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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에반슈트 가문(3)
응접실 내부에는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니,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마치 내가 재롱을 부리길 기다리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저 아이가?’
어떤 이는 흥미와 호기심에 젖은 눈빛으로.
‘흐음. 사기꾼이 아닐는지.’
어떤 이는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빨리 끝냈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어떤 이는 무관심과 허무를 담은 눈빛으로.
‘확실히 닮았군요.’
마지막으로, 나를 누군가와 겹쳐 보는 이들까지.
“자. 저분들 모두 내가 아는 사람들이란다. 인사해야지?”
그렇게 각양각색의 사람들 앞에 선 나는, 린셀의 말에 따라 공손하게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위그드라실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과도한 시선을 받으니 현기증이 날 것만 같다.
나는 사람들 뒤쪽에서 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아라디온에게 구원의 시선을 보냈다.
‘아라디온. 도와줘.’
‘어떻게 도와드립니까. 아니, 위그드라실 님. 왜 거기에 계신 겁니까?’
‘나도 몰라.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내가 이 집 아들이래.’
‘언제 호적을 옮기셨습니까?’
‘옮긴 거 아니거든? 어쨌든 나 좀 여기서 꺼내줘!’
‘이미 늦은 것 같은데요.’
자기 일 아니라고 스리슬쩍 웃음을 내보이는 아라디온.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불끈 쥐어졌다.
‘아니, 잠깐. 근데 우리 눈빛만으로 너무 대화를 구체적으로 나누는 거 아니야? 이거 마법이야?’
‘마법이 아닙니다. 대략 10%의 진실과 90%의 위그드라실 님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대화죠.’
그렇군. 어쩐지 눈빛만으로 너무 대화가 술술 진행된다 했어.
영화도 아니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귀여운 아이로군요.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에반슈트 가문의 후계자가 나타났군요.”
이전의 눈빛과 속삭임은 어디 가고 위선의 가면을 쓴 채 사람들이 나를 보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반항하고 싶지만, 소시민적인 새가슴을 가진 내겐 무리였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래도 분위기는 훈훈하게 흘러가고 있어서 다행이다. 사람들이 따뜻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내 얼굴의 긴장도 슬슬 풀려갔다.
그 순간…….
“그런데 이 아이가 정말로 에반슈트 가문의 아이가 맞습니까?”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하게 식어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꼭 무슨 모임에서든지 이런 사람이 한 명씩은 나온다.
흐름에 역행하는 사람이랄까. 모두가 하하호호 하는 와중에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라며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
“그런가요. 왜 그런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린셀도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는지 그에게 침착하게 물어보았다.
나는 감은 눈을 뜨고 이의를 제기한 사람을 보았다. 모두가 귀족차림이라 구분이 잘 가지 않았지만, 그 사람만큼은 한눈에 구분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루베르토 공.”
대머리였거든.
루베르토 공이라 불린 대머리의 남자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샹들리의 불빛을 반사시키는 그의 눈부신 대머리 때문에 눈을 찡그렸다.
“무엇을 의심하는 것인지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이미 그의 태클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는 사회 생활이 부족한 나조차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린셀은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루베르토 공이라는 남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그 말을 듣고선 이야기를 시작했다.
“린셀 대공께서 따님을 여의신 지 꽤나 오랜 시간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선 저도, 나아가서 저희 왕국도 모두 애석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 아이는 아주 총명한 아이였으니까요.”
시작은 나쁘지 않다. 우선 기분을 띄워주겠다는 것일까.
“하지만 따님의 아이라고 하기엔 나이 차이가 심하지 않습니까? 못해도 성인이나, 삼십대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아이의 손자일지도 모르지요.”
“손자?”
손자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손자란 중국의 병법가로서 과거 오호 십육국 시대의 전술가로 ‘손자병법’이라는 희대의 책을 남긴 사람이다.
……라고 말하며 이 싸늘한 분위기를 중화시키고 싶은데 어차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조용히 있자.
진짜로 몇 번이나 생각하는 건데 곰이 없으니까 내가 곰이 되가는 것 같아.
“그렇군요. 손자일 가능성도 있는 거군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더 문제가 아닙니까.”
“무엇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 아이와 확실히 닮기는 했습니다만, 거기에 손자라니. 너무 우연의 일치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가 린셀과 대화하며 느꼈던 점을 로베르토라는 귀족이 콕 집어 말해주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에반슈트 가문의 후계자가 나오지 않은 이 시점에서, 수십 년 전에 죽은 걸로 판단된 대공의 따님의 손자가 나타났다? 그것도 손자라는 애매한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확실히 의심되는 상황이다.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손자라는 위치가 정말 애매하지요. 그 가족 구성원과 닮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까요. 닮은 점은 가족이라는 말로 포장할 수 있고, 닮지 않은 점은 손자라서 다른 피가 섞여서 그렇다고 포장할 수 있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의 전형적인 위치가 바로 손자입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사라졌다. 모두가 로베르토라는 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도 말했듯이 지금 시점에서 손자가 나타났다니, 우연치고는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긴 시간이 있었으니 준비할 시간도 충분했겠다, 닮은 아이를 구하는 것도 쉬웠겠지요.”
긴 호흡의 말을 쏟아 부은 그가 뚱뚱한 배를 힘껏 부풀리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나를 힐끗 보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아이가 잘못됐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이 대를 보아하니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당하고 있을 확률도 크죠. 그렇다면 이 아이를 데리고 온 자가 누구입니까?”
“……세렌이오.”
세렌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세렌이 누구기에 이러는 것일까?
“그녀가 드디어 일을 저질렀군.”
“하지만 그녀가 저질렀다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데. 오히려 아이가 없어야 하지 않나?”
세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평이 좋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잠깐만요. 제가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다고 그러시는 건가요?”
사람들의 장막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로 세렌이라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저는 그 아이를 데리고 온 장본인이라고요.”
바로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던 여자였다.
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모함 아닌 모함을 받았다고, 분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렌 양. 거기 계셨습니까?”
“……당신들을 데리고 온 사람이 저라는 걸 잊었나요?”
“아. 그랬었죠, 참.”
세렌과 로베르토 사이에서 불똥이 튀겼다. 주변 사람들도 세렌이라는 여자에게 별로 좋은 눈초리로 보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사이가 나쁜 것일까. 제삼자인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삼자가 아니잖아! 내가 지금 이 자리의 중심인데!
“너무 뭐라 하지 마시죠. 당신의 행동을 보면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뭐라구요!?”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진다. 이러다가 치고받고 싸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조용히 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린셀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 조용. 이 자리에서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꺼내지 마시오.”
과연 대공. 그가 말을 꺼내는 순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멈췄다.
그냥 인정 많은 할아버지가 아니었나보다.
린셀이 내 옆으로 나섰다. 그리고 단검을 꺼내더니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모두들 알고 있는 유명한 물건인걸까. 사람들이 놀란 모습으로 단검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렇소이다. 잃어버렸던 에반슈트 가문의 가보이오. 이것으로 더 이상 무의미한 논쟁은 그만두길 바라오.”
하지만 그것으로 해결되는 것은 나에 관한 문제일 뿐, 아직 세렌이라는 여자와 얽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지 로베르토라는 남자가 세렌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것은 진품이오. 내 직접 확인하였소. 그리고…….”
린셀이 내 손에 단검을 쥐어주었다. 그의 웃음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만큼은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것으로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 * *
에반슈트 가문의 하녀, 예레나는 마당으로 나와 청소를 시작했다.
그녀의 빗자루는 상당히 숙련된 솜씨를 자랑했고, 바닥에 달라붙을 법한 낙엽이나 솔잎들도 순식간에 처리하고 있었다.
“아직 안 끝났나?”
그녀는 잠시 응접실 쪽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로 몇몇 인물들의 뒤통수가 보였지만, 높으신 분들과 인연이 없는 그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아. 밖에서 일하는 건 싫은데.”
그녀가 이곳에 취직한 이유는 집 안에서 일하는 것이 좋아서였지만, 막상 취직하고 나니 현실은 달랐다.
왕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큰 가문이라는 명성과 다르게, 에반슈트 가문은 상당히 검소했고 그로 인해 저택도, 고용인의 수도 평범한 귀족 가문 이하였다.
고용인의 수가 적으니 자연스럽게 한 명의 고용인이 해야 하는 일처리도 많았고, 그녀는 하인이나 할 법한 청소 업무를 하녀가 해야 한다는 현실에 좌절한 지 오래였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다들 언제 가시려나…… 응?”
그때, 그녀는 대문 너머로 누군가가 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곳에서 작은 체구의 한 소녀가, 밧줄을 질질 끌며 걸어오고 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예레나는 그 소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투신이라 불리는 엄청난 거물급 손님과 함께 왔던 아인족 소녀가 아니던가.
그녀가 인사하려는 찰나, 아인족 소녀가 끌고 오고 있는 물건들을 보며 순간 말을 멈췄다.
판자로 보이는 물건 위에 두 사람이 생선처럼 얹혀 있는 것이 아닌가.
덜컹거리는 판자 위에 있으면서도, 그들은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엘프족 여인이 ‘끄응’하는 신음을 내지 않았다면 예레나는 분명 시체로 판단하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렇게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곁을 아인족 소녀가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가며 인사했다.
“수고해.”
“아,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사람을 짐짝처럼 끌고 가는 아인족 소녀의 뒷모습을 보며 예레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높으신 분들은 다들 이상하단 말이야.”
그리고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