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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에반슈트 가문(6)
“안 돼!”
새하얀 이불보를 걷어차며 핀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턱 아래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여기는……?”
잠에서 깨어난 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천장과 방 안은, 환자들이 몸을 눕힐 법한 병실 같은 분위기였다.
“무슨 악몽이라도 꾸었나? 식은땀까지 흘리던데.”
핀이 목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맞은편 침대에서 들려온 소리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싱에게서 나온 목소리였다.
그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중상을 입은 환자의 모습처럼 보였지만 표정은 개운한 표정이었다.
“끔찍한 꿈을 꿨어요.”
“무슨 꿈을 꿨기에 그러지?”
“꿈속에서 장막을 들추고 그 너머를 봤어요. 거기엔 아빠가 웬 여자한테 안겨서 ‘엄마’라고 부르는 모습밖에 없었어요…….”
“……개꿈이로군.”
몸을 일으킨 핀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마력이 다시 움직이는 것을 느꼈고, 삐걱거리는 전신에 마력을 순환시켜 기분 좋은 간지러움을 느꼈다.
다친 상처들이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은 완전히 치료되었다.
“신기하군. 치료 마법도 할 수 있는 건가?”
“그냥 제 마력이 원래 그 쪽으로 뛰어나서요.”
“나도 치료해 줄 수 있나?”
놀란 눈으로 핀을 바라보던 싱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개운한 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에서 고통의 신음이 다부진 입술을 벌리고 튀어나왔다.
“한 번 해볼게요. 이리 오세요.”
“끄응. 이렇게 다쳐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싱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핀이 그에게 마력을 불어 넣었다.
서서히 그의 몸을 순환하며 핀의 마력이 싱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응? 이건…….”
붕대 아래에서 싱의 파열된 근육들이 치료되며 부풀어 올랐다.
팽팽하게 감겨 있던, 그의 몸을 감싼 붕대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붕대가 사라지고 나타난 그의 몸은, 푸르고 검은 멍들이 모두 사라진 건강한 상태의 육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휴. 처음 해보는 거였는데, 생각보다 잘됐네요.”
“…….”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 보던 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돌리며 팔다리를 움직여보던 싱은, 손목을 돌리며 핀에게 물었다.
“자네, 정말로 정체가 광룡인 건가?”
핀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싱과 눈을 맞췄다.
그에게 딱히 자신의 정체를 알려준 적은 없지만, 그녀는 지난 번 싸움에서 자신을 광룡이라 단정 지은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정체를 숨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맞아요. 정확히는 광룡의 힘을 얻은 거지만…….”
“그렇군.”
다시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은 싱이 문으로 향했다.
핀은 눈으로 그의 뒤를 쫓다가 밖으로 나가려는 그에게 물었다.
“어디 가세요?”
“창피해서 이곳에 더는 머물 수 없겠어. 투신이라는 작자가 실려왔으니, 다들 보지 않았겠나.”
나름 자존심이 강한 싱이 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그는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다시 뒤를 돌아 핀을 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핀의 얼굴을 보며, 싱이 눈살을 찌푸렸다.
“귀여운 척하지 마. 나한텐 안 통하니까.”
“……한 적 없는데요.”그녀의 대답에 한숨을 내뱉은 싱이 나가기 전 핀에게 경고했다.
그것은 그의 경험과, 핀의 앞날을 걱정한 그의 충고였다.
“그 힘, 너무 많이 사용하지 말게. 계속 사용하다간, 언젠가 그들과 만나게 될 거야.”
“네? 그들이요?”
그가 자신의 장갑을 툭툭 건드렸다. 핀은 이제야 떠올랐는지 그와의 약속을 생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그거! 말해주기로 했잖아요!”
“비겼으니까 말 안 해! 규칙은 규칙이다!”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떠는 핀. 그녀가 무슨 행동을 보이든 싱은 별 상관없다는 듯, 할 말을 끝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큰 소리를 내며 싱이 나간 문이 닫혔다.
잠시 동안 분노의 눈초리로 문을 바라보던 핀은, 그가 말한 말의 뜻을 생각하며 그의 뒤를 쫓아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깐만요! 그들이 누군데요!”
* * *
“그러니까, 그게 정말 사실이라는 건가요?”
“그런데. 왜?”세렌의 무릎에 앉아 그녀의 보살핌을 받으며 나는 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가 해준 이야기들은, 마치 한국의 드라마를 보는 것만 같아서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정말로요? 진짜로? 거짓말 안 하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나는 그녀를 취조하듯이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물론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 현실에서도 충분히 벌어질 법한 이야기고, 뉴스에서도 이런 경우를 보도한 적이 몇 번 있기는 했으니까.
근데,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맞다니까. 나랑 린셀 씨는 결혼한 사이라니까.”
어떻게 자기 손녀뻘 되는 여자랑 결혼을 하냐고!
세렌이 내게 자신을 엄마라 불러달라는 요청에 나는 이 집안의 계보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다행히도 곧 자신의 아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요컨대 이 집안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린셀이 아내와 결혼한 뒤, 딸인 엘레나를 낳았지만 내가 그에게 들었던 이야기처럼 딸은 엘퀴라즈 숲으로 가서 행방불명되었다.
그녀의 소지품이 필로우의 수집품 속에 있던 것으로 봐선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숲이 정화되지도 않았었으니까.
어쨌든, 그녀가 숲으로 떠나며 실종된 이후로 린셀의 아내는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린셀은 슬퍼하며 홀몸으로 살아가게 된다.
여기까지는 그저 눈물겨운 린셀의 인생극장으로 봐줄 수 있다.
“엄마라고 부르기 싫니?”
근데 왜 인생극장이 끝나니까 사랑과 전쟁이 되는 거냐고.
딸이 실종되고 아내까지 잃은 린셀은 재혼을 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왔다.
그에겐 귀족이라는 책무가 있었고, 슬픔에 잠겨 살기엔 그가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슬픔이란 원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무뎌지고 잊혀져가게 마련이기에, 그는 점점 다시 예전의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회복에 가속도를 붙여준 것이 지금 나를 무릎에 앉히고 있는 세렌의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그게 좀…….”
……여기까지 이야기했다면 무슨 내용인지 눈치가 빠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 세렌의 할아버지는 바로 린셀의 친구였던 것이다.
그녀가 말해주길, 그녀의 원래 가문은 로줄리 가문.
이름은 듣지 못했지만 그녀의 할아버지는 그 로줄리 가문의 가주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린셀의 가문인 에반슈트 가문과 로줄리 가문은 깊은 교류를 가지고 있었다. 거의 정치적 동반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함께 고난을 겪기도 하고 그것을 헤쳐 나가기도 하는 관계였다.
그런 가문의 두 가주가 친하지 않을 리가 없었고, 린셀과 로줄리 가문의 가주는 절친한 친구로서 함께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친구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 유언으로 린셀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나의 손녀딸이 걱정되니 자네가 그 아이를 보살펴줄 수 있겠나?”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손녀라고 한다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귀여운 자식이니까.
흔히들 딸 바보니, 손녀바보니 그 소중함을 단어로까지 표현하잖아.
근데 린셀 공. 친구 분이 말씀하신 보살펴 달라는 뜻이 함께 몸을 부비며 살라는 뜻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응접실에서 사람들이 보여준 세렌에 대한 적개심도 이해가 되었다.
린셀 같은 귀족이, 그것도 나이 지긋한 사람이 친구의 손녀딸과 먼저 결혼하고자 하지는 않았겠지.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세렌이 먼저 접근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애교 있는 목소리와 행동은 그 의심에 더욱 불을 지폈을 것이고, 사람들은 세렌을 불여우처럼 보고 있는 것이다.
전부 나의 추측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렇게밖에 안 보이는 걸.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불러주지 않을래? 응? 어차피 앞으론 엄마라고 불러야 하잖아.”
“으으…….”
그녀가 자꾸 엄마라고 불러달라고 조른다.
어차피 엄마라고 부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한 번 불러줄까.
“어…… 엄…….”
내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려고 하는 그 때, 복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그자들이 누구냐고요.”
“몰라도 돼. 넌 너무 어려서 들어도 아무 짓도 못할 테니까. 그냥 앞으로는 좀 자제하면서 살라고.”
“이미 제 존재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걸요? 그러지 말고 좀 알려줘요.”
“아니, 널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네가 쓰는 그 힘을 아는 게 문제니까 그렇지.”
언성을 높이며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이 목소리.
핀의 목소리였다.
“피, 핀!”
세렌의 무릎에서 벗어나 핀을 부르며 문을 향해 달렸다.
어째서 핀이 여기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선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핀이 있으면, 핀을 만난다면 이 이상한 함정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뿐이었다.
“아빠?”
내가 문고리를 돌리기도 전에 핀 쪽에서 먼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
문은 안쪽으로 열리는 문이기에, 나는 문에 머리를 부딪치며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윽!”
“아가야!”
골이 띵하다. 이마를 만져보니 벌겋게 혹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내가 넘어진 것을 보고 세렌이 재빠르게 다가와 내 이마를 손으로 만져주었다.
그녀의 행동이 부담되기는 했지만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아…… 빠?”
“핀? 여기는 어떻게 왔어.”
“저야 저 사람이랑 싸우고…… 앗! 도망갔다!”
복도 너머를 가리키며 누군가를 향해 소리치던 핀이었지만, 내가 우선순위인지 방 안으로 들어와 세렌에게서 나를 빼앗아갔다.
“아빠.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다행이다. 핀이 우리를 찾아 도시를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같은 곳에 있었구나.
내 머릿속의 계획이 슬슬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용사의 가문이라고 했겠다. 필로우나 아라디온에게 부탁해서 이 집안에 있을 용사의 무기를 찾는다.
그리고 세계수의 마력만 흡수하고, 도망치자.
핀도 왔겠다, 이제 계획대로 실행하고 떠나면 끝이다.
좀 더 머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 마음은 세렌의 부담스러운 애정 행위에 의해 사그라졌다.
이 정도까지 해준 것만 해도 린셀의 호감에 대한 보답은 끝이라고.
“아빠?”
이것은 핀이 한 말이 아니다. 세렌이 한 말이다.
그녀는 나와 핀을 번갈아 보더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핀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저는 아…… 가 아니라, 이 아이의 엄만데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누구시죠?”
세렌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핀의 눈빛도 거기에지지 않을 만큼 강한 번개를 뿜어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맞닿은 곳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처럼 보이는 건 환각일까.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뜨거운 화염 아래에 폭풍의 핵처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