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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결투(3)
“위그드라실 님.”
나의 부탁에 따라 필로우와 아라디온이 나와 함께 핀의 뒤를 추적하고 있었다.
어두운 거리엔 지구에서 봤던 가로등과 같은 물건이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향기가,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왜?”
아쉽게도 핀과 싱을 쫓으려고 했을 땐 이미 사라진 뒤여서 쫓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아라디온이 사라진 사람을 쫓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추격할 수 있었다.
아라디온은 마치 소설 속에 나오는 사냥꾼처럼 흔적을 보고 사람을 쫓을 수 있었다.
흔히 알려져 있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보고 쫓는다거나, 바닥에 남겨진 발자국의 흔적을 보고 쫓는 것이 아니었다.
“보폭이 상당히 크네요. 이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래. 어서 쫓자.”
그냥 아무것도 없는데 쫓는다. 내가 신기해서 물어봤더니 하는 말이, 아무것도 없는 땅일지라도 자세히 보면 발자국이 남는다고 했다.
내 눈엔 발자국은커녕 흔적이라곤 눈곱만치도 안 보이는데.
어디서 배운 거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허허 웃으면서 자기가 여행했던 곳에서 어쩌다보니 배웠다고 은근슬쩍 넘어갔다.
굳이 지금 캐물을 필요는 없겠지. 도움이 되니까. 우선 핀을 쫓는 게 급선무다.
“그런데 위그드라실 님?”
“자꾸 왜.”
“꼭 이런 복장으로 쫓아가야 하나요?”
우리는 지금 선글라스처럼 검게 칠해진 안경을 쓰고, 챙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미행에 빠져 있었다.
그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아라디온이 자꾸만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어디서 구했냐고? 아직 닫지 않은 가게가 좀 있더라고.
“원래 미행이란 건 이런 식으로 하는 거야.”
“흐음. 그런가요. 제가 아는 거랑 좀 다르네요.”
“네가 아는 미행은 어떤데?”
“일반인으로 변장해서 평범한 모습으로 일상에서부터 접근하는 것이 미행 아닌가요?”
“뭐야 그게. 암살자냐.”
어색하게 웃으며 아라디온이 핀의 흔적을 계속 추적하였다.
우리들은 그를 믿는 수밖에 없었기에 다른 선택지 없이 그저 뒤를 쫄래쫄래 따라갈 뿐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른 걸까?”
그냥 쫓아가기만 하려니 심심해서, 나는 싱과 핀이 왜 만난 건지 한 번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글쎄올시다. 소인의 생각으론 약속을 못 지켜서가 아닐까 싶소만.”
“약속?”
“원래 우승자와 결투를 하기로 하지 않았소이까? 그게 마음에 걸려서 온 게 아닌가 싶소이다.”
“그럼 이 시간에 싸운다고?”
다른 어른이, 이제 막 숙녀티를 벗고 어른이 된 사회 초년생 분위기의 핀에게 오밤중에 와서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서 ‘야. 너 나랑 싸울래?’라고 할까.
“내 생각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 * *
“하하! 달밤에 싸우니 참으로 흥겹지 아니한가!”
핀이 거리를 좁히며 쉴 새 없이 주먹과 발을 날려대는 싱의 공격을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피했다.
그녀는 지금 날개가 돋고 반룡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발 입 좀 다물고 싸워요!”
핀은 지금 전신의 힘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자신을 밀어붙이는 싱을 보며 핀이 치를 떨며 짜증을 부렸다.
그녀는 상상도 못했다. 벨루스의 마력을 극도로 끌어올린 자신을 몰아붙일 수 있는 상대가 있으리라고는.
천 년 전, 벨루스를 이길 수 있었던 자는 마왕뿐이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 힘을 사용하는 자신이 밀릴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즐겁지! 설마 네가 그 엘퀴라즈 숲의 광룡일 줄이야!”
싱이 공중에 떠서 달빛을 받고 있는 핀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엔 즐거움뿐만 아니라 싸움에 미치고자 하는 광기마저 서려 있었다.
“숲으로 찾아갈 필요도 없이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는걸.”
“전 광룡이라고 한 적 없는데요.”
핀은 딱히 자신의 정체를 말한 적이 없었다.
그날 살아 돌아간 병사들의 증언에 의해 자신의 모습이 세상에 알려졌다 하더라도, 그때는 변신한 후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최소한 숲 근처에서 이 모습으로 마주쳤다면 모를까, 여기는 전혀 다른 곳이지 않은가.
한 번에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아. 거짓말은 남자답지 못해.”
그러나 싱은 이미 그녀의 정체를 광룡이라 단정 짓고 있었다. 그의 말에는 자신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족장. 저분은 남자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여잡니다.”
“그런 고리타분한 걸 말하는 게 아니야. 뜨거운 마음이, 싸우고자 하는 투지가 있다면 충분히 남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아까도 말했지만 제발 입 좀 다물어 주세요.”
싸우면서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끊임없이 주절대는 싱에게 핀은 진절머리가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남자라니. 전 여자라구요!”
“그러니까 겉모습은 상관없고 그 투지가 남자답다는…….”
“으으. 여자는 싸움 좋아하면 안 되나요?”
“당연히 남자가 좋아하지. 싸움 좋아하는 여자는 본 적이 없군.”
자신의 성 정체성을 부정하는 싱의 말에 핀의 마음속에 작은 상처가 생겼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인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지 않은가.
“슬슬 짜증나려고 하니까. 제대로 가 드릴게요.”
핀이 마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후우. 이거 재미있겠군.”
싱의 모습은 그녀와 싸우려는 것이 아닌, 천 년 전 용사의 가문에 의해 토벌당했다는, 광룡에게 도전하는 영웅의 모습처럼 보였다.
“자. 그럼 어디 싸워볼까?”
* * *
“위그드라실 님은 그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흐음. 내 생각에는 아마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들려주려는 것 같은데. 왜, 원래는 우승자랑 싸우기로 했었잖아. 근데 못 싸웠으니 그 일에 대해서 설명해 주려는 게 아닐까?”
“굳이 이 시간에 말씀이십니까?”
“그럼 다른 이유가 있어? 나는 이것 말곤 안 떠오르는데.”
흔적을 찾으며 핀의 뒤를 추적하던 아라디온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곧 결심을 했는지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위그드라실 님.”
“응?”
“아까도 이미 숙소에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남녀가 밤중에 단둘이 만난다면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
그러고 보니 그것 때문에 밖에 나온 거였지.
하지만 믿고 싶지 않다. 핀이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 아가씨가 그럴 리 없잖아 라고 생각하셨죠?”
“……궁예냐. 독심술 써?”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굴만 봐도 답이 나옵니다.”
나는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싶다. 남녀 간의 사랑이 싹트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는 ‘우정형’사랑이 있기도 하지만, 찰나의 순간 서로 반하는 ‘에로스형’ 사랑도 있다.
하지만 그 ‘에로스형’ 사랑이 핀과 투제 사이에 싹 텄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니, 어쩌면 팔씨름을 하면서 일어났던 것일지도.
서로 손을 맞잡는 순간, 전기가 찌르르 울리면서 함께 시선을 맞추는 팔씨름을 겨루는 사이에…….
나는 필사적으로 이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변명 아닌 변명을 시작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게다가 두 사람만 간 게 아니잖아. 아까 보니까 옆에 다른 여자애도 있더만.”
“너무 순진하십니다. 당연히 일대일로 만나자고 하면, 서로 호감이 싹튼 상태라도 부담스러워서 안 만나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 여자애는 일종의 방패인 셈이죠. 동성의 사람이 한자리에 있으면 부담이 줄어들 테니까요.”
아라디온이 연애박사라도 되는 듯이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걷다가, 미리 언질을 해둔대로 분위기 좋은 장소로 가서 ‘나 화장실 다녀올게’라면서 은근 슬쩍 빠지면 끝 아닙니까? 그럼 두 사람만 남게 되고, 결국 그렇게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호감이 사랑으로 바뀌는 거죠.”
상상하기도 싫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라디온이 손가락을 추켜세우며 핀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상상했다.
“아마 시간이 꽤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손을 잡는 단계까지 발전하지 않았을까요?”
* * *
핀과 싱이 서로의 손을 마주 잡으며 힘겨루기를 시도했다.
금방이라도 팔이 꺾일 것만 같았지만, 처음 팔씨름을 했을 때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일절의 미동도 없이 팽팽한 힘겨루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크윽.”
“이봐. 마법은 더 안 쓰는 것이냐?”
굳이 대꾸해 주고 싶지 않은 핀이 힘을 더 주며 그의 허리를 꺾어버릴 듯이 짓눌렀다.
하지만 살짝 넘어가려던 그의 허리는, 곧 원래대로 돌아오며 다시 팽팽한 힘겨루기 상태로 돌아왔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남자끼리 힘겨루기 하는데 마법 같은 치졸한 걸 쓰면 안 돼지. 안 그래?”
핀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마법을 사용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싱이 달려와 그녀의 몸에 손을 대자 마력이 밖으로 분출되지 않았다.
마력을 밖으로 꺼낼 수가 없으니, 신체능력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육체적 능력만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난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니까!”
* * *
아라디온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굳은 표정으로 내게 악마처럼 속삭였다.
“어쩌면…….”
“어쩌면?”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은데도 나의 마음은 이미 홀라당 넘어가 버렸기에, 나도 모르게 맞장구를 쳐주고 말았다.
“키스까지 갔을지도 모르죠. 서로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각자의 눈동자 속에 비춘 상대의 모습을 보며…….”
* * *
핀이 박치기를 하듯 싱의 머리에 이마를 처박았다.
싱도 지지 않고 이마로 핀의 머리를 밀어붙였다.
“역시 그 장갑, 뭔가 있어.”
장갑에 닿는 순간부터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마법을 봉인당하는 짧은 순간에, 핀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장갑에서 세계수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는 것을.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기면 알려준다고. 그러니까 좀 더 힘을 내봐.”
“그냥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냐!”
“규칙은 규칙! 이기면 알려준다!”
* * *
“그만! 더 이상 듣지 않겠어!”
아라디온의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기에, 그의 말을 부정하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애초에 너, 연애경험 얼마나 있어? 경험도 없으면서 뇌피셜로 말하는 건 아니겠지?”
“뇌피셜이요?”
“상상력이라는 뜻이다.”
“아뇨. 상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도 연애경험은 있다구요.”
“몇 번?”
“으음. 두 번? 아니 세 번이었나?”
크윽! 생각보다 많다. 심지어 나보다 많잖아!
참고로 나의 연애경험은…… 없다.
제기랄. 나보다 경험이 많은 녀석이니 이거 안 믿을 수도 없고.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필로우. 왜 그래?”
“주공. 왜 그러시오?”
근데 생각해 보니, 필로우는 내 품에 안겨 있잖아?
그럼 대체 누구지?
나는 그 자리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시야를 가리는 하얀색 드레스에게 덮쳐졌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