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35화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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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귀족이라고 편한 것만은 아니다(1)

“끄응.”

우리는 핀을 침대에 눕히고 옆에서 한참이나 간병을 해주었다.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주고, 이불을 덮어주며 한시라도 빨리 쾌차하기를 빌었다.

핀이 이렇게 아파하는 것은 처음이다. 웬만하면 회복이 빠른 아이인데, 육체적인 충격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이라서 그런 걸까.

“그, 그 건방진 년을…….”

비몽사몽한 와중에 욕까지 하는군. 욕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는 안했었는데 말이야.

“으으…… 아빠. 그 여자 어디 있어요?”

잠시 기다리자 핀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세렌을 찾는 것이, 그녀가 떠나기 전부터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나보다.

“벌써 나갔어. 조금 더 쉬어.”

“끄응…….”

나는 다시 핀을 침대에 눕혀주었다. 기운이 없는지 핀을 눕히면서 너무나도 쉽게 뒤로 넘어갔다.

다시 자리에 누운 핀이 내게 물었다.

“아빠. 왜 여기 계세요?”

“나야 뭐, 일이 좀 있어서 왔지. 너는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저야 뭐…….”

핀과 나는 서로가 이곳에 오게 된 경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투제라는 양반과 싸워 서로 비겼다는 핀의 말을 듣고 난 뒤의 나의 감상은 대견스럽다기 보단 ‘역시 세렌이랑 되도록 만나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실수로 핀이 감정을 못 참고 때리기라도 한다면 그 후폭풍이 무섭다.

“여기가 용사의 가문이었구나…….”

나의 이야기를 들은 핀이 생각에 빠졌다. 그리곤 곧 내게 물었다.

“그럼 아빠.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건데요?”

“일단 당분간 지내면서 용사의 무기가 어디에 있는지 한 번 알아보고, 거기서 마력을 회수한 다음에 떠날 예정이야.”

“그냥 제가 한 번 찾아볼까요?”

“어떻게?”

“돌아다니다 보면 느낌이 오지 않을까요? 다른 것들도 전부 느낌이 왔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 같은데.”

“흐음.”

핀의 말을 듣고 보니 예전 일들이 떠오른다.

벨룸이 왔을 때도 핀이 적극적으로 그에게 덤벼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게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벨룸이 가지고 있는 용사의 무기 때문이라는 것도 금방 밝혀졌었다.

“그럼 여기 머무는 동안 핀이 한 번 찾아볼래? 필로우랑 너라면 금방 찾을 것 같네.”

“네. 알았어요.”

“알겠소이다.”

핀과 필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용사의 무기라는 이야기를 듣고선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고민에 빠졌다.

이곳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나를 대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갑자기 나타난 후계자에 대해서 처음엔 불신의 눈빛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인증까지 거쳤으니 앞으론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반슈트 가문에서 아라디온과 핀을 어떻게 대할지 정말 궁금하다.

세렌과 핀의 대화에서 듣기론 그들도 둘 중 한 사람이 엘레나의 자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그들이 나만 에반슈트 가문의 핏줄이 흐른다는 것을 증명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설마…….”

린셀을 믿고 싶지만, 해서는 안 될 생각이지만 혹시라도 어린 나를 꼭두각시 삼아 어떻게든 해보려는 것은 아닐까?

이미 다 자란 핀이나 아라디온보다는 내가 더 다루기 쉽고 교육하기 편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에이.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렸다. 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복잡한 생각을 자꾸 하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냥 아이들이 용사의 무기를 찾을 때까지만 버티고, 이곳에서 탈출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똑똑.

누군가 노크를 하며 문을 열었다.

처음 이곳에서 눈을 뜨고 만났던 예레니아라는 하녀였다.

그녀는 안에 들어와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도 그녀의 인사에 답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샤일록 님. 샤일록 님을 위한 방이 준비가 다 됐습니다. 그곳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응? 여기가 내 방이 아니야?”

그녀가 웃었다. 어린 아이의 순진한 이야기를 들은 반응이었다.

“여기는 손님방인 걸요. 이렇게 작은 방이 샤일록 님의 방일 리가 없잖아요.”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 내가 있는 방은 전생에 내가 살던 집만큼이나 거대한 원룸이었다.

그런 방을 ‘작은 방’이라 칭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속으로 ‘더러운 자본주의 사회! 부자들의 삶이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라는 생각이 절로 나왔다.

“그럼. 다녀올게. 나중에 봐. 부탁한 거 잊지 말고. 핀한테도 잘 말해줘.”

핀은 상당히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상당히 지쳤는지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아라디온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한 뒤 예레니아의 뒤를 따라 나섰다.

“다녀오십시오.”

아라디온의 인사를 들으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의 무기를 찾는 일을 잘 부탁한다는 뜻이었다.

복도로 나와 한참을 걷다가 나는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우리가 있던 건물은 별채였는지, 거대한 건물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쪽입니다.”

하녀를 따라 본관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나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대궐 같은 대문 앞에 서게 되었다.

“이곳이 샤일록 님의 방입니다.”

“어…….”

이거 어린애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내가 안내 받은 방은 거의 건물 한 층의 벽을 모두 허물어서 만든 것 같은 넓은 방이었다. 벽 쪽에 있는 수많은 책들은 얼핏 도서관을 떠올리게 하였고, 십 수 명이 누워도 모두 잘 수 있을 만큼 큰 침대를 보곤 벌어지는 턱을 다물 수 없었다.

“반갑습니다.”

다시 한 번 ‘더러운 자본주의 사회’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던 나는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 게 되었다.

말끔한 옷을 입고 안경을 쓴 노여사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럼 이만. 잘 부탁드립니다.”

“제게 맡기시지요.”

나를 데리고 왔던 하녀가 노여사에게 인사하곤 공손하게 뒷걸음질 치며 밖으로 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노여사와 나만 남아 있었다.

“저는 샤일록 님의 교육을 담당하게 된 메르엔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그런가요.”

나는 자신을 메르엔이라 소개한 노여사가 들고 있는 회초리를 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회초리는 잘 손질한 나뭇가지로 만든 것처럼 윤기 있고 단단해 보였다.

아니, 잠깐. 회초리?

그 생각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엉덩이 쪽에서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통증 뒤에 따라오는 후끈거림에 나도 모르게 손으로 엉덩이를 비볐다. 학창 시절 이후로 엉덩이를 맞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타인이 자기소개를 했을 땐 본인도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은 예법을 떠나서 기본적인 예의 아니겠습니까?”

“으……. 갑자기 무슨 예법이요?”

그녀가 다시 안경을 치켜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먹잇감을 노리는 매의 눈빛과도 같은 그녀의 시선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하신 겁니까?”

“네…….”

듣기는 무슨. 응접실에서 뜬금없는 시험을 당하고 나서, 바로 방으로 이동하고, 세렌이라는 여자한테 시달리다가 이제 겨우 쉬려고 했더니 이곳으로 끌려온 거라고.

“흐음…….”

잠시 신음을 내던 메르엔이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작은 목소리라 주변에 소음이라도 있었으면 듣지 못할 정도였지만, 방 안은 아무런 소음 없이 조용했고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과연 에반슈트 가문…… 무능하군요.”

무능하다니? 용사의 가문이?

그런 의문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그녀는 내게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려주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올 해는 에반슈트 가문이 생겨난 지 천 년이 되는 기념적인 해입니다. 그 정도는 알고 계시지요?”

설마 이런 기본 상식도 모르냐는 눈치를 주었기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투대회가 열린 것 아니었던가.

“그걸 기념하기 위한 연회가 모레 있을 예정입니다. 당신은 이 가문의 후계자로서 그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지요.”

“기념 연회? 벌써 한 것 아니었나요?”

나의 대답에 그녀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방금 전까지의 눈빛이 배부른 육식동물의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배고픈 맹수의 눈빛으로 바뀐 것만큼의 차이였다.

“그런 유치한 대회가 이런 명문가의 대표 행사일 줄 아셨습니까? 그건 단순한 서민들을 행사일 뿐입니다. 진짜 행사는 다른 귀족가문들이 모두 참석할 연회라는 사실을 모르고 계셨던 겁니까?”

“아쉽게도…… 하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알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좀 알려주고 타박하던가!

“모르셨다면 지금부터 차차 배우면 될 일입니다. 어쨌든, 모레 있을 연회에는 당신도 참가해야 합니다. 참가가 아니죠. 당신이 주인공이니까요.”

귀족들이 모두 모이는 연회라.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까.

그런 사람들 앞에서 내가 주인공이라니. 사람들 앞에서 내게 뭘 시키려고.

“귀하신 분들이 오시는 자리인데 실수라도 하면 안 되겠지요? 연회에선 기본적으로 모두가 당신을 주목할 것입니다.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가문의 평판을 결정짓게 될 겁니다. 지금처럼 예의 없는 모습을 보이신다면, 에반슈트 가문의 명성이 추락하는 건 시간문제겠지요.”

말을 끝내기 무섭게 그녀가 피식 웃었다.

나는 그 비웃음이 아까의 소곤거림과 겹쳐 들렸다.

입으로는 명문가, 명문가 떠들어대지만, 이건 마치 에반슈트 가문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굉장히 뒷맛이 찝찝하다. 메르엔 혼자만의 반응만 보면 꼭 에반슈트 가문이 왕따라도 당하는 기분이다.

아니면 내가 너무 과민 반응하는 걸까?

과거 세계를 지킨 용사들 중 하나의 가문인데 설마 그런 일이야 있겠어?

그때였다. 그녀가 회초리를 내 어깨 위에 올렸다.

나는 어깨 위에서 번들거리는 회초리를 보며, 아까 맞은 부위가 다시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므로, 아직 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은 오늘부터 특훈을 해야 합니다.”

그래. 모르면 배워야지.

근데…….

“연회는 모레라면서요. 예법을 삼 일 안에 배울 수 있나요?”

모르긴 몰라도 귀족들의 예법은 복잡하지 않을까?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내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은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배우고,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익힌다면 일이년이면 마스터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삼 일 만에 배우라고요?”

“아뇨. 필요한 핵심만 뽑아서 알려드릴 테니 그렇게 힘들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꽤나 힘들겠지만…….”

메르엔이 회초리를 치켜들었다.

“맞으면서 배우면 머리에 쏙쏙 들어오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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