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37화 (13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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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짧은 역사공부

변기통을 붙잡고 한창 씨름을 하며 속에 든 것들을 게워냈다.

내 몸이지만 참으로 신기하다. 위액이 없는 것일까. 목이 쓰리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걸로 위안 삼으면 안 되는데. 쳇. 나는 왜 하필 나무인 거야!

속에 든 것들을 모두 게워내며 변기 물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그 때, 천장에서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 위를 바라보았다.

이런 으리으리한 집에도 쥐가 사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천장의 타일 하나가 들썩거리더니 옆으로 치워졌다.

천장 위의 어둠 속에서 하얀 털 뭉치 같은 무언가가 고개를 배꼼 내밀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쥐?’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자세히 보니 쥐가 아니었다.

“주공.”

하얀 털 뭉치의 정체는 필로우였다.

“필로우? 무슨 일이야?”

“찾았소이다.”

잠시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필로우가 한 말의 저의를 생각했다.

머리가 빙글빙글 회전하더니 나는 그 뜻을 깨닫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써 찾은 거야!?”

내가 아이들에게 부탁했던 것.

바로 용사의 무기를 찾는 것이 아니던가.

필로우가 찾았다고 한다면 그것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오만, 경계가 삼엄한 곳이 있는데 그곳에 있을 거라 판단되오.”

“으음.”

“오늘 저녁에 사람들이 잠들면 그곳에 한 번 잠입해 보겠소이다.”

“그래. 알았어. 조심하고. 위험하면 바로 도망쳐.”

“알겠소이다.”

어둠 속에서 하얀 털 뭉치가 사라지고, 천장이 다시 닫혔다.

나는 변기의 물을 내리고 밖으로 나갔다. 식당에서 하인들과 하녀들이 음식을 치우고 있었다.

아직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새것처럼 보였지만, 하녀들은 무표정하게 그 음식들을 자신들이 가지고 온 쓰레기통에 넣었다.

지옥에 가면 생전에 남긴 음식들을 전부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그렇다면 지금 하녀들이 버린 음식은, 내가 먹어야 할까 아니면 직접 버린 하녀들이 먹어야 할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시간에도 나는 가슴을 졸였다.

다행히 로베르토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휴우.”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같이 있기 불편한 사람이랑 단 둘이 있으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다.

“무슨 한숨을 그리 쉬는 것이냐?”

“히익!”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 바로 옆에 로베르토가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거, 거기서 뭐하고 계시나요?”

“널 교육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 댁이 도둑이요? 왜 그런데 숨어 있어!

이마를 찡그리며 나를 쳐다보던 로베르토가 팔짱을 풀고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나는 침을 삼키며 몸을 긴장한 채 그의 싸늘한 시선을 꾹 참았다.

“귀족은 함부로 한숨을 쉬면 안 된다. 앞으로 그걸 명심하도록.”

“네.”

아직 한 시간이 지나지 않은 걸로 아는데, 그는 바로 교육을 시작할 셈인지 자리에 앉았다.

별 수 없이 교육을 듣기 위해 나도 자리에 앉았다.

언제 준비했는지, 내 앞에는 책이 한 권 있었다. 「루카스 왕국의 역사」라 적힌 책은 아주 두꺼워서 베개 대신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앞으로 삼일 안에 이것도 마스터해야 한다는 건가!? 한숨이 절로 나올 것 같았지만 방금 지적을 받았기에 억지로 참았다.

“쓸데없는 걸 준비했군.”

그가 또 다시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투덜거렸다. 책은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준비한 재료인 모양이다.

이제부터 교육을 시작할 것을 알기에 나는 미리 책을 펼쳤다. 빳빳한 책장이 딱딱하게 넘어갔다.

“펼칠 필요 없다. 네가 알아야 할 것은 에반슈트 가문의 역사뿐이니.”

퉁명스럽게 대답한 로베르토가 에반슈트 가문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별 것 없었다. 그저 에반슈트 가문의 역대 가주들의 이름을 달달 외다시피 읊은 것뿐이었다.

대략 서른 명 가까이 되는 가주들의 이름을 읊은 그는 내게 눈짓을 보냈다.

전부 외우라는 뜻이었다.

“저, 받아 적을 수 없을까요?”

“굳이 적을 필요 없다. 다 외울 때까지 계속 불러주겠다.”

……이 사람. 나를 말려 죽이려는 속셈이 분명해.

아니면 이것이 압박교육인가? 빨리 외우지 못하면 나와 계속 대화를 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

“다 외우면 말해라.”

그 말을 끝으로 로베르토는 반복하는 녹음기처럼 끊임없이 이름을 외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말을 불경처럼 들으며 입으로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외우려 노력했다.

숫자로 따지자면 겨우 서른 명. 영어 단어 서른 개 외운다고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식 암기 방법이 아니라 이렇게 입으로 외우려니 잘 안 외워진다.

으으. 공책이랑 펜만 있었어도. 한 시간, 아니 삼십 분 안에 외울 자신 있는데.

그래도 열심히 외우다 보니 어느새 입에 달라붙어 버렸다.

노래를 외우듯이 역대 가주들의 이름이 줄줄 나오기 시작했다.

로베르토의 목소리가 멈췄다. 내가 가주들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다 외웠군.”

다음에는 무슨 교육을 할지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이것으로 끝이다.”

그리고 방을 떠나려고 했다.

“잠깐만요.”

나는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겨우 가주들 이름 알려줘 놓고 이걸로 끝이라고?

아이들이 용사의 무기를 찾으러 갔으니, 연회가 벌어지기 전에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 이상의 교육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왜 그러지?”

하지만 나는 이번 교육에 조금 기대를 하고 있었다.

용사의 후손이 세운 가문이라니.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들의 역사가 궁금했다.

“더 가르쳐 주실 건 없나요? 겨우 이름만 알려주시고 끝이에요?”

“더 배우고 싶다고?”

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마치 나를 벌레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를 싫어한다는 건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나를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꼬마야. 너는 귀족이 무엇인지 아느냐?”

“귀족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 아닌가요?”

현대로 치자면 국회의원과 같은 존재가 귀족이 아닐까? 내 생각엔 그랬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숨을 쉬었다.

나보고는 한숨 쉬지 말라더니. 내로남불이냐.

“귀족은 마법이나 마찬가지다.”

“마법?”

“조용히 하고 내 말 들어!”

로베르토의 호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귀족이 사슴을 가리키며 ‘이건 늑대다’라고 하면 일반 시민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과연 ‘그건 사슴이지 않습니까?’하며 되물을 것 같더냐? 아니면 ‘그건 늑대입니다’ 하고 수긍할 것 같더냐.”

그가 내게 물었다. 조용히 하라는 호통소리가 아직 귓가에 맴돌아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이면 백. 전부 사슴을 늑대라고 생각할거다. 그건 시민들이 멍청해서가 아니야. 진짜로 사슴을 늑대로 만든 것도 아니고. 귀족이 가진 권력의 힘이 현실을 왜곡할 뿐이다.”

그의 말을 들으니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사슴을 말이라고 한 것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농락한다는 것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네 녀석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귀족의 삶이 마냥 좋은 것만이 아니다. 사치를 누리고, 연회를 즐기고, 서민은 평생 꿈도 못 꿀 집에서 사는 찬란한 삶이 아니란 말이다.”

로베르토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나를 만난 순간부터 쌓아 왔던 분노를 한꺼번에 폭발 시킨 것 같았다.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 나를 결정한다. 내가 뱉은 말이 내가 원하지 않은 뜻이 되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지. 반대로 말 한마디로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고.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는 너무 분노하여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그런데 너 같은 어디서 나타 난지도 모르는 아이가, 귀족 중에서 가장 선망 높고 영향력 있는 에반슈트 가문의 후계자가 된다고? 나는 이 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 너 같은 꼬마아이가 자기 입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치마폭에 휩싸여 나라가 좌지우지되는 꼴을 볼까봐 걱정이 된단 말이다.”

나는 그를 오해했던 것 같다.

처음 응접실에서 나를 아니꼽게 바라보던 시선과, 나에 대한 적개심을 지니고 있어서 나 역시 그가 좋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루카스 왕국을 걱정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이 나라를 걱정하고, 나 같은 어린아이가 후계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던 것이다.

“에반슈트 가문의 역사가 궁금하다고 했나? 그럼 알려주지. 과거로 갈 필요는 없다. 에반슈트 가문은 지금 몰락하고 있으니까. 시민들은 모르겠지만, 귀족들은 모두가 에반슈트 가문을 비웃고 있지.”

용사의 가문인데? 용사의 가문을 비웃는다고?

“네 표정이 말해주는구나. 용사의 가문이라고 별 거더냐? 전부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지금은 그 과거의 영광과 과거의 허상에 사로잡힌 늙은이가 죽을 날만 기다리는 가문에 불과하지. 그리고 그 늙은이 뒤에서 부끄러움도 모르는 여우같은 년이 호랑이 등에 타서 설치고 있고.”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로베르토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문으로 뛰쳐나갔다.

“제기랄!”

쾅!

큰소리와 함께 문을 부서질 듯이 세게 닫으며 로베르토가 사라졌다. 그가 나가고 나서 한참 동안이나 공기가 흔들거렸고, 큰소리에 멍해진 나의 귀는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았다.

“끄응. 그게 대체 뭔 소리야.”

홀로 남은 나는 그가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시민들은 모르지만 귀족들 사이에서는 에반슈트 가문의 평판이 엉망이라는 건가?

그리고 치마폭이니, 여우같은 년이니 하는 것은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

설마 세렌을 가리키는 건가?

머릿속에서 뭔가 익숙한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아내와 자식을 잃은 슬픔에 하루하루를 절망하며 보내던 린셀에게, 마법사인 세렌이 접근하여 세뇌한 것이다.

그리고 린셀은 세렌의 꼭두각시가 되어 그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된 것이고.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군. 귀족이 바보도 아니고, 마법사한테 세뇌라니.

지구였으면 ‘무당이 대통령을 뒤에서 조종했다!’랑 같은 말이잖아.

현실이 무슨 소설도 아니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리가 없지.

으음.

갑자기 등골이 서늘하다. 왜인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침대로 돌아가 몸을 눕혔다.

그리고 오늘 밤만 버티면 아이들이 용사의 무기를 찾을 것이고, 이 복잡한 정치판(?)에서 떠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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