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34화 (13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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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에반슈트 가문(7)

폭풍전야라는 말을 아는가.

폭풍이 오기 전, 평화로운 것처럼 위장한 것처럼 모든 것이 조용해지는 사태를 일컫는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 그런 경우를 본 적은 거의 없다. 가끔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한 두 번씩 목격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입장이라, 내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고래 싸움에 괜히 끼어들었다가 새우등이 터질 수도 있으니까.

“이 아이의 엄마…… 라고요?”

물론 지금이라고 바뀌었다는 소리는 아니었어. 제길.

두 사람 사이의 시선이 불똥을 튄 이후,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한 시한폭탄처럼 핀과 세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간마저 멈춰버린 것 같은 이 공간 속에서,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으으.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저 두 사람의 눈치만 바라보며 눈동자를 굴리는 일만 할 수밖에 없었다. 끼어들었다간 순식간에 폭풍이 몰아치며 폭탄이 터질 것만 같아서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아라디온. 어떻게 좀 해줘.’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지금 상황에선 아라디온 뿐. 하지만 녀석도 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몰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문틈으로 몸을 넘기며 나와 눈이 마주친 아라디온. 녀석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쓴 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이 배신자!’

도망간 아라디온을 쫓아간다는 명목으로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내 왼쪽 어깨는 핀이, 오른쪽 어깨는 세렌의 소유가 된 지 오래였기에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상황이 꼭 드라마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한 아이를 두고, 그 아이를 입양하려는 계모와 진짜 부모간의 숨 막히는 신경전이 딱 지금 상황이지 않은가.

한국의 드라마였다면 어떤 내용이 펼쳐졌을까. 이런 분위기 속에 젖어 있다 보니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자꾸만 그쪽에 관한 내용이 떠올랐다.

‘이 아이는 우리 가문의 후계자가 될 아이에요. 당신은 이제 빠져주세요.’

‘하지만…….’

‘왜요?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라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나요? 아니면 전에 줬던 돈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건가요?’

‘아니에요! 그때 받은 돈, 다시 돌려드릴게요. 그러니까 이 아이만큼은 제발!’

‘계약이 다르잖아! 벌써 잊은 건 아니겠죠? 당신 역할은 여기서 끝났어!’

‘안 돼! 제발! 그 아이만큼은!’

……삼류 신파극 같은 내용이 되 버렸군.

근데 원래 이런 내용이 인기가 좋은 법이다. 너무 혁신적인 내용은 시청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거든.

뻔한 내용이 욕은 들어 먹지만 시청자들이 원하던 내용에 적합해서 더 잘 받아들여지는 법이니까.

“이 아이가 지금 당신의 아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나의 뇌 내에서 핀이 코 옆에 점 하나 찍고 장성한 아들 앞에 나타나는 장면을 재생하고 있는 그때, 세렌이 침묵을 깨고 먼저 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에 가까웠기에, 나는 아직 폭풍이 시작도 안 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요. 그러는 당신이야 말로 무슨 일이길래 저희 아들한테 이상한 말을 시키는거죠?”

“이상한 말이라뇨? 무슨 이야긴지 모르겠네요.”

“엄마라고 부르게 시켰잖아요.”

세렌의 무표정이 깨졌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분노하지 않았고, 오히려 의기양양한 표정 위로 여유 넘치는 웃음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엄마니까 당연히 엄마라고 부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어머. 그거야 생물학적으로나 그런 거죠. 정신적으론 이미 이 아이는 저희 가문의 아이랍니다. 그건 이 아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걸요?”

아니, 이 사람이 진짜. 내가 언제 동의했다고 그런 말을 마구 내뱉는거야.

세렌의 말에 핀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선이, 내 마음 속에서 자동 번역되었다.

‘그게 사실이에요 아빠?’

“어…… 그게…….”

“잠깐만요. 이렇게 어린 아이한테 뭘 묻는 거예요. 아이들은 어렸을 때 쉽게 상처 입는다는 몰라요?”

자기가 진짜 엄마라고 생각하는지 세렌이 외쳤다. 그녀의 마음 속에서 이미 나는 자신의 아들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근데 아이가 상처받지 않게 하고 싶으면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그렇게 싸우면 안 되지.

“자. 아가야. 잠시 엄마는 이 사람이랑 할 말이 있단다. 밖에 잠깐 나가 있어 주지 않을래?”

이 자리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문으로 달려갔다.

핀이 나를 바라봤지만, 핀 역시도 내가 없는 편이 싸우기(?) 편한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후아.”

“괜찮으십니까?”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라디온이 내게 물었다. 언제 데리고 나갔는지 필로우도 그 옆에 함께 있었다.

“이 배신자들…….”

“배신자라뇨. 원래 여자들끼리 싸울 땐 남자는 빠지는 게 상책입니다.”

“누가 그러는데?”

“그냥 제 경험상입니다. 여자들 싸움에 끼어봐야 불똥만 튀지 도움도 안 되고 피해만 입거든요.”

아라디온은 과거를 떠올렸는지 갑자기 몸서리를 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도 일리가 있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누가 보면 세상 다 살아본 사람인 줄 알겠네.

아. 이 녀석 엘프였지. 웬만한 인간보다 몇 배는 더 오래 살았을 테니 당연한 건가.

“그럼 어디 다른 곳으로 이동할까요?”

“아니. 여기서 몰래 엿들어야지 가긴 어딜 가.”

나는 문으로 다가가 귀를 밀착시켰다. 안에서 세렌과 핀이 말하는 소리가 내 귀로 전달되었다.

아무리 여자들의 싸움에서 피하고 싶었다고 해서 핀을 그냥 두고는 갈 수 없지 않는가.

“그럼 이제 속 터놓고 이야기 해볼까요?”

“터놓을 게 뭐가 있겠어요. 위그드라실은 오늘 중으로 제가 데리고 가겠어요.”

“위그드라실?”그러고 보니 세렌은 내게 이름을 물은 적이 없었다.

자기 아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땐 언제고 이름도 모르고 있었던 거냐.

하지만 세렌의 다음 대사를 듣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 아이의 이름은 샤일록이에요. 위그드라실이라니. 그런 촌스러운 이름으로 불러주지 말아주실래요?”

그녀는 애초부터 내게 이름을 물어볼 생각이 없었나 보다. 이미 내 이름을 따로 지어두고 있었군.

샤일록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베네스의 상인에서 나오는 유태인 출신의 악덕 상인 샤일록.

모 게임에서 등장하는 돈 밝히는 고블린 출신의 상인 샤일록.

또 다른 게임에서 나오는 고리대금업자 캐릭터인 샤일록.

……어째 썩 마음에 드는 이름이 아니다. 이거 완전 돈 밝히는 쪽으로 특화된 이름이잖아!

“뭐라고요? 왜 당신이 마음대로 저희 아이의 이름을 정하는 거죠?”

“물론 이젠 제 아이니까요.”

핀이 부들부들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부탁이야 핀. 때리지는 말아줘. 네가 때리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왜 제 아이가 당신 아이라는 건지 설명 좀 해주실래요?”

“뭐, 당신이나 그 멀대같은 양반이나 둘 중 한 사람이 저희 달링의 딸이랑 결혼했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그 자식이거나.”

목소리만 들어보면 벌써부터 핀의 패배가 예견된다.

원래 말싸움은 먼저 흥분하는 쪽이 지는 거니까. 흥분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논리적인 반박은 불가능하거든.

“아마 아까 나간 남자 엘프쪽이 짝 눈인 걸 봤을 때 가능성이 더 높겠네요. 어차피 상관없지만.”

세렌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나는 뭔가 지금 이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로 이 집안의 후손이라면, 왜 나한테만 그 단검을 통해 후계자가 맞는지 통과의례를 거친 것일까?

지금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미 에반슈트 가문은 아라디온을 엘레나의 자식이나 또는 반려자라고 추측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아라디온에게 내가 겪은 통과의례를 시키는 것이 정상 아닌가?

왜 손자나 증손자로 추측되는 내게만 시킨 거지?

이것도 귀족 아니, 높으신 분들 특유의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인가?

내 생각이 어찌됐든 세렌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핀은 여전히 그녀의 속사포 같은 말솜씨에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당신들은 이제 빠져줬으면 좋겠어요. 그이라면 마음이 약해서 당신들을 이곳에 머물게 해줄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런 꼴은 별로 보고 싶지 않네요.”

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나는 잘 알 수 있었다.

이미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시나리오 중 하나였으니까.

“이 돈이면 충분할까요?”

나왔다! 그래! 바로 이거야!

돈이면 뭐든지 다된다는 기득권의 상식을 파괴하는 행동!

이 이상의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핀이 무슨 표정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볼 수 없었기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위그드라실님. 이건 좀…….”

“……그렇지.”

아라디온의 말에 나는 이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드라마 같다고 해서, 실제로 드라마인 것은 아니잖아.

내가 연관되어 있고, 실제로 겪는 현실인데 마냥 이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들어가자.”

두 사람의 싸움을 어떻게든 말려보기 위해 우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때,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안경을 쓴 차가운 표정의 그녀.

도리스였다.

그녀는 우리들의 안색을 한 번씩 살펴보더니, 우리를 제치고 먼저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열어 제친 문 안쪽으로 나는 핀과 세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핀. 많이 참았구나.’

내 예상대로 핀은 주먹을 움켜쥐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옷을 벗겨보면 등에 건전지가 들어 있는, 로봇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머. 도리스? 여긴 무슨 일로?”

“응접실에서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다 끝나서 모시러 왔습니다.”“아. 그래요? 알았어요.”

세렌이 활기차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갈색의 큼지막한 자루를 볼 수 있었다.

“이건 여기 두고 갈게요.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세렌이 도리스와 함께 복도로 사라졌다. 나는 우리들도 불러줄 줄 알았는데, 우리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도리스를 보며 아직 그들만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핀. 괜찮아?”

안으로 들어가 핀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어서 손으로 핀을 살짝 건드려보았다.

핀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꼿꼿한 석상처럼 뒤로 넘어가 버렸다.

“피, 핀!”

“끄, 끄윽……. 혀, 혈압이…….”

그래. 많이 참았구나. 잘했어.

이거, 핀이 고혈압으로 쓰러지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조만간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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