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40화 (14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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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연회 시작 전날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하룻밤만 지나면 탈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의 믿음은, 필로우가 전해준 소식이 야구공처럼 날아와 깨뜨린 지 오래다.

필로우 말로는 용사의 무기가 있을 법한 곳을 찾은 뒤 잠입했지만, 아쉽게도 용사의 무기는 없었다고 한다.

‘그럼 거기에 뭐가 있었는데?’라는 나의 물음에 필로우가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말을 더듬더니 ‘밤이 늦었으니 소인은 이만!’하고 도망쳤다.

대체 뭐가 있었기에 대답을 회피하는 걸까? 동공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눈동자가 흔들리던데. 뭔가 봐서는 안 되는 무서운 것을 본 얼굴이었다.

그 이후로 아이들에게 소식이 없다. 저녁마다 필로우가 얼굴을 비추기는 하는데, 열심히 저택을 수색하는 중이지만 용사의 무기가 있을 법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 뿐이었다.

찾은 것이라고는 엄청나게 많은 금은보화들 뿐. 귀족 가문이라 그런지 현물이 장난 아니게 많이 쌓여 있다고 한다.

한국이었으면 비자금으로 국세청에서 탈탈 털 만한 양이려나.

아니지. 국세청에서 털려면 뭔가 높으신 분들에게 밉보여야 하니 딱히 털릴 일은 없겠군. 에반슈트 가문이 높으신 분이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열심히 연회 전 날인 오늘까지 기다려봤지만, 아쉽게도 연회를 앞둔 오늘까지 아이들은 용사의 무기를 찾지 못했다.

“좋아요. 하나 둘. 하나 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이제는 메르엔의 박수 소리에 맞춰 걷는 포즈도 완전히 귀족이 된 것처럼 적응이 되었다.

내가 예절에 대해 익숙해지자 메르엔도 소리를 지르거나 회초리를 휘두르는 일이 없어졌다.

오히려 나를 칭찬해주는 것이 꽤나 기분이 좋아서 나도 더 열심히 하는 중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역시 회초리보다는 칭찬이 의욕도 생기고 훨씬 효율적이라니까.

물론 3일도 채 안 돼서 나를 이렇게 가르친 메르엔의 실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 무섭긴 하지만 매의 눈으로 나의 단점들을 속속들이 집어내어 모두 교정한 것은 메르엔이니까.

스승의 은혜라도 불러주고 싶지만 메르엔은 그 노래를 모를 것이고, 또 부른다고 해봐야 괜스레 부끄럽기만 하니까 그만두자.

“…….”

하지만 한 가지, 아직 익숙해지지도, 친해지지도 않은 인물이 있었다.

“…….”

서로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바로 이 시간.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닌 지옥 같은 침묵이 감도는 시간.

바로 로베르토와의 시간이었다.

그는 첫날 이후로 내게 다른 어떤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래. 그날 말한 대로 딱히 배울 게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교육은 임시방편이고, 예절교육을 빙자한 체력훈련이 끝나고 나면 지친 내게 이 시간은 몸과 정신을 쉴 수 있는 귀중한 휴식시간이 되어주니 딱히 불만은 없었다.

“…….”

오늘도 다를 바 없었다.

서로 아무런 말없이, 나는 그저 조용히 첫 날 받은 역사서를 읽고 있었고 그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것 같지만 내가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번뜩 눈을 뜨고는 ‘어딜 가나?’라며 말을 거는 것이, 꼭 아빠를 보는 느낌이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TV를 켜두고 주무시는 아버지 몰래 다른 채널을 틀면 ‘아빠 안 잔다.’하고는 잠에서 깨어나시는 거.

……꼭 그런 느낌이다.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그냥 안 오면 될 것을, 성실한 공무원처럼 부탁받은 일은 거절 못 하는 성격인지 그는 꾸준히 내게 왔고 나는 꾸준히 나를 무시하는 그를 옆에 두고 책만 주구장창 읽는 게 우리들의 만남이다.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역사서를 읽던 도중, 나는 재미있는 문구를 발견하였다.

『에반슈트 가문의 충실한 신하이자, 함께 서로를 도우며 역경을 해쳐온 가문이 있었으니 그 가문이 바로 로즐리 가문이다. 그들은 항상 에반슈트 가문의 충실한 조력자로서, 용사의 후손들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로즐리 가문?”

나도 모르게 입으로 소리 내어 그 부분에 적혀 있던 흥미로운 문구를 읽어버렸다.

에반슈트 가문과 함께 한다는 로즐리 가문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썩 와 닿았다. 그리고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에 로즐리 가문 사람은 누구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책을 읽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 목소리에 잠이 깼는지 로베르토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시선이 마주쳤는데 눈을 돌리기 민망해서 나는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로즐리 가문이 에반슈트 가문의 파트너인가요?”

“……그랬었지.”

씁쓸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와, 과거형의 대답에 나는 더 이상 로즐리 가문과 에반슈트 가문의 연결고리가 끊어졌음을 느꼈다.

“너는 로즐리 가문의 사람과 만난 적이 있더냐?”

“아뇨.”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실제로 만난 적이 없어서 궁금했던 찰나였는데, 이 대답으로 그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분위기는 린셀이나 세렌에게 직접 물어보기 보단, 파트너라고 불리는 로즐리 가문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편이 어쩌면 대답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만난다고 해서 정말로 알려줄지는 모르겠지만.

“크큭…… 하하하!”

로베르토가 웃었다. 뭐가 그리 웃긴 것일까.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웃는 그의 모습은 기괴할 정도였다.

“너, 내 이름이 뭔지 아느냐?”

“로베르토…… 아닌가요?”

“풀 네임 말이다.”

이번에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려준 적이 있어야 알 것 아닌가. 궁예도 아니고 알려준 적도 없으면서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웃음. 그리고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설마 로베르토 로즐리……?”

“눈치가 영 없는 건 아니군.”

내가 들은 게 정말일까. 나는 응접실에서 있었던 그의 태도를 생각해보았다.

린셀과 세렌의 주장에 반박하며 물어뜯었던 그의 모습은 조력자라기보다는 정쟁(政爭)으로 다투는 라이벌의 모습으로 보였었다.

“네 녀석이 생각하는 조력이란 아첨하고 떠받드는 것이더냐?”

내 생각을 읽었는지 로베르토가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표정에서 모든 게 드러나는 것 같다.

아니면 로베르토가 사람 표정을 기가 막히게 잘 읽거나…… 관심법이라도 쓰는 거겠지.

마침 대머리네. 기가 막힌 우연이군.

“달콤한 말은 기운을 북돋기도 하지만, 독이 되는 경우도 많지.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라.”

그의 말이 맞기에 나는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 내 짧은 생각을 잠시 나무란 뒤, 더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결심했다.

“근데 ‘그랬었지’라는 것은 이제 아니라는 뜻인가요?”

“……그래.”

민감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소와 다르게 내 질문에 성실히 답해주었다.

아무래도 그는 쌓인 게 많았는지 나름 이 대화를 즐기는 것 같았다.

“지금의 가주는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었지. 하지만 아내와 딸을 잃은 후부터는 더 이상 좋은 가주가 아니야.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귀족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빈껍데기가 되었지.”

린셀이? 그렇게 보이지는 않던데.

“믿기지 않나? 그럼 이건 어떻더냐? 그가 널 데리고 온 후로 따로 부른 적이 있었나? 아니면 직접 찾아온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더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린셀은 첫 날 응접실 사건 이후로 단 한 번도 나를 만나러 온 적이 없었다.

죽은 딸의, 자신의 후손이 돌아왔는데 만나러 오지 않다니. 정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일이 바쁜 것일까.

아니면 로베르토의 말 대로 빈껍데기……인 것일까?

“그는 집무실에 틀어 박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끝이다. 그게 그의 유일한 인생의 낙이자 그가 하는 유일한 일이지. 이번 무투대회도, 연회도, 귀족으로서의 일도 모두 손에서 놓고 사는 살아 움직이는 인형이 바로 그 인간이지…….”

“그럼 일은 대체 누가 하는데요?”

로베르토가 대답을 해주려다 말을 멈췄다. 그리고 곧 웃음을 짓더니 내게 문제를 내기 시작했다.

“로즐리 가문의 사람은 나만 있는 게 아니다. 네가 만난 사람 중에 한 명이 더 있지. 누구인지 알겠느냐?”

“으음…….”

“힌트는 아주 가까이에 있다. 어쩌면 네가 이 저택에 들어와서 가장 많이 만나본 사람일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몇 명 되지 않는다. 여기 와서 가장 만난 인물이라면, 하녀들과 하인들을 제외하고 메르엔과 세렌, 로베르토가 전부니까.

아니, 잠깐. 설마…….

“세렌…… 인가요?”

“큭. 엄마라고 부르지도 않는 거냐?”

그가 나를 비웃었지만, 딱히 나무랄 생각은 없었는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세렌이 로즐리 가문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로즐리 가문 사람이라면 로베르토와 그녀는 같은 가족이라는 뜻이잖아? 근데 응접실에서 그렇게 대판 싸운 거야?

“그년은 내 동생 중 하나다. 전 대 로즐리 가주가 낳은, 그러니까 내 부모님이 낳은 막내딸이지.”

“……나이 차이가 심하네요.”

말을 꺼내자마자 아차 싶었다. 꼭 비웃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로베르토는 별문제 없는지 그냥 넘어가주었다.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런가?

“우리 부모님이 금슬이 좀 좋으셨지. 내가 첫째고, 그녀가 열두 번째다. 나와 그년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나 되지.”

……어디에 충격을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 따라 이런 이야기를 재미나게 해주는 로베르토에 충격을 받아야하는가.

아니면 금슬 좋은 로베르토의 부모님에게 충격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세렌이 스무 살 정도로 보이던데, 마흔 언저리에 벌써 탈모로 대머리가 된 로베르토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야 하는가.

“뭐, 로즐리 가문이 조언자 역할을 해주던 시대도 다 끝났지. 가주도 살아도 산 게 아니고, 그나마 재혼한 상대도 불여우 같은 년이니까.”

“불여우…….”

“여기까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다 되었는지 그가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함께 지낸 정조차 없는지 그는 매정하게 밖으로 나갔고, 나는 홀로 방안에 남아 그가 한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막 잠이 들 찰나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 몸을 뒤척였다.

필로우라도 온 것일까 생각했지만, 귓가에 들린 웃음소리는 필로우의 것이 아니었기에 몰래 실눈을 뜨고 침입자를 확인해 보았다.

“후후…….”

침입자는 세렌이었다.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소중한 자식을 보며 웃는 어머니의 웃음.

‘불여우 같은 년이니까.’

하지만 로베르토가 낮에 한 이야기 때문인지 그 웃음이 석연치 않게 느껴졌다.

나는 그 상태로 그녀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며 잠이 들었고, 꿈속에서 세렌이 마녀로 나오는 악몽을 꾸며 잠을 설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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