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32화 (1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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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에반슈트 가문(5)

“아아…….”

침대에 하루 종일 누워 있으려니 몸이 나른하다.

사람은 잠을 자도 왜 피곤한 걸까?

“왜 그러십니까?”

“심심해…….”

응접실에서 내가 단검을 빛낸 이후로, 나와 아라디온은 내가 머물렀던 방으로 이동 당했다.

아마 자신들끼리 상의할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린아이인 나와 외부자로 판단된 아라디온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하나보다.

“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귀찮아…….”

그 방 안에서 신경을 너무 많이 썼다. 소설에서 나오듯이 긴장하면서 심력(心力)을 많이 썼다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거의 일 년 동안 남한테 쓸 심력을 그곳에서 다 쓴 것 같거든.

“근데 위그드라실 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방 안에서 자꾸 저를 보시던데. 무슨 뜻이라도 있던 거였나요?”

“…….”

크윽. 역시 그 대화는 모두 나의 상상일 뿐이었단 말인가. 나는 사방에서 압박받는 그 순간에 나 홀로 싸웠던 것이었단 말인가.

뭐, 대충 알고 있었지만.

“주공.”

내 옆에서 함께 누워있던 필로우가 말을 걸었다. 필로우는 꾸물꾸물 기어 올라오더니, 내 얼굴 바로 옆까지 올라왔다.

나는 필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나와의 접촉에 꿈틀거리며 반응하는 게 귀여웠다.

“그냥 나가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응? 왜?”

“소인이 생각하기에 굳이 이런 곳에서 발목을 붙잡힐 필요는 없다고 보오만…… 숲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이까?”

필로우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 역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곳에 묶여 있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후계자 문제든, 세렌이라는 여인이 다른 사람들과 트러블이 있든 전부 이 집 사람들의 문제가 아닌가.

거기에 내가 끼어들 필요는 없다. 내가 에반슈트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져도, 필로우와 아라디온이 있으니 도망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정 위험하면 핀도 있으니까.

근데 핀도 찾아야 하는데. 으으.

조만간 다시 밖에 나가봐야겠다. 숙소로 간 거 아니야?

“아니. 조만간 기회를 봐서 나가자.”

딱히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한 것은 아니다.

분위기를 봐선, 집안싸움이 한창인 것 같은데 거기에 휘말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해서 그들의 말을 따라준 이유는 모두 린셀 때문이었다.

“그 할아버지. 이상하게 호감이 간단 말이야.”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한 것일까.

만난 시간을 따져본다면, 린셀과 나는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분수대에서의 만남이 끝이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라고 해서, 그와의 만남이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짧은 시간동안 나에게 이 정도 호감을 느끼게 한 그 시간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있다면, 그와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인간일 적의 이야기고, 할아버지가 있었다면 토종 한국인이었을 테니 린셀과 똑같지는 않았겠지.

내가 그들의 말에 순순히 따라준 것도 그 때문이다.

단지 한 사람과 이어진 인연이자, 그에게서 느끼는 호감 때문에 그가 곤란한 것이 마음에 자꾸만 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이 커지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다는 마음 때문에 행동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일 저지르고 수틀리면 튄다고 해야 할까. 물론 진짜로 그러는 건 마음에 좀 걸리겠지만.

게다가 걸리는 것이 하나 있다.

에반슈트 가문에 대해 우연히 듣게 된 그 정보.

“그리고 걸리는 게 하나 있거든.”

바로 이들이 용사의 후손이라는 사실이다.

그 말은 즉, 어머니의 유품이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 아닌가.

뭐, 딱히 린셀이 어머니의 유품으로 나쁜 짓을 저지를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무기에 서린 세계수의 기운을 빼가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아버지의 유품을 손에 넣지 못했으니, 이거라도 제대로 해두고 싶다.

물론 한 번 이쪽 집안 선조인 용사에게 넘겨준 무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고 싶기도 하고.

그나저나 기운을 빼내어 갈 수 있을까?

예전의 경험에 따르면 꽤나 어마무시한 양이 서려 있을 텐데.

정령체로 흡수가 가능하려나? 정 안 되면 마력석에라도 어떻게든 담아봐야겠다.

“어쨌든 핀이 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자. 조만간 숙소로 돌아가서 핀을 데리고 와야겠네.”

근데 이야기를 하던 도중,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아라디온과 필로우를 쳐다봤다.

둘은 내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왜 그래?”

나는 상체를 세우고 그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시선은 살짝 열려진 문앞에서 멈춰 있었다.

“……저기.”

그 열려진 문틈 사이로 한 여인의 눈동자가 있었다.

응접실에서 다른 귀족들과 말싸움을 하던 세렌이라는 여인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은 부담이 되었기에, 나는 그 부담을 빠르게 털어버리기 위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녀는 응접실에서 보여줬던 당찬 모습은 어디가고, 수줍은 소녀처럼 부끄러워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 안녕?”

“……아. 네. 안녕하세요.”

부끄러워하면서 들어온 것과는 다르게, 세렌은 내 옆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봤다.

문틈으로 엿보던 것 이상으로 부담되는 행동이었다.

‘아라디온, 도와줘!’

외간여자에게 내성이 없어서 그런지 부담을 넘어서 두렵기까지 하다.

핀 외에 내가 다른 여자와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라고!

나는 응접실에서처럼 아라디온에게 구원의 시선을 보냈다. 이번엔 다행히도 내 신호가 통했는지 그가 세렌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 그게…… 아이가 보고 싶어서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지금 떨 이유가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포나 두려움으로 떠는 것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내 어깨를 꽉 잡고 있는 것이, 나를 만난 기쁨에서인걸까.

“흐음…….”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신음하는 아라디온.

그리고 그런 그를 제쳐두고 그녀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껴안기 시작했다.

“으앗!”

“헤헤. 정말 귀여워!”

얼굴에 물컹(?)한 무언가가 격렬하게 비벼지는 이 기분.

기분이 좋은 것 같으면서도, 갑자기 당하니까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이 격렬하게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여자라도, 아이의 힘으로 성인을 당해낼 수는 없는 법.

나는 그녀에게 빠져나오기 위해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 저기 좀 떨어져 주세요!”

“아, 미안. 숨 막혔니?”

세렌의 품에서 빠져나온 내가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쀼루퉁한 표정을 하고 있던 걸까. 그녀가 내 볼을 잡아 늘어트리며 말했다.

“삐친 모습도 너무 귀엽네.”

“으으…….”

그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폭발했다.

내가 무슨 인형도 아닌데, 이곳에 오면서 계속 남에게 휘둘리기만 한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 같았다.

으아니 챠!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고!

“그만둬요! 누구신지도 모르는데 왜 자꾸 만지세요!”

“아…….”

내가 격하게 거부하자, 세렌도 더 이상 나를 만지지 않았다.

대신에 더욱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미, 미안해…….”

아니,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나 같은 어린애가 몇 마디 했다고 눈물을 흘리는 거야.

호수라도 틀어놓은 것처럼 눈물을 펑펑 흘리는 세렌을 보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했다.

“우, 울지 마요.”

그래도 멈추지 않는 그녀의 울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품에 안기듯이 뛰어들어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만져도 되니까 제발 그만 울어요.”

“저, 정말?”

순식간에 밝은 얼굴로 바뀌며 방긋 웃는 세렌을 보니, 방금 전의 눈물이 모두 연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순수한 여인인 것 같다. 말 한 마디에 이렇게 감정이 휙휙 바뀌다니.

“헤헤.”

“하아…….”

나는 결국 세렌에게 내 몸을 허락(?)하고 말았다.

나를 무릎에 앉히고 좋아하는 그녀를 보니,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떠올라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저를 좋아하시나요. 우리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닌데.”

“그야 우리는 이제 아주 친밀한 사이가 될 거니까 그렇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녀가 말했다. 나는 세렌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우리가 친밀한 사이가 될 거라니. 아무리 좋은 시나리오를 떠올려 봐도, 내가 에반슈트 가문의 아이가 되는 것 말곤 떠오르는 게 없다.

린셀의 손자가 되어 이 집의 후계자가 된다. 그것 외에 다른 길은 없지 않은가?

물론 그렇게 되기 전에 도망갈 거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딱 여기까지라고. 린셀. 아무리 호감이 간다곤 해도, 호적을 파서 다른 곳에 붙이고 싶지는 않다.

“응? 혹시 나에 대해서 모르니?”

“네.”

내가 어찌 알겠나. 처음 길거리에서 만나 납치당하듯이 이곳으로 온 것 말곤 접점이라곤 없었는데.

솔직히 이름도 응접실에서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알지도 못했다고.

“내 이름이 뭔지 알아?”“세렌…… 아닌가요?”

“맞아. 세렌 에반슈트가 내 이름이야.”

“아!”

그렇다면 이 사람도 에반슈트 가문의 사람이라는 뜻이구나.

나는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려서 몸에 긴장이 느슨해졌다.

“이제 알겠니?”

“네.”

“그럼 한 번 가족처럼 나를 불러주지 않을래?”

가족이라. 린셀에게 딸은 이미 죽은 엘레나 뿐이니, 아마 친척일 것이다.

친척이라면 호칭 문제에서 자유롭지. 어떤 친척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여자친척에게 불러줄 호칭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그녀를 호칭으로 불러주었다.

“누나?”

“으음. 그거 아닌데.”

그녀가 입술을 만지며 내 호칭을 부정했다.

누나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고모?”

“아니.”

“이모?”

“아니야.”

“외숙모?”

“틀렸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호칭을 다 말해봤지만 그녀는 계속 틀렸다고 말할 뿐이었다.

참다못한 내가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상의 답은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럼 뭐라고 불러요?”

그녀가 부끄러운지 잠깐 뺨을 발그레 물들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호칭이었으니까.

“엄마라고 불러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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