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29화 (12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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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에반슈트 가문(2)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는 되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딸아이와 닮은 아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아이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 아이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또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겨우…… 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나를 가문의 일원 취급하는 것인가?

가문의 일원.

그러니까 나를 엘리사의 자식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제가 에반슈트 가문의…… 사람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나이에 맞지 않게 영특하구나. 꼭 그 아이를 보는 것 같군.”

린셀이 내게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시선이 내가 가진 단검으로 가 있었기에, 나는 단검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혹시 이 검을 뽑아본 적이 있니?”

“네.”

맨 처음 단검을 발견했을 때 한 번 뽑은 적이 있었다.

다른 물건들과 다르게 날이 아주 잘 서 있는, 단순한 명검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런 비사가 엉켜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린셀이 단검을 뽑았다. 내가 숲에서 처음 뽑았을 때와 변함없는 모습의 검은, 여전히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창문에서 들어온 빛을 쪼개었다.

“이 검은 평범한 검이 아니란다.”

그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다른 검과 다르게, 희미하지만 마력이 서려 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녹슬지 않고 멀쩡하게 유지되어 있는 게 아니었던가?

린셀은 검날에 손가락을 대었다. 날카로운 쇳덩이가 그의 피부를 한겹 가르고 안에서 피를 꺼내 은빛의 도신에 머금었다.

핏방울은 천천히 도신을 적시며 손잡이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빛이…….”

도신에서 눈부신 빛이 한순간 파도처럼 흘러나오다 멈추었다.

검에 새겨져 있던 마법은 단순히 상태 유지만 하는 것이 아니었던 걸까?

그것을 보고 놀란 나를 보며 린셀이 웃었다. 그는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를 무시하며 책상으로 향했다.

“이런. 또 세렌에게 혼나겠군.”

그가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상처를 지혈할 때 쓰는 붕대와, 연고를 넣을 때 쓸 법한 작고 둥근 통이였다.

“지금 본 것처럼, 단검에는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단다. 하나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녹슬지 않게 형태를 유지시켜 주는 마법이고, 다른 하나는 방금 본 마법이지.”

린셀은 뚜껑을 열어 안에 든 반고형의 액체를 상처 부위에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나는 그를 도와주려 했지만, 한 손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그의 행위는 매우 능숙해서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바로 우리 가문의 피를 검에 떨어뜨리면 빛이 나는 마법이지.”

다시 내 앞으로 온 그가 단검을 내게 돌려주었다. 검집 아래의 작은 틈새로 아까 묻은 그의 피가 달팽이가 기어간 흔적처럼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신기하네요.”

“네가 나타난 것보다 더 신기하진 않구나. 너는 정말이지…… 우리에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

또 다시 느껴지는 린셀의 시선.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보지 말아줘. 당신이 뭘 바라는지는 알겠는데, 나는 그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단 말이야.

나는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딱딱한 검집의 감촉이 차갑게 느껴졌다.

지금 단검의 효능을 보여준 이유야 뻔하다.

나에게도 똑같은 일을 시키려는 것이다.

“처음 세렌이 너에 대해 알려줬을 땐 믿지 않았단다. 세렌의 친구들이 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구나. 오래 전에 잃어버려서 이야기로만 전해 내려오는 우리 가문의 가보이거늘, 그 친구들 중 한 명이 용케 그 모양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옷가게. 그렇다면 내게 강제로 여자아이 옷을 입힌 여인들 중 누군가가 세렌이라는 사람과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도 단검을 소지하고 있었으니, 옷을 갈아입히던 도중에 보고 알려준 것인가.

“너를 분수대에서 봤을 때 닮은 아이라고만 생각했었지. 하지만 단검을 가진 것을 보고 확신했단다. 그 아이와 닮은 데다, 가보까지 지니고 있는 아이가 혈육이 아닐 확률이 높을까? 아니면 혈육일 확률이 높을까?”

객관적으로 보자면, 나 역시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겠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 번 보여주지 않겠니?”

“네?”

“방금 내가 보여준 것 말이다.”

그가 문을 열었다. 나는 복도에서 무언가가 후다닥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아마 필로우일 것이다.

“사람이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법이거든.”

* * *

“…….”

아라디온이 응접실에서 조용히 차를 마셨다. 그윽한 차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좋네.’

보통의 엘프는 차를 마시지 않는다.

차 역시 식물의 잎을 따다 말린 후 우려낸 물이기에, 지금 엘퀴라즈 숲에 있는 엘프들은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을 할 것이며 평범한 엘프도 그다지 좋아할 그런 음식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곳의 차만큼은 아니군.’

고향인 이곳에 차 문화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문화였고,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지냈을 문화였다.

그는 여행지에서 차에 대해 잘 아는 동료를 만났었고, 그곳의 차를 마시며 식물에 대한 거부감을 없앤 지 오래였다.

‘향이 살짝 모자라는군.’

처음 겪은 맛이 추억 보정이 들어간 탓일까. 아니면 진짜로 그때의 차가 더 맛있었던 탓일까.

그는 모자란 맛과 향에 실망감을 느꼈지만, 과거를 추억할 수 있다는 것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꾸었다.

‘음?’

그렇게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향기를 만끽하고 있던 찰나, 아라디온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딱딱하고 차가워 보이던 여인.

스스로를 소개하길, 이곳의 하녀장이자 집주인인 린셀의 비서라고 말해주었던 금발의 안경을 쓴 여인, 도리스였다.

그녀는 말투에서부터 행동까지 딱딱했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필요한 말만 꺼냈고 그 외엔 일절 불필요한 행동과 말을 꺼내지 않았었다.

어딘가 계산적으로 보일 정도였지만, 비서라는 직업의 특성상 오히려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어디 불편한가?’

하지만 짧은 시간이었지만 보여줬던 그동안의 모습과 다르게, 그녀는 어딘가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냥 자리에 앉아 차가운 얼굴로 조용히 있을 뿐이었지만 아라디온은 알 수 있었다.

그 차가운 얼굴이 미묘하게 꿈틀거리고 있었음을.

그리고 계속해서 움찔거리는 아랫입술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해 입술을 뜯어먹는 사람들의 주된 버릇임을.

무엇보다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안경 너머로 문을 힐끗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고 그것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불안한 마음처럼 보였다.

“음?”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낸 아라디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얀 물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창문을 열자 창틀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필로우가 안으로 재빠르게 들어왔다.

‘어디를 그렇게 다녀 오셨습니까?’

‘혹시나 주공께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이 되어 몰래 다녀왔소이다.’

조그만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하지만 그 전에 아라디온이 낸 소리로 인하여 하녀장인 도리스가 그들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애완동물은 되도록 묶어두시지 않겠습니까? 카펫에 털이 날린다거나, 물건을 깨먹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 죄송합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초조함을 느끼고 아라디온이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필로우를 옆에 둔 그는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위그드라실 님은?’

‘이제 곧 오실 것 같소이다.’

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리면서 몇 명의 인물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 중엔 아까 나간 린셀이나 위그드라실은 없었고, 전부 아라디온이 처음 보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런데 아는 얼굴이 한 명 있었다.

“아. 잘 지내셨어요? 잠자리는 편안하셨나요?”

핀을 추격하던 어제, 위그드라실을 발견하고 달려왔던 여인.

그리고 이곳으로 자신들을 데리고 온 여인.

“예. 편안했습니다. 세렌 님도 간만에 평안하셨습니까?”

그녀가 자신을 세렌 에반슈트라고 소개해 주었던 것을 아라디온은 기억하고 있었다.

“저야 제 집이니 잘 지냈죠. 도리스. 차 좀 내와 주지 않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도리스가 나가고 세렌이 남은 자리에 함께 들어온 사람들을 안내해 주었다.

하나같이 지체 높은 귀족처럼 몸짓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엘프시군요?”

그들의 면면을 관찰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아라디온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귀족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깃털처럼 새하얗고 가벼워 보이는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두건처럼 생긴 세모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신성한 분위기까지 나는 것은 아라디온의 착각일까.

그는 처음 만나는 사람이건만, 그에게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예. 그런데 누구신지…….”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저는 신전에서 나온 우리엘이라고 합니다.”

“아.”

신전이라는 말을 듣고 아라디온이 기억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신을 모신다는 신관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옷차림을 이제야 떠올린 것이다.

“저는 아라디온이라고 합니다.”

“엘프분들은 만나본 적이 별로 없는데,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중하게 아라디온에게 소개를 마치고 인사한 우리엘은 평온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우리엘이 아라디온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제가 알기론 엘프분이 이곳에 들릴 일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무슨 일이신가요?”

“저희 아이가 이곳에 있어서요. 뭔가 일이 있다는군요.”

“흐음. 아이라 하심은 혹시……”

“린셀 대공께서 들어오십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하녀 한 명이 그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외쳤다.

몇몇 인물들은 벌써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린셀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저 아이가…….”

“정말로 후계자란 말인가? 나이 차이가 심한데?”

린셀이 안으로 들어오고, 함께 따라 들어온 위그드라실을 보며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대세에 따라 같이 일어났던 아라디온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아이가 설마 당신의 아이인가요?”

“예. 그렇습니다만.”

“조금 이상하군요. 에반슈트 가문의 후계자가 나타났다고 해서 왔거늘, 부모가 엘프라니. 흐음. 손자에게 이어진 격세유전인가.”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일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아라디온을 보며 우리엘이 말했다.

“모르셨습니까? 저희는 모두 끊어졌던 용사의 후손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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