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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27화 (12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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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결투(5)

응접실로 보이는 넓고 화려한 방 안에서, 나는 가만히 앉아 내주는 차의 향기를 맡으며 심신을 안정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위그드라실 님…….”

“왜.”

아라디온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최대한 표정에 화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찻물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상당히 얼굴이 찌푸려져 있었다.

어린아이가 얼굴을 찌푸려 봐야 귀엽기만 하니, 이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잘못했습니다. 화 푸세요.”

“무슨 잘못?”

내가 이렇게 화가 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래. 우선 이 저택에 오게 된 경위부터 설명하는 편이 낫겠지.

어젯밤, 우리는 핀의 자취를 따라 뒤를 미행하고 있었다.

아라디온의 추적술이 많은 도움이 되었고, 곧 핀을 따라잡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찾았다!”

그런데 한 여인이 나타나 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나는 부드러운 가슴과 여자 냄새가 확 풍기는 그녀의 품에 안겨, 깜짝 놀라 허둥거렸다.

“으앗! 누, 누구세요?”

그것은 평범한 안기가 아니었다.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꽉 끌어안은 팔은,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젖 먹던 힘까지 사용하는 것 같았다.

“아라디온! 필로우!”

“아아. 무서워할 필요 없단다. 아가야.”

나를 달래주듯이 말하는 여인.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봤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초면이었다.

“저기, 무슨 일이신가요?”

아라디온이 먼저 나서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 와중에도 여인은 나를 놓칠까 봐 품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아! 죄송합니다. 혹시 이 아이의 보호자 되시나요?”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기 전, 나는 여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초조함, 불안함 등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것 같았다.

“예. 그 아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요?”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어떻게든 이해해 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생각을 끝마쳤는지, 나와 아라디온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서로 안 닮으셨네요. 혹시 이 아이를 지켜주려고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뭐야. 이 여자. 진실의 눈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야? 어떻게 알았지?

우리들의 관계를 꿰뚫어 본 그녀를 잠시 의심해 봤지만, 나는 아라디온을 바라보며 그 의심이 타당하다고 느꼈다.

아라디온은 완전히 엘프고, 나는 완전히 사람의 모습이니까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

격세 유전인지 뭔지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그냥 겉모습만 본다면 부모자식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아뇨. 진짜로 제 아이가 맞습니다. 저희 조상께서 인간과 결혼…….”

“그럴 리가요. 거짓말 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녀의 눈동자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우리를 처음 본 사이임에도, 어째서 이렇게 확신에 찬 말투와 눈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일까?

나의 그런 의문과 궁금증은 그녀의 다음 한마디로 더욱 미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제 조카인걸요.”

* * *

“하하…….”

멋쩍게 웃으며 내 눈을 회피하는 아라디온을 보며, 나는 또다시 심기가 불편해져 찻잔을 들고 향기를 맡았다.

마실 수는 없지만, 그윽한 향이 일품이라 맡고 있으면 기분이 한결 편안해졌다.

“하아.”

뭐, 어찌됐든 우리는 그렇게 그녀의 주장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고,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오는 그녀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곳으로 찾아오게 되었다.

“그나저나 만나볼 사람이 있다고 하더니, 잠이 드는 바람에 못 봤네.”

이곳에 도착한 이후 우리는 응접실로 보이는 큰 방으로 안내받았고, 그곳에서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한 명은 오늘 아침 내게 수치(?)를 준 하녀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하녀에게 명령을 내렸던, 하녀장으로 보이는 안경을 쓴 차갑고 깐깐해 보이는 여자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겠니?”

그리고 /기억이 없다./ 따뜻하고 포근한 집안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소파에서 잠이 들어 버렸나 보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것이 끝나 있었으니까.

뭐가 끝났냐고?

뭐긴 뭐야. 내 그것(?)을 자는 도중에 사람들에게 공개당한 사건이지.

“아라디온. 왜 말리지 않았지?”

대체 왜 나의 그것을 확인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침에 하녀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때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돼 버려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거야, 본다고 딱히 닳는 것도 아니니까…….”

손에 쥔 찻잔이 부들부들 떨리며 물이 흘러 넘쳤다.

이런 분노,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 같다.

나와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아라디온은 잠시 제쳐두고, 필로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필로우는 조금 떨어진 소파 위에서 있었는데,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필로우…….”

내가 부르자, 필로우의 하얀색 털이 흠칫 놀라며 부르르 떨었다. 찔리는 것이 있는지, 죄인처럼 내 부름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왜, 왜 그러시오. 주공.”

“왜…… 말리지 않았지…….”

“그, 그게 소인은 /평범한/ 혼래빗인 척해야 하므로 말리고 싶어도 말릴 수가……. 그래도 최대한 다른 쪽으로 시선을 끌어보려고 노력은 했소이다!”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것이, 지은 죄를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어린아이 같이 느껴졌다.

그래. 말하는 토끼라는 것을 들키면 무슨 소란이 일어날지 모르니 어쩔 수 없었겠지.

필로우는 용서해 주자.

“아니에요! 제가 봤는데 저 녀석, 말리기는커녕 몰래 뒤에서 전부 지켜……”

“마, 말하지 마시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비밀을 들킨 나머지 순간 뒤를 돌아본 필로우.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빨개지면서 다시 고개를 소파 모서리에 박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내가 두 사람에게 실망하고 있던 찰나, 응접실의 문이 열리면서 예의 그 하녀가 들어왔다.

그녀의 뒤에는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봤던, 안경을 쓴 하녀장이 투신(鬪神)처럼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시큰둥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더니, 하녀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저런 사람일까. 어쩐지 내 눈엔 그녀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아뇨. 아무것도.”

나도 모르게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고 말았다. 알 수 없는 패기가 느껴지는 것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거든.

안경을 치켜 올린 하녀장이 우리들을 한 번 쓱 훑어보더니, 누군가를 소개시켜주려는지 옆으로 한발 물러났다.

“주인님.”

나는 그녀의 뒤에 있던 인물을 보고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젯밤엔 자고 있어서 인사를 못했구나. 아이에겐 많이 피곤할 시간이었으니.”

세상에 인연이란 게 정말로 있는 것일까? 어떻게 여기서 이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그러고 보니 서로 소개를 한 기억이 없구나.”

당신의 이름을 모를 수가 있을까. 서로 소개를 한 적은 없어도, 이미 이곳에 들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겠지.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는,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노신사가 내게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에반슈트 가문의 가주. 린셀이라고 한단다.”

* * *

위그드라실이 의문의 여인을 만나 에반슈트 저택으로 향했던 그 시각.

핀과 싱의 싸움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하악. 하악. 이제 그만…… 끝내요…….”

“헉. 헉. 나도 동감이다.”

핀은 변신이 풀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싱도 여기저기 멍들고 찢어진 상처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금방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지만, 오기와 상대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새벽부터 밖에 나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지쳐 쓰러질 것 같은 그들의 모습을 힐끗힐끗 쳐다보고는 옆으로 지나쳤다.

몇몇 사람들은 그들의 싸움이 재미있는지 근처에 앉아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두 사람을 알아보는 구경꾼들도 있었다.

“저 사람, 투제 아니야?”

“그리고 여자애는 무투대회 우승자 같은데?”

유명인이나 마찬가지인 두 사람의 싸움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는 구경꾼들.

하지만…….

“으으! 머리는 잡지 말라고요!”

“너야말로 할퀴지나 마!”

그들의 싸움은 체력고갈로 인해 어린아이들의 막 싸움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마법이 봉인된 핀과 맞먹는 체력과 힘을 지닌 싱.

하지만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만나면 미지근한 물이 되듯이, 그들의 엇비슷한 힘은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깎여 나가더니 이제는 완전히 고갈되어 녹초가 된지 오래였다.

“……우리가 착각했나 보다. 그 유명한 투제랑 우승자가 저런 싸움을 할 리가 없잖아.”

“주변이 아주 난장판이 됐길래 화려한 싸움을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벼.”

“그냥 가자고.”

그들의 싸움에 실망한 구경꾼들이 떠난 뒤에도 한참이나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움을 계속하던 두 사람은, 결국 제 풀에 못 이겨 바닥에 쓰러져 몸을 뒤섞고 말았다.

“크윽! 어딜 만져! 어딜 만지냐고!”

“만지긴 뭘 만져!”

싱 아래에 깔린 핀이 그를 밀쳐내며 소리를 질렀지만, 싱은 오히려 그녀를 더욱 압박하며 몰아붙였다.

……그 모습이 상당히 남사스러웠기에, 시간이 지나며 슬슬 늘어가는 주변 시민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꼭두새벽부터 뭐하는 거야. /애정행각은 본인 집구석에서 좀 하라고./”

“굉장히 격렬하군.”

그렇게 바닥에서 구르며 싸움을 계속하는 두 사람.

하지만 무슨 일이든 결국 끝은 있기 마련이기에, 부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이 주먹을 불끈 쥐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제…… 끝내자.”

“좋아요.”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상대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컥!”

“윽!”

마지막 최후의 힘까지 끌어올린 그들의 주먹은 지칠 대로 지친 서로의 육체와 정신을 쓰러트리기에 충분했고, 결국 크로스 카운터를 보여주며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제…… 길…….”

“크윽…….”

그렇게 두 사람이 정신을 잃은 사이, 옆에서 싸움을 지켜보다 깜빡 잠이든 란이 깨어나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저기, 이제 끝났어?”

그녀가 쭈그려 않아 싱과 핀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이미 기절한 두 남녀가 깨어나는 일은 없었다.

“하아. 싸움 좋아하는 사람들은 죄다 바보야.”

불만에 가득 찬 채 기절한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며, 란이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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