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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24화 (12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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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결투(2)

숙소로 돌아온 우리들은, 저녁식사가 끝난 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

“아빠. 많이 피곤하세요?”

“조금…….”

정확히는 나만 피곤했다.

하루 종일 사람이 많은 곳에 있었더니, 딱히 몸을 쓴 것도 아닌데 피로에 푹 젖어버렸다.

“조금이 아닌데요. 한쪽 눈이 벌써 감겨 있어요.”

어쩐지 시야가 좁더라니. 내 몸이 내 의지를 벗어난 것인가.

침대에 누워서 베개를 벴더니 아라디온이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그리고 내 배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내가 애냐.”

“굳이 애가 아니더라도 이 방법이 효과가 있더라구요.”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 말을 하니까 별로 믿음이 안 간다.

그냥 놀리는 것처럼 들리거든?

“으으…….”

근데 자꾸 눈이 감긴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본능이 자꾸만 눈꺼풀을 끌어내린다.

안 돼. 지금 잠들면 아라디온 말처럼 된다고. 나는 애가 아니야. 엄연한 성인이라고.

“그냥 포기하시죠.”

“시, 싫어……!”

티격태격 싸우고 싶지만,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만 내 몸은 이미 통제 불능상태였다.

결국 감겨오는 눈꺼풀 너머의 익숙한 어둠이 시야를 점령했을 때, 나는 몰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기고 말았다.

쨍그랑!

하지만 잠이 들기 일보 직전, 갑자기 창문이 깨지면서 유리파편이 침대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으힉!”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굴러 몸을 피신했다.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이마를 바닥에 부딪쳐 얼얼한 통증이 이마에 작은 혹을 만들어 버렸다.

“괜찮으세요!?”

아라디온은 손에 유리조각들을 들고 있었다.

떨어지던 유리파편들은 침대 위에 한 조각도 도착하지 못했다.

파편들이 날아오는 순간 손으로 전부 잡은 것인가.

“……그냥 날 잡아서 피해주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잘 구르시던데요 뭘. 파편은 떨어지면 치우기 귀찮잖아요.”

크윽. 청소하기 귀찮아서 나를 버린 것이냐!

우선 이 문제보다, 누가 돌을 던진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창문으로 향했다. 깨진 창문 너머 1층으로 두 명의 사람이 보였다.

“흐음. 너무 셌나.”

“족장. 대체 돌은 왜 던지신 겁니까?”

“보통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땐 이런 식으로 부르던데? 몰래 집에 접근해서 창문에 돌을 던지면, 여자가 고개를 내미는. 책에서 봤다고.”

“……족장이 무슨 왕자님입니까? 그리고 지금 건 호출이 아니라 명백한 공격이었습니다.”

“이거나 그거나.”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었다.

팔씨름을 하던 늑대족 아인이자, 모험가들 사이에서 투제(鬪帝)라고 불리던 싱이라는 양반이었다.

옆에는 이름 모를 소녀가 한 명 그에게 태클을 걸고 있었는데 머리 위로 솟은 둥글둥글한 귀로 보아선 그녀 역시 아인인 듯싶다.

“아. 꼬마야. 안에 핀 있니?”

“……남의 집 유리창을 깨놓고 용건부터 말하는겁니까.”

얼굴에 철판을 깐 건지 아니면 원래 둔한 건지 싱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핀을 찾고 있었다.

“아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샤워를 하러 들어갔던 핀이 소란에 놀라 밖으로 나왔다.

핀은 수건 한 장만 간신히 걸치고 있었다. 몸에 남아 있는 물기 덕분에 수건이 간신히 핀의 몸에 매달려 있는 판국이었다.

“핀. 알몸은 보이기 부끄럽다며.”

“알몸이 아니잖아요? 수건 둘렀는데요?”

“그쪽이 더 위험해…….”

약간 이상한 논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알몸만 아니면 된다 이거냐! 세상의 남자들은 알몸보다 그런 쪽(?)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아앗! 당신!”

나의 생각이 어떻게 됐든 간에 핀이 창가로 다가와 싱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소리 질렀다.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오. 너를 찾으러 왔는데 때마침 있었군.”

“오늘 대체 어디갔던 거예요?”

아무래도 핀은 그와 싸우고 싶었나보다. 목에 핏줄을 세우면서까지 소리를 지르는 걸보니.

“일이 좀 있어서 말이지.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거 아니겠나.”

싱이 핀을 올려다보면서 은근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이 뭔가 므흣한 것 같아서, 나는 핀을 뒤로 잡아끌었다.

“핀. 우선 옷부터 입자.”

“으으. 네.”

옷을 다 갈아입은 핀이 문을 열었다.

“아빠. 저 잠시 나갔다올게요.”

“응. 일찍 들어와야 된다?”

“넵!”

활기차게 손을 들며 대답한 핀이 밖으로 나갔다. 나는 창문 너머로 핀이 싱과 만나는 모습을 쭉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었길래 그래요?”

“여기서 이야기하긴 좀 그렇고, 어디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흐음.”

잠시 고민하던 핀이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보았다. 나는 수락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유명한 인물인데 무슨 짓이라도 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 핀.”

“금방 다녀올게요.”

싱과 함께 사라지는 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뭔가 찝찝한 마음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왜 그런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기분이 왜 이럴까.

이럴 땐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편이 좋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일수록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법이니까.

“아라디온.”

“왜 그러십니까?”

“핀을 보내고 나니까 기분이 이상해. 꼭 어금니에 고기가 낀 것같은 느낌이야. 찝찝하단 말이지.”

“흐음.”

아라디온이 잠시 고민하더니, 내가 바라던 대로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주었다.

“아마 밤늦은 시간에 외간남자한테 딸을 보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나 지금 핀을 잘 알지도 못한 남자랑 만나게 밖으로 내보낸 거잖아?

찝찝함의 원흉을 찾아냈다. 피곤하긴 하지만 이대로 자기엔 마음이 탐탁치 못하다.

“아라디온. 필로우.”

그럼 이제 내가 할 일은 단 한 가지.

“몰래 미행하자.”

* * *

밖으로 나온 핀은 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그를 따라갔다.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는 그의 발걸음은 일반인의 달리기와 맞먹는 속도였지만, 핀에겐 그다지 부담되는 속도는 아니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이제 거의 다 왔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에 있는 산등성이 근처였다.

밤늦은 시간인데다, 원래부터 인적이 드문 곳이라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핀과 싱, 그리고 싱의 비서인 란, 이렇게 세 사람만이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마주보고 있었다.

“뭐, 밤늦게 부른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은 잠도 안 올 것 같았는걸요.”

그저 예의상 해준 말이었거늘, 싱은 핀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안 된다. 밤에는 잠을 꼬박꼬박 자줘야 하지. 밤에 잠을 자야 몸이 자라나고 신체가 건강해지거든.”

“족장.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냥 예의상 한 말이에요.”

“예의상?”

“만약 ‘이제 잘 시간인데 왜 굳이 이런 시간에 부르신 겁니까?’라는 말을 들으면 잘 못한 걸 알아도 기분이 나빠질 것을 알기에, 저 엘프가 그냥 예의상 해준 말입니다.”

“으음. 그런 가…….”

정상인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싱은, 의외로 옆에 있는 소녀가 바로 잡아주는 모습이 잘 어울렸다.

싱이 살짝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들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엔 10실버가 올려져 있었다.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무승부였지 않은가. 승리도 패배도 아닌데 돈을 받기가 그렇더군. 규칙은 규칙. 무승부는 돈을 돌려줘야지.”

“그런가요.”

핀이 그가 내민 10실버를 받아 주머니에 챙겼다. 그리고 싱에게 궁금했던 것을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 어디 가셨던 거죠? 경기가 끝나면 우승자와 시합을 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었나요?”

“그게 말이지 일이 좀 있었거든.”

무슨 급한 일이 있었기에 시합에도 나오지 못했던 걸까.

핀은 난감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는 싱을 보고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원래 우승자에게 상품으로 주기로 했던 광룡의 갑옷이 누군가에게 도둑맞아 버렸다.”

“네?”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자신들이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전부 벨루스의 유품인 갑옷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걸 대체 누가? 아니, 어디에 보관했었기에 도둑맞은 거예요?”

“보관이야 안전한 곳에 되어 있었지. 에반슈트 가문의 창고에 잘 보관되어 있었으니까.”

싱은 다시 한 번 그곳의 경비를 생각했다.

확실히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에반슈트 가문이다.

집 주변에 마법사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으며, 기사들도 수시로 순찰하며 저택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 모두 무투대회에 참가했으면 못해도 4강 이상에 진출할 정도의 실력자이었기에, 보통 도둑이 집에 침입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거기다가 광룡의 갑옷이 보관되어 있던 금고는 어떠한가.

금고가 있는 장소는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어서 에반슈트 가문의 피를 이은 자가 아니면 들어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며, 거기에 더해서 가주가 지니고 있는 열쇠가 없으면 금고의 문을 여는 것이 불가능했다.

“장담하건대, 너나 나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면 그걸 훔쳐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 누가 훔쳐간 거죠? 설마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글쎄. 널 의심하는 건 아니다만, 목격자들의 정보에 따르면 네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군.”

“으음.”

자신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니. 핀이 기억을 떠올리며 물건을 훔칠법한 도둑을 떠올려보았다.

“괴도 키드?”

“……그게 누구지?”

“그럼 루팡? 3세이려나. 아니면 그냥 루팡이려나.”

“전부 처음 듣는 이름이군.”

핀이 말한 이름들을 들으며 싱이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긴, 너와 그자의 접점이라곤 한 번 싸운 게 전부일 테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한 번 싸운 게 다라면……!”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이제야 베일 속에 가려진 도둑의 신원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알기엔 자신과 비슷한 실력자는, 그리고 한 번 싸워본 실력자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 마족 소년?”

“그렇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투제도, 핀도 베르제의 얼굴을 떠올려 봤지만 그 모든 것이 귀찮다는 얼굴에서 도둑질 할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다.

“뭐, 그걸 알려주려는 것도 있고 다른 이유도 있어서 널 부른 것이다.”

다른 이유라.

핀은 조금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주먹을 불끈 쥐는 싱의 모습에서 확신으로 다가왔다.

“그럼…….”

핀이 ‘여기서 결투를 할까요?’라고 물으려는 순간, 갑작스레 싱이 그녀의 복부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방심하고 있던 핀이 뒤로 날아가 쓰러졌다. 짜릿한 고통에 손으로 쓰다듬는 그녀에 배엔 은은한 멍자국이 생겼다.

“시합장에서 했어야 할 결투, 지금 해도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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