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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귀족이라고 편한 것만은 아니다(2)
사람이 숨 쉬는 일 빼고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다른 누군가와, 또는 자기 혼자서 밥을 먹는 것?
아니야.
다른 누군가와 말을 하며 대화를 하는 것?
틀렸어.
하루 일과를 끝내고 몸을 쉬기 위해 잠을 자는 것?
천만에.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걷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본능적으로 하려는 몸짓이자, 적응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갈구하는 행위.
그것이 바로 걷는 것이고 몸이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다.
방 안에 틀어박혀 집구석 폐인이던 과거의 나조차도, 가끔 몸이 쑤실 때면 집 안을 걸어 다니곤 했었지.
그만큼 걷는 다는 것은 우리에게 친숙한 일이고, 그 고마움을 느끼기엔 너무 가까워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
응?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냐고?
“좀 더 허리를 펴셔야죠!”
“윽!”
내가 지금 그 걷는다는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거든.
메르엔의 예절교육이 시작된 후로, 나는 지금 계속해서 걷는 연습만 하고 있다.
그녀가 말하길 내가 걷는 모습이 귀족과는 너무 다르다며 자세를 먼저 교정해야 한다나 뭐라나.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조금 무시하며 자신만만했었는데 그 때의 나를 욕하고 싶다.
“자. 좀 더 허리를 피시고, 다리도 절도 있게.”
발목이 아프다.
그놈의 절도 있게는 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힘차게 걸으라는 뜻인 줄 알고 힘을 줬더니 ‘아니 무슨 기사도 아니고 그런 저질스러운 발걸음을!’이라며 회초리로 때렸다.
그래서 이번엔 군인처럼 걸어보려고 다리를 높게 들었더니 ‘지금 무슨 싸움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라며 또 회초리로 때렸다.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허벅지에는 힘을 빼고 또각또각 소리가 나도록 발목에만 힘을 줬더니 그때서야 ‘좋군요. 확실히 성과가 있어요’라며 오케이 사인을 보내주었다.
……도대체 절도 있게란 무엇인가? 소리만 나면 그만이라 이거야?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걷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경박스러움을 떨쳐내고 귀족으로서 절도 있는 몸가짐을 보여줘야 한다던 그녀는 다리뿐만 아니라 나의 몸 전체를 주시하였다.
“허리를 좀 더 곧게!”
“어깨는 움츠리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까!”
“시선은 당당하게 정면을!”
끊임없이 걸려오는 태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만약 이 정도 태클 능력으로 지구에 간다면, 전설의 축구선수가 될 수 있을지도…….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래. 뭐라 그럴 수도 있다. 가르쳐주는 입장에선 서툰 내가 답답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원래 지적을 해줘야 바로 고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메르엔은 뛰어난 선생이다. 나의 잘못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모두 잡아내니 말이다.
“또! 또! 허리를 펴시라니까요!”
찰싹!
근데 그놈의 회초리 좀 그만 휘두르면 안 되냐!
정말 처음 예고했던 대로 그녀는 회초리를 자주 휘둘렀다.
자주 휘두른 정도가 아니지. 지적이 나올 때마다 계속해서 휘둘러지는 그녀의 회초리는 만약에 회초리 휘두르기에도 등급이 있다면 ‘회초리 마스터’라 불러도 될 정도였다.
그녀의 회초리는 빨랐다. 그리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정말 매서웠다.
그녀의 회초리는 소리보단 느렸다. 하지만 덕분에 소리를 듣고 날아올 매를 사형수처럼 기다릴 찰나의 공백이 생겼다.
그녀의 회초리는 매서웠다. 피부를 때리는 그 작은 면적이, 나머지 육체를 부르르 떨게 만들며 생쥐를 두려워하는 코끼리로 만들었다.
“이제 좀 나아졌군요.”
여기가 지구였으면 벌써 이 인간, 아동학대죄로 잡혀갔을 거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 선생들 마인드랑 똑같다. 그때는 발바닥과 엉덩이를 자주 맞았었는데.
어떤 선생은 자동차 와이퍼에 절연 테이프를 둘둘 감아서 발바닥을 때리곤 했었지.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발바닥은 혈이 자극되어 너희들의 머리가 똑똑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어쨌든, ‘맞으면 빨리 배운다’라는 이론은 옛적에 깨졌다고. 공부도 유전이라고 밝혀진 지가 언젠데!
“시선은 정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다시 메르엔의 회초리가 날아왔다.
나는 방금 내가 한 말의 일부를 취소하였다.
공부는 맞아도 빨리 배우는 게 아니지만, 맞아서 빨리 배우는 분야도 있다.
‘정신집중!’
바로 보호본능이다.
처음 몇 대는 그냥 되는대로 맞아주었다. 하지만 자꾸 맞다보니 엉덩이 가죽이 뜯어질 듯이 아팠다.
도망칠 수도 없고, 그대로 계속 맞아주었다간 내가 못 버틸 것 같았다.
그 때였다. 내 머릿속에 번뜩이는 편법이 떠오른 것은.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 엉덩이 근처로 다가온 회초리가 느껴졌다.
회초리가 닿으려는 곳의 피부에 마력을 집중했다.
회초리는 마력을 뚫지 못하고 피부 바로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찰싹!
피부가 아닌, 옷을 때린 소리가 찰 지게 울려 퍼졌다. 마력으로 간신히 멈췄지만 그 여파가 엉덩이에 미쳐서 살짝 화끈한 느낌이 들었다.
“엉덩이에게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좀 더 노력하세요.”
“네…….”
아프지도 않았고, 실제로 맞은 것도 아니지만 최대한 표정을 찡그리며 연기를 해 메르엔을 속여 넘겼다.
학교 다닐 때도, 엉덩이를 맞을 때면 다들 어떻게든 덜 아파보려고 회초리의 리듬에 맞춰 엉덩이를 내리던 기억이 난다.
내가 한 짓은 그것의 판타지버전이랄까.
이것이 바로 생존 본능! 과연 맞으면 빨리 배운다더니, 고통을 피하고자 단련한 것이 교육이 아니라 이런 것이라 조금 서글프다.
“하나, 둘! 하나, 둘! 앞으로 걷고, 시선은 정면에!”
한참이나 메르엔의 지도에 맞춰 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 저녁이 가까워졌다.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석양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조금씩 능숙해지는 내 모습에 메르엔도 박수를 치며 오늘 교육의 끝을 알렸다.
“자. 기본 교육은 여기까지입니다.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한숨을 푹 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 불호령과 함께 회초리가 날아올 것 같아서 꾹 참았다.
그래. 이제 자유로군.
“끝났나?”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응접실에서 처음 만났던 그 남자.
석양빛에 맨들맨들한 머리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그 남자.
“오셨습니까.”
로베르토였다.
로베르토는 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르엔이 그에게 인사를 하고 나에게 로베르토를 소개시켜 주었다.
되도록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은데,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 샤일록 님. 인사하시죠.”
빨리 이 만남을 끝내고 싶었지만, 나의 바람은 메르엔의 소개에 의해 산산이 무너져 버렸다.
“식사예절 및 역사교육을 담당하신 로줄리 로베르토님이십니다.”
* * *
“…….”
호화롭게 차려진 음식들. 중국의 고대 황제처럼 한 입씩만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은 가짓수의 음식이 식탁 위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고기를 썰어 입안에 넣었다. 메르엔 덕분에 마력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늘어난 덕분에 음식을 먹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혓바닥과 식도, 위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마력을 코팅한다. 몸에 닿지만 않으면 거부감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다.
물론 이 힘을 풀어버리는 순간이 걱정되기는 한다. 혹시 모르니까 언제든지 토할 수 있도록 화장실에서 실험해 봐야겠다.
“식사가 별로더냐?”
로베르토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물었다.
음식은 먹고 있었지만, 마력 코팅 때문에 맛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이상한 표정을 지었나보다.
“아뇨. 그냥…… 배가 불러서요.”
내 대답을 들은 로베르토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나도 식사에 집중했다.
정확히는 마력조종에 집중한 거지만.
식사시간이지만 뭔가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냥 음식을 먹기 힘들어서가 아니다.
내 속을 더부룩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침묵이다.
식사를 하면서 우리가 나눈 대화는 방금 전에 한 이야기가 끝이었다.
로베르토는 식사 예절에 대해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온 게 아니던가. 그러나 그는 아무런 교육도 듣지 못하고 그저 식사만 하고 있었다.
“저…….”
어색한 분위기를 참다못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접시에 담긴 고기를 묵묵히 썰었다.
“교육은…… 안 하나요?”
말을 꺼내자마자 괜히 했다는 후회가 제일 먼저 밀려들어왔다.
사람이 말을 걸었으면 반응이라도 하는 게 정상인데, 로베르토는 여전히 자기 식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내 앞에 놓인 접시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메르엔이 낫다. 뭐라도 좀 하면 시간이라도 빨리 가는데 이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필요 없다.”
먼저 말을 건 것을 후회하며 메르엔의 회초리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갑자기 로베르토가 한참 전의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그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차피 네 교육은 모두 연회를 대비해서 하는 속성일 뿐이니까.”
“하지만 연회라면 음식도 먹지 않나요?”
드디어 로베르토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또다시 후회했다. 그의 눈초리는 ‘이런 한심한 녀석을 봤나’라는 질책의 눈빛이었다.
차라리 말로 하던가. 분위기가 싸늘하다.
“연회에서 네가 음식을 먹을 수나 있을 것 같나? 이 나라의 모든 귀족을 한 번씩 다 만나야 할 텐데, 그때가 되면 지쳐서 음식은커녕 쉬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을 거다.”
“그렇군요.”
“머리는 장식이 아니다. 생각을 하라고 달려 있는 게 머리다. 뭔가를 묻기 전에 왜 이렇게 됐는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라.”
이것이 언어폭력인가. 욕도 하지 않았는데 심장이 아프다.
“너도 이제 귀족이라면 그 정도 머리는 가지고 있어야지.”
말을 끝내고 로베르토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남은 음식이 식탁 위에 즐비해 있었지만, 그는 이마를 찡그리며 식탁 위를 한 번 슥 훑어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면서 로베르토가 내게 한 마디를 던졌다.
“한 시간 뒤, 역사 교육을 할 것이니 그리 알거라.”
그가 사라지고 난 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에 있는 화장실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불편한 자리 때문에 속이 체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마력 코팅의 효력이 다해서 생긴 구토감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우웩!”
그냥 게워낼 뿐.
얘들아. 부디 빨리 찾아줘. 연회까지 못 버틸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