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26화 (12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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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결투(4)

달이 기울며 서서히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

새벽이 밝아오며 어둠이 걷히고 별들이 따라 사라지며 태양이 떠올랐다.

“헉. 헉.”

“하아. 하아.”

그리고 두 남녀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맑은 새벽공기를 들이마시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이 싸우는 곳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소리만 듣고 있던 란이 따분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좀 조용히 싸우세요.”

“헉. 헉. 왜. 무슨 오해.”

“부부들이 하는 운동하는 줄 알겠습니다. 그것도 실내에서 즐겨야 할 걸 야외에서 즐기는 줄 착각할 테니,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헉. 헉. 대체 무슨 소리야.”

란이 말하는 바를 알아듣지 못하는 싱과 다르게, 핀이 그녀가 있는 방향을 매섭게 노려보며 거친 숨과 함께 투덜댔다.

“하아. 하아. 그런 저질 농담은 사양이에요.”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 싸움이 끝나면 다음은 당신 차례일 줄 알아요.”

더 말하고 싶지만 거친 숨이 목까지 차올라서 핀이 말하기를 포기했다.

괜히 숨을 참아가며 말을 했더니 단내가 더 심해지고 갈증까지 치솟아 입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아직도 더 싸울 힘이 남아 있나? 내가 본 여자 중에 제일 남자답군.”

“하아. 하아. 자꾸 남자 남자 거릴래요? 지구였으면 당신 벌써 사회적으로 매장이었어요.”

“너도 란도 뭔지 모를 소리만 자꾸 하는군.”

“당신이 너무 둔한 거예요.”

핀이 말하는 사이에 갑작스레 싱이 공격을 개시했다.

정수리를 내리찍는 그의 발차기가 번개처럼 쇄도했지만, 핀이 양팔을 들어 그 공격을 막아냈다.

이제는 더 부서질 곳이 없는 공터에 또 다른 균열이 생기며 가뭄이 든 마른 대지처럼 갈라졌다.

“남자 남자 거리더니 비겁하게!”

“싸움에 비겁한 게 어디 있나. 싸움에는 이기는 놈이랑 지는 놈밖에 없다고.”

그가 말하는 것이 얄미워서 핀이 싱의 입을 바늘로 꿰매는 상상을 했다. 어째 말투는 상남자 같은데 하는 짓은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

“좀 더 제대로 싸워보라고.”

“그럼 이 이상한 봉인이나 좀 풀어주세요.”

“마법 쓰려고?”

“네.”

“그건 안 돼.”

핀이 주먹을 꼭 쥐며 반박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아까부터 계속 반박해봤지만 ‘남자답다’느니 싸움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느니 계속 자기 주장만 펼치니 더 이상 상대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싸움이란 자고로 주먹과 주먹이 오가는 것. 마법만큼 비겁한 게 어디 있나.”

“아까는 싸움에 비겁한 게 어디 있냐면서요!”

“마법은 논외야. 그건 비겁의 왕이라고. 싸우는데 눈이 아파서 짜증나.”

화가 난 핀이 마법을 사용하려 했지만, 여전히 마법은 발동할 수 없었다.

몸 내부에서 마력이 분출되지 못하고, 계속 맴돌고 있는 것이다.

“너도 싸움의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싱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자, 그럼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싸워볼까.”

핀도 자세를 잡았다. 싱의 공격은 언제 어디에서 날아올지 예측하기 힘들었기에 미리 대비를 해야만 했다.

“빨리 끝내자구요.”

이미 해가 밝아 아침이 되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간 위그드라실이 크게 걱정할지도 몰랐다.

싸움을 빨리 끝내기 위해 핀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싸우려 했지만, 이어진 싱의 말 한마디를 들으니 다시 분노가 치솟았다.

“이렇게 즐거운 데 왜 그리 서둘러. 집에 두고 온 꼬맹이가 걱정이라도 되는 거냐?”

핀의 붉은 눈동자가 한순간 살기로 번뜩였다.

* * *

익숙한 천장이다.

……가 아니라 처음 보는 천장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숙소도 아닌, 남의 집에 와서 잠을 잤으니 모르는 천장이 보일 수밖에.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었어.

왜, 때때로 이런 게 해보고 싶을 때도 있잖아. 괜히 책상 서랍을 열며 미래로 가는 타임로드가 있나 찾아보고, 어느 날 너구리 같이 생긴 고양이 로봇이 찾아와서 “안녕. 난 미래의 네가 널 도우라고 보낸 로봇이야”라고 말해주는 것도 기대해 보고.

심지어 이름을 적으면 적힌 사람이 죽는 노트를 상상하며 싫어하는 아이의 이름을 적는 경우도 있지.

진짜로 죽으면 죄책감에 소름 돋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아무 걱정 없이 적어 버리지.

“아침이네.”

창문에 쳐진 커튼 너머에서 빛이 들어온다.

유리를 통과한 아침햇살이 은은하게 방 안을 밝혀주고 있다.

기분은 솔직히 좋다. 적당히 푹신푹신한 침대와 적당한 높이의 베개가 나를 포근한 잠으로 이끌어 주었고, 부드러운 실크 잠옷이 깃털처럼 내 몸을 감싸주었다.

솔직히 실크 잠옷은 조금 별로였어.

자꾸 옷이 미끄러져서 가랑이가 꽉 낀다고. 무의식적으로 자꾸 손이 간단 말이야.

“일어나셨습니까.”

“아. 네.”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아침부터 갑자기 움직이려니 몸이 나른하고 귀찮아 잘 움직이지가 않는다.

안으로 들어온 여성은 만화 속에서나 볼 법한 메이드 복을 입은 여성이었다. 청초한 분위기가 나는 그녀는 단아한 모습으로 나의 시중을 들기 위해 곁에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내 손을 잡고 천천히 아래로 이끌어 준 그녀가 곧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무슨 행위인지 잘 알고 있었다.

보통 귀족들에게 해준다는 ‘옷 갈아입히기’가 아니던가!

깜짝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을 치는 바람에 단추가 뜯어져 바닥에 굴렀다.

메이드가 가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줍더니, 어디선가 반짇고리를 꺼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옷을 입은 채로 단추를 다시 꿰매는 그녀의 손놀림은 매우 능숙해서 혹시 재봉 쪽의 프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 됐습니다.”

“아. 응. 고맙습니다.”

메이드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녀가 허리 숙여 내게 인사했지만, 감사의 인사 뒤로 다른 말이 뒤따라 왔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에게 존댓말은 주인으로서 옳지 않습니다. 부디 주인으로서 격식에 맞는 말을 사용해 주십시오.”

“으, 응.”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어젯밤 이곳에 와서 처음 들었던 말이니까.

“당신은 저희의 주인이십니다.”

안경을 쓴 깐깐한 비서스타일의 메이드가 무섭게 말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마 그 사람이 메이드장으로서 다른 메이드들을 모두 관리하는 총책임자였을까.

“그럼 다시…….”

“으아앗!”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자꾸 내 옷을 벗기려는 이 메이드의 행동을 말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의 역할이 뭔지는 잘 알고 있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수발을 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야. 손도 있고 발도 있는데 옷까지 갈아입힘 당해야겠냐고.

“잠깐. 멈춰요. 옷은 내가 갈아입을거니까.”

“하지만 이것 역시…….”

쉽게 물러나지 않으려는 메이드. 직업 정신이 철저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모순된 두 가지 명령이 충돌하면 어떨까.

“제가 당신의 주인이라고 했죠?”

“예. 당신은 저희…….”

“그럼 옷은 내가 알아서 갈아입도록 해줘요. 그게 더 편하니까.”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위그드라실의 말에 따르겠다는 긍정의 뜻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서 이제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그녀가 나가지 않고 문 앞에 다소곳이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기 미안한데 밖에서 기다려주면 안 될까?”

“안됩니다.”

“명령인데도?”

“명령이라 할지라도, 그것만큼은 불가합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완고한 철벽녀처럼 이것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어차피 나의 순결(?)은 옛적에 사라진 지 오래다.

딱히 보인다고 문제될 것도 없으니 나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없겠지.

응? 근데 왜 나가라고 했냐고?

……나야 상관없는데 상대도 상관없을지는 모르니까 예의상 물어 본거라고 해야 할까? 때로는 보여주는 쪽보다 보여 지는 쪽이 더 상처를 입는 경우도 많으니까.

상대방도 상관없는 것 같으니 그냥 포기하고 옷을 훌러덩 벗었다.

귀족가의 침실에서 동네 꼬마애처럼 옷을 마구 벗어대니 뭔가 기분이 묘했지만, 귀족이 옷을 어떻게 벗는지 아는 바가 없었기에 인간시절의 내 버릇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버렸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메이드가 내게 옷을 건네주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여자아이용 원피스였다.

원피스가 여자아이용 말고 또 뭐가 있겠냐마는, ‘여자아이’라는 것이 내게 크게 다가왔으므로 강조의 의미인 것이다.

“……저기.”

“말씀하시지요.”

굉장히 부담스럽다.

말을 바꾸는 게 아니다. 그래. 보여줘도 상관없다 이거야. 보여준다고 해서 닮는 것도 아니잖아. 딱히 상관없어. 이건 내 본체가 아니야. 정령체야.

그러니까 괜찮다고.

“너무 빤히 보는 거 아니야?”

근데 거기(?)에 시선을 딱 집중한 채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까 부담스럽잖아.

부담을 떠나서 민망하다고!

“죄송합니다. 신기해서 그만.”

대체 뭐가 신기한 건데! 다 큰 처자가 설마 성교육도 안 받은 거야? 한 번쯤(?)은 봤을 거 아니야!

아니지. 화 내지 말자.

여기는 조금 발전하긴 했지만 그래도 17세기에서 18세기 정도로 보이니까. 성교육을 안 받았을 수도 있지.

그래. 무지가 죄는 아니잖아?

“실례지만 잠시 확인 좀 해봐도 되겠습니까?”

“…….”

너무 놀라면 목소리가 안 나온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목 언저리에서 비명이 턱! 하고 후두개에 걸려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내 영혼은 어서 비명을 지르라고 밀어 올리는데, 목이 너무 놀라 굳은 나머지 그걸 다시 밀어 넣고 있다.

“뭘…… 확인해? 설마…….”

나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부정의 표시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계속 뚫어져라 보고 있거든.

“아니, 뭘 확인하고 싶은 건데.”

“가짜인가 진짜인가 궁금합니다.”

‘변태’라는 말이 입으로 올라왔다 사라졌다.

그럼 진짜지 가짜겠냐!

“확실히 남자분이시군요.”

갑자기 심장이 뜨끔거린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처럼 입고 다녔으니, 그것(?)이 달린 걸 보고 놀랐을 수밖에.

나는 옷을 입는 것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지금이 좋은 기회다. 나는 남자다. 그러니까 남자옷을 줘.

그렇게 그녀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실패다. 통하지 않았다. 제길. 나한테 초능력이 있었더라면…….

그냥 텔레파시는 포기하고 직접 입으로 말하자. 입이 있는데 굳이 쓸데없는 노력을 할 필요는 없잖아.

“남자 옷으로 줘. 난 남자잖아.”

“아뇨.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대체 무슨 취미냐. 설마 날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괴롭히려고 데려온 건가.

“……난 남잔데도?”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주무시고 계실 때 이미 확인하셨다고, 마님께서 벌써 알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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