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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에반슈트 가문(1)
린셀이 나타난 후, 나와 린셀 두 사람은 따로 방을 잡아 독대를 시작했다.
“…….”
분위기는 매우 어색했다.
분수대에서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호감이 느껴졌었는데, 이런 자리에서 만나니 어색하기 그지없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보통 ‘뻘쭘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사람은 뻘쭘하면 괜스레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습관이 있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러하다.
마시지도 못할, 테이블 앞에 놓인 찻잔만 아까부터 만지고 있었으니까.
“흐음.”
노인, 린셀이 차를 마시곤 그 맛을 음미했다. 표정은 여전히 은은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꼭 자연 같은 얼굴이다.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먼저 이야기라도 꺼내주면 좋으련만, 언제까지 차를 즐기고 있을 셈일까.
그런 내 마음이 통한 것일까. 린셀이 내게 물었다.
“차가 마음에 안 드니?”
“네? 아. 아뇨.”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도 모르게 허둥거렸다.
지적을 받았으니(딱히 지적 같지는 않지만) 나름 예의를 갖춘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나 속이 울렁거리는, 본능이 거부하는 맛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린셀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 할아버지, 지구에 있었으면 광고 좀 찍었을 것 같다. 웃음이 너무 좋잖아.
“나도 어렸을 땐 차가 맛이 없었지. 왜 이렇게 쓴 물을 마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단다.”
찻잔을 들고 향기를 음미하며 다시 한 모금 마시는 린셀. 아무래도 내게 차를 마시는 법에 대해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다보니 깨달았지. 차는 맛이 아닌 향으로 먹는다는 것을.”
찻잔을 내려놓고 린셀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못 이겨 나는 찻잔을 들었다.
그래. 나도 안다고. 향은 좋아. 맛도 뭐, 나쁘진 않겠지. 근데 생리적으로 안 받아들여지는 걸.
하지만 대놓고 말하기엔 나의 용기가 부족했고, 남의 집에서 내온 음식을 안 먹는다는 것은 또 눈치가 보였기에 눈을 딱 감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윽!”
“하하.”
뭐, 시도는 좋았지만 역시는 역시 역시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표정을 찡그린 나를 보고 린셀이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손녀딸과 할아버지로 보일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이야기의 물꼬가 트이자, 나는 린셀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저희를 찾은 게 할아버지인가요?”
“응? 아. 그렇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고, 아니라면 아니라고 할 수 있겠구나.”
애매한 대답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대답이랄까.
대신에 그는 뒤이어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네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진즉에 찾아다녔겠지만, 설마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단다. 솔직히, 그 아이가 살아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 갖은 노력을 다 해봤지만, 결국 죽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네?”
대체 무슨 소리지? 죽은 줄 알았다니?
사고가 따라갈 수가 없다.
내가 열심히 뇌 속 회로를 발동시켜서 그의 말을 따라가려는데, 린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보여주고 싶은 게 있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린셀이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로 이동했다.
나는 얌전히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고민해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자. 여기란다.”
그와 함께 도착한 곳은, 집무실로 보이는 아늑한 방이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가 풍기는, 그러면서도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작은 방.
“여기가 나의 집무실이지.”
집무실에 들어온 린셀은 정면에 보이는 책상으로 가더니, 그가 서랍을 열고 무언가를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 장의 그림이었다.
“이것은…….”
집무실 내부에 있던 의자에 앉아 그가 건네준 그림을 보았다.
작은 종이에 그려진, 마치 사진처럼 세세하게 그려진 그림은 그림이라기 보단 진짜로 사진처럼 보였다.
그림은 부부로 보이는 한 남자와 여자, 그리고 두 사람의 딸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인가요?”
보면 볼수록 그림이라곤 믿을 수 없는 품질에 린셀에게 한 번 물어보았다.
초현실주의풍의 화가가 이세계에도 있는 걸까?
“마법으로 만든 것이지. 사물을 그대로 종이에 옮기는 마법이란다.”
이세계에도 사진과 같은 마법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보다도 놀란 사실은, 그림 속의 인물들이었다.
조금, 아니 상당히 젊긴 하지만 훤칠한 키의 한 남성이 사진 중앙에 서 있었다.
낯익은 얼굴에 고개를 들어 린셀과 비교해 보았다.
이때의 모습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희미하게 남은 윤곽이나 분위기가 두 사람이 동일 인물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림은 그것 외에 특별한 건 없었다. 행복해 보이는 부부 사진과,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인 한 여자아이의 그림.
왜 내게 이 그림을 보여준 것일까.
“그 아이를 자세히 보렴.”
내가 답을 찾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자, 린셀이 친절하게 봐야할 것을 집어서 말해주었다.
여자아이는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나보다 서너 살 정도 나이가 많아 보였고, 꽤나 귀여운 모습의 여자아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자꾸 보다보니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위화감이라고 하면 안 되고,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랄까.
여자아이가 어디선 본 것처럼 매우 낯설다.
“어?”
그리고 나는 그 낯설음의 정체를 파악해 버렸다.
“저랑 닮았네요?”
그렇다. 그림 속의 여자아이는 나와 매우 닮아 있었다.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런 복제 인간 수준으로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 차이가 조금 있는 동생과 언니처럼 나와 여자아이는 한 가족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닮아있었다.
“그렇지. 혹시 어머니나 할머니 중에 그 아이와 닮은 사람이 없었니?”
그렇게 물어본들, 애초에 나무인 내게 이 아이와 닮은 가족이 있을리 만무했다.
있다면 어머니의 정령체가 조금 닮기는 했겠지. 나와 어머니는 거의 판박이 수준으로 비슷하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의 물음에 대답해 주자, 그가 내 앞에 있는 의자에 앉더니 아까 했던 이야기의 뒤를 이었다.
“그 사진 속의 아이는 내 딸이란다. 이름은 엘레나 에반슈트. 젊은 시절 아내와 함께 낳은 소중한 딸이지.”
여자아이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었다. 린셀의 젊었을 적 아이였다는 사실에 나는 다시 한 번 그림을 또렷하게 눈에 새기듯이 살펴보았다.
이 시절의 린셀은 20대의 청년처럼 보였다. 그럼 사진 속에 나온 딸은 지금 쯤 40대나 50대쯤 됐을까?
아쉽게도 이 저택에 들어와서 그 정도 나이의 여인을 본 기억이 없다.
“저기…….”
엘레나라는 린셀의 딸과 나의 이야기가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려했지만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말문을 멈추었다.
엘레나라는 린셀의 딸.
그녀와 닮은 나의 모습.
죽은 줄 알았다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
그리고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이 여자아이는 죽었거나 실종당했을 가능성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알아챈 것일까. 린셀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엘레나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실종됐단다.”
딸의 신변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은은한 미소 속에 씁쓸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저절로 몸이 긴장해버렸다.
“참 착한 아이였지. 그리고 영특했고, 딱히 간섭하지 않아도 바르게 자란 아이였단다.”
확실히 그림 속의 아이는 영특해보였다. 겉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렇게 바르게 자라주던 와중에, 어느 날 내 아내가 큰 병에 걸린 적이 있었지. 무슨 병이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하지만 의사도, 마법사도, 신전의 신관들도 치료가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젓던 무서운 병이었단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힐끗 그림 속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은 행복한 표정으로 그림 속에서 웃고 있었기에, 린셀의 이야기에서 감도는 불안한 기운이 그녀를 덮쳤을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찝찝했다.
“모두가 포기했기에, 나 역시 포기하고 있었지. 모든 방법을 동원해봤지만 아내를 살릴 수 없었으니까.”
무덤덤한 그의 목소리에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이번에도 나의 생각을 의식했는지 활짝 웃으며 이야기했다.
“지금이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때는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단다. 사람이란 참 신기하지? 시간이 흐르면 아팠던 기억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할 수 있다니.”
“…….”
여기에 대고 내가 무슨 맞장구를 쳐줄 수 있을까.
그냥 조용히 듣기만 하자.
“나는 포기했었지만, 내 딸은 포기하지 못했단다.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아내를 살릴 방법을 열심히 찾아다녔지. 그러던 중, 엘레나는 어디서 들었는지 엘퀴라즈 숲에 대해서 내게 말하더구나.”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엘퀴라즈 숲이라니. 그녀가 그곳에 갔단 말인가?
“나는 한사코 반대했지. 너는 그 숲에 대해 알고 있니?”
“……아뇨. 잘 모르겠어요.”
뭐라 말해야 할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그냥 모르는 척 해버렸다. 린셀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숲이 정화되었다는 소식이 돌고 있지만, 그 당시엔 아주 끔찍한 곳이었지. 마기가 가득 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단다. 그런데 하필 내 딸은 그곳에 세계수의 잔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내게 그곳에 가보겠다며 큰소리를 치더구나.”
이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될지 예상이 되었다. 숲이 완전히 정화된 것은 최근의 일이니, 그 당시의 그녀가 엘퀴라즈 숲에 들어갔다면…….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독단적으로 집을 나섰지. 사랑스러웠던 아이기에, 그 아이를 따르는 이들이 뒤를 따라 함께 엘퀴라즈 숲으로 갔단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후론 지금까지 그 아이를 볼 수 없었단다.”
조용했다. 세상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이라곤 나 자신의 숨소리뿐이었다.
그런 침묵을 깨듯이 린셀이 웃으며 나를 가리켰다. 나는 화들짝 놀라 조금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나타난 것이 바로 너란다. 내 딸과 너무나도 닮은 너. 처음 만났을 땐 그저 닮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구나.”
“어…… 왜요?”
슬픈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나는 곧바로 되물었다.
세상에 닮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최소한 세 명은 있다는 속설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린셀이 내 허리춤을 가리켰다.
“그게 있지 않니?”
나는 손으로 그곳을 만져보았다.
예전에 필로우가 모아두었던 잡동사니에서 얻은 단검이 그곳에 달려 있었다.
“이게 왜요?”
그리고 나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집무실 창문 위에 걸려 있는 하나의 액자였다.
“그건 바로…….”
그 액자에 걸려 있는 그림. 그 문양을 보고 나는 단검에 새겨진 문양과 비교해 보았다.
불을 뿜고 있는 용의 모습.
닮았다. 아니, 똑같았다.
“우리 가문의 후계자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물건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