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31화 (13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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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에반슈트 가문(4)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이전엔 그저 기대와 호기심, 의혹이 담긴 눈으로 수군거리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

하지만 단검을 받은 순간부터 수군거림은 완전히 사라졌다.

방 안에는 사람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려왔고, 조금 과장을 보태서 귀를 잘 기울이면 눈 깜빡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손이 떨린다. 내가 왜 이곳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건지 갑자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이 나라에 온 이유는 무투대회에 참가하고, 아버지의 유품을 손에 넣은 뒤에 시간이 남으면 아버지의 집을 구경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거늘.

그중에 하나도 이룬 것 없이 엉뚱한 곳에 발목을 붙잡혀 있다.

그냥 다 포기하고 도망칠까. 아라디온과 필로우가 있으니 충분히 가능할지도.

그 순간, 어깨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린셀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으윽. 갑자기 훈훈하게 그런 말을 하니까 더 부담되잖아.

나는 천천히 단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칼날의 예리함이 나의 심장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야 할까. 아니면 어딘가의 닌자들 마냥 엄지를 깨물어 피를 내버릴까?

아니, 근데 그게 가능한 일이야? 엄지를 깨물어서 피를 낸다니. 그거 완전 피부를 찢는 거잖아. 그렇게 상처를 내면 치료가 돼?

‘왜 망설이는 걸까요?’

‘흠. 역시 가짜인가?’

잠시 닌자의 자해 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하는 사이,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정말 기다림의 미학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단검을 들어 손가락 근처로 천천히 이동시켰다.

하지만 베는 것은 아직 용기가 생기지 않았기에, 나는 손을 떨며 계속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손가락을 베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인간이던 시절에도 여러 번 베여봤는데, 조금 쓰라릴 뿐이고, 지금은 상처도 순식간에 치료할 수 있으니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다.

내가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상처를 내야 한다는, 통증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 아니다.

이 짓을 하고 난 다음에 벌어질 여파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종의 통과의식을 거치게 된다면, 두 가지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첫 번째는 제대로 통과하는 미래다.

단검이 미쳐서 나를 이 집 자식으로 인정해 준다면, 지금 당장은 해피엔딩이 될 것이다.

나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이 빌어먹을 고비를 넘길 수 있고, 이 집 사람들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후계자를 찾았다는 기쁨에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은? 나는 그 이후에 다시 숲으로 돌아갈 건데?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미래에 대해선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두 번째는 통과하지 못했을 때다.

솔직히 이쪽이 가능성이 더 높다. 아니, 이쪽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나는 이 집 자식이 아니라고! 될 리가 없잖아!

과연 내가 에반슈트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게 될까?

분노한 사람들이 린셀을 비웃으며 사라질까?

그럼 린셀의 입장은 어떻게 되는 거지?

중세풍의 옛 소설에 나오는 사악한 귀족처럼 린셀이 나를 처벌한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내가 가짜라는 걸 들키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에반슈트 가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것일까?

아니, 이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첫 만남이야 그냥 자기 딸을 닮은 아이라 잘해준 것일 수도 있고, 지금은 자신의 혈육이라 생각해서 잘해주는 걸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자신의 혈육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사람이란 원래 겉만 보고 알 수 없는 법이니까.

지금의 모습이 가면을 쓴 모습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빨리 안 하고 뭐하는 거야?”

내가 계속 망설이자 주변에서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속삭이는 소리에서 이젠 직접 말을 거는 수준으로 언성이 높아졌다.

‘에라 모르겠다.’

더 이상 고민해 봐야 답도 안 나오고 슬슬 지쳐 가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홧김에 손가락을 단검에 가져다댔다.

“읏!”

내가 낸 소리가 아니다. 군중 뒤편에서 튀어 나오려는 필로우를 제지한 아라디온의 신음소리였다.

미안하네. 그렇게 나를 지켜주려고 했는데 내가 스스로 상처를 입혔으니.

핏방울이 검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나는 볼 수 있었다. 검 내부에서 벌어지는 마력의 잔치를.

‘과연…… 이런 구조였구나.’

정령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 큰 힘은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마력을 보고 느끼는 것은 가능했기에, 단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마력이 하나의 건물처럼 체계적인 구조를 띄고 있었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피가 그 건물 사이로 스며들어 미로를 헤매듯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다리 타기를 하듯이 미로를 이리저리 움직이던 나의 혈액이 어느 순간 멈추기 시작했다. 나는 혈액이 멈춘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저건 뭐지?’

혈액들이 멈춘 위치는 이상하게 생긴 문양을 중심으로 벽이 둘러쳐져 있는 어느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것에서 나는 그 이상한 문양이 이 마법의 핵심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문양을 둘러싼 벽들은 그냥 벽이 아니라 문처럼 약간의 틈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저곳에서 에반슈트 가문의 피를 확인하고 안으로 들여보내 주는 것일까. 이거 합격 불합격을 판단하는 심판관이 안에 존재하고 있었네.

“빛이 나지 않는군.”

로베르토가 심장에 비수를 찌르듯 정곡을 찔러왔다.

그의 말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실망과 경멸, 분노와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이미 끊어진 후계자가 다시 돌아올 리가 없잖아.”

“사기꾼이었나. 아무리 세가 기울어졌다고 해도 그렇지 명문가에 사기를 치려 하다니. 간이 부었군.”

“역시 그녀다운 방식이었네요. 아마 이렇게 잠입시킨 뒤에 양자로 삼아서 가문을 꿀꺽하려던 게 아닐까요?”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나와 아라디온, 그리고 세렌이라는 여인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선은 나에게서 아라디온과 세렌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어차피 나는 그저 이용당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거 참 오늘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엘프가 사기를 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저야 뭐, 종족 차별주의자가 아니니 당신만 그런 것이라 생각하겠습니다만…….”

“아니죠. 엘프가 사기를 치려는 게 아니라, 저 여자가 유혹한 게 아닐까요? 보나마나 어떻게든 가문을…….”

“아니에요! 전 그런 마음 따윈 추호도 없다고요!”

악을 지르며 사람들의 비난에 반박하는 세렌.

그런 반면에 아라디온은 멍한 표정으로 그저 이 사태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와 또 다시 눈을 마주쳤기에, 이번에도 눈짓으로 그에게 물어보았다.

‘아라디온. 괜찮아?’

‘뭐가 말입니까?’

‘사람들이 욕하잖아. 신경 안 써?’

‘뭐 어떻습니까. 위그드라실 님이 이 가문 사람이 아닌 건 진실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어차피 이것도 다 지나갈 일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냐. 근데 네가 그 말을 어떻게 알아. 그거 지구에서 유행하던 말인데.’

‘당연히 지금 대화가 위그드라실 님의 뇌피셜에서 나온 대화니까 알고 있죠.’

그렇지. 눈빛으로 대화는 불가능하지. 혼자 싸우는 것 같은 느낌에 자꾸 나도 모르게 시도하고 만다.

나는 이번엔 린셀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모습으로 세렌이라는 여인이 사람들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들이야 말로 뭘 노리는 거죠? 저를 모함해서 노리려는 게 뭔가요? 아하. 그렇지. 저를 끌어내리고 당신들 딸을 팔아치우려는 거 아닌가요?”

“말하는 것도 참으로 천박하군. 어떻게 그자한테서 당신 같은 딸이 나왔는지 의문이네!”

“천박한 건 당신들이겠죠!”

폭풍이다. 사람들의 감정이 휘몰아친다. 서로 칼만 들지 않았지 이곳은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전쟁의 중심이자 핵은 바로 나였다.

폭풍의 핵처럼 나만이 이곳에서 동떨어진 듯 조용했다. 나는 단검을 들어 다시 한 번 구조를 살펴보았다.

‘저걸 움직일 수만 있다면…….’

지금 상태로는 마력을 조종할 수 없었지만, 밑져야 본전이니 한 번 시도해 보았다.

기분이 마치 처음 나무가 되어 마력을 조종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움직여라. 움직여라!’

손도 대지 않고 리모콘을 가져오기 위해 초능력을 사용하고자 노력하는 백수처럼, 나는 마력으로 만들어진 미로 속에 있는 문을 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으으. 제발 움직이라고.

그래. 조금 다르게 해볼까. 원래 정신 집중이란 이미지가 중요한 거니까.

어렸을 때 EBS교육방송에서 해주었던 만화가 떠올랐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아서왕의 엑스칼리버를 본떠 만든 놀이공원의 한 세트장에 간 적이 있었다.

힘이 센 수많은 도전자들이 그 검을 뽑지 못하였는데, 겨우 초등학생에 불과한 주인공이 그 검을 뽑는데 성공했었다.

그 만화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주인공이 검을 뽑았던 방식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이빨을 흔드는 것처럼…….’

어린아이의 젖니가 흔들리는 상상을 하며, 마력의 문을 천천히 흔들어보았다.

처음엔 움직이지 않는가 싶더니, 상상처럼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좋아!’

그리고 막혀있던 혈액이 문을 흔드는 것에 가속도를 붙여주었고, 점차 흔들리던 문은 결국 떨어져 나가더니 혈액 아래로 파묻혀 버렸다.

‘떨어졌다!’

막혀 있던 문이 사라지자, 그곳에 정체되어 있던 혈액이 마력의 핵을 향해서 파도처럼 밀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집중해서 보고 있다가 순간 뿜어져 나오는 빛에 놀라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저 아이를 당신이……!?”

눈을 감은 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싸우다 말고 갑자기 조용해졌다.

눈의 쓰라림이 사라지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사람들의 놀란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역시…….”

뒤에서 린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

손에 든 단검에서 끊임없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나는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단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빛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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