을 수 있었다.

나중에 천천히 읽으면서 쪽지에 적힌 마법들을 모두 배워야겠다.

“후후. 이것으로 나도 쓸모없는 겉절이에서 메인으로 부상할 수 있을까.”

뿌듯하게 웃으며 이곳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그때, 나는 사람들이 나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한 번 확인해 봐야지.”

혹시 모르니 확인해 보기 위해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내 몸보다 수십 배는 커다란 거울이 아버지의 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거울에 손을 대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불투명했던 거울에 무언가가 비치기 시작했다.

“완전 CCTV로구만.”

아버지가 미궁에 들어온 모험가들을 구경할 때 쓴 물건이었다.

나는 기억 속에 있는 거울 조작법을 이용해 내가 있던 방을 비춰보았다.

다행히도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나의 실종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들키지 않았으면 했는데, 막상 이러니까 소외감 드네.”

중요한 파티의 주인공이 사라졌는데, 다들 대체 뭐하고 있는 걸까.

나는 연회장으로 화면을 돌렸다.

『하하!』

연회장의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신나게 먹고 마셨다. 그곳에 린셀도, 세렌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주인은 뒷전이고 자신들만의 축제였다.

“흐음.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는 거야.”

나는 계속해서 화면을 돌렸다. 린셀이나 세렌을 찾기 위해서였다.

“응?”

제일 먼저 잡힌 사람은 세렌이었다.

세렌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구석진 곳에서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화면을 확대해 보았다.

세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안경 쓴 도도한 하녀장이자 비서인 도리스였다.

마차에서도 느꼈지만 두 사람 사이가 정말 각별한 것 같다.

“린셀 좀 챙겨라. 아내라며.”

나는 세렌의 모습을 보며 불평어린 말을 했다.

잠시 후, 그들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다.

“둘이서 뭐…… 어어어!?”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차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키, 키스!?”

두 사람의 입술이 한데 포개졌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이 한참동안 서로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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