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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결승전
핀의 경기가 있고 난 다음 날, 우리는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럼 아빠. 저 힘낼게요!”
“그래. 핀. 우승은 못해도 괜찮으니까 다치지만 마.”
“헤헤. 네.”
경기장으로 들어가며 핀은 따로 선수용 입구로 들어가며 헤어졌다.
그리고 경기장으로 들어가자, 전 날과 다름없이 관중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어제의 충격은 모두 잊은 것일까. 아니면 그 충격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흥분이란 마약에 중독된 것일까.
무엇이 됐든 간에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곧 시작될 시합을 기다렸다.
“오늘도 이 자리는 비었네. 이거 우연이야 아니면 마법이야?”
“그러게요.”
예선 때부터 우리가 앉던 자리는 오늘도 비어 있었고, 제일 앞자리인 그곳에 편히 앉아 시합을 볼 준비를 마쳤다.
“깔끔하게 고쳐놨네.”
시합장을 보자, 어제 부서지고 망가졌던 부분이 어느새 고쳐져 있었다.
마법이라도 부린 것일까. 희미하게나마 시합장에서 마력의 향기가 느껴졌다.
“오늘이 마지막이지?”
“일정상으론 오늘 결승까지 진행한 뒤에, 투제와 대결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고 되어 있네요.”
“그래?”
오늘이 지나면 우리의 짧은 여행도 끝이 난다.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잠깐의 대기 시간이 지나고, 시합진행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글라스를 낀 노란 머리의 진행자는 아무리 봐도 천하제일 무도회의 진행자처럼 생겼다.
아쉽게도 그 능력은 떨어지는 모양인지 설명충처럼 시합을 설명하지는 않고, 지금처럼 나와서 시합을 개시한다는 짧은 멘트를 날리고 사라지는 엑스트라 같은 사람이었다.
「어제 있었던 불상사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일이 없으리라 보장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보장하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걸 보니 무슨 조취를 취하긴 했나보다.
「바로 투제님께서 보장하셨습니다. 어제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본인이 직접 나와서 해결하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러고 보니, 어제 투제라는 양반도 있었는데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걸까?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더니, 혹시 핀이 강하다는 걸 알고 그냥 구경만 했던 걸까?
「지금 의심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군요. 어제는 왜 나서지 않았냐고, 진즉에 좀 나서지라며 궁금해 하고 계신 분들도 계시죠?」
독심술이라도 쓰는 거냐. 어떻게 안 거야.
진행자가 VIP석에 있는 투제를 바라보았다.
그가 마법도구에 입을 대고 말했다.
「미안하군. 어제는 똥을 좀 싸느라 늦었다. 싸고 왔더니 이미 다 끝나있더군.」
……그래. 투제도 사람이야.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똥도 싸야지.
“투제 양반 겁나 웃기는구먼.”
“크하하. 똥이라니.”
초등학생이냐. 똥 이야기에 이렇게 빵빵 터지게.
어쨌든 시합진행원에 말에 따라 모든 준비가 끝나고 선수들이 한 명씩 입장하며 시합을 준비했다.
뭐, 시합에 관해서는 따로 말하지 않겠다.
관중들의 함성소리,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선수들의 모습, 시합이 끝나면 엉망진창으로 쓰러진 패자와 별로 승자 같이 보이지 않는 멍든 얼굴의 승자의 모습.
어제랑 별다를 게 없었다.
“핀은 몇 번째 순서지?”
“제일 마지막이네요. 지금 하는 시합이 8강전이라고 했으니, 4번째로군요.”
“일정대로 오늘 중으로 다 끝나겠네.”
한참을 기다리다보니 어느새 핀이 시합할 차례가 되었다.
핀이 모습을 드러내자, 관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여제다! 여제!”
“오오! 어제는 대체 어떻게 그 마족 녀석을 이긴 거야!”
“크으. 도망가지 말고 그냥 볼 걸 그랬네.”
관중들은 핀에게 ‘여제’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보지는 못했지만 베르제를 이겼다는 사실이 그녀를 영웅으로 만들어 준 것 같다.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 같은데.”
“제 눈에도 그렇게 보이네요.”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오던 핀이 관중들이 환호하며 마음대로 붙인 별명을 부르자, 얼굴에 홍조를 띄며 새색시처럼 조신하게 걷기 시작했다.
핀이 다 큰 것 같다. 남의 눈치도 살피다니.
……남의 눈치 살피는 것으로 다 컸다고 단정하는 내 상식에 가슴이 아파왔다.
아직도 전생의 버릇을 버리지 못했군.
“아가씨가 질 리는 없을 테고, 상대가 불쌍하네요.”
“상대도 제법 강해 보이는데.”
근육질이 우락부락한 인간 남성이 거대한 대검을 들고 핀을 노려보았다.
생긴 게 꼭 북두신권에 나오는 세기말 폭주족 같이 생겼다.
“저 머리는 뭘까요?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글쎄. 칫솔 같이 생겼네.”
특히나 주변머리를 빡빡 밀고 가운데를 닭의 벼슬처럼 세운 모히칸 헤어는, 이곳에서도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스타일인지 관중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완전 비웃음 당하는구만.”
그래도 나는 저런 사람이 싫지 않다.
남의 눈초리를 신경 쓰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모습이 멋있게 보이지 않는가.
자고로 남자라면 저래야지.
「시합 시작!」
경기 결과는 딱히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거라고 본다.
그 육중한 대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한 채, 핀의 일격에 모히칸은 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물었다.
관중들은 딱히 피가 튀기는 격렬한 경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크으. 연약해 보이는 소녀가 저런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남자를 이기다니. 이런 시합도 최곤데?”
그렇군. 일종의 대리만족인가.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모습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낀 건가.
근데 피도 눈물도 없다니. 지금 바닥에 쓰러져서 폭포처럼 눈물을 흘리는 모히칸에겐 다들 관심도 없는 거야?
시합을 끝마친 핀이 관중들의 환호에 대답하듯 수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관중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취향을 저격당했는지 훨씬 더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여제! 여제!”
“귀여운 얼굴의 살인마!”
“남자 분쇄기!”
“엘프족 시크릿 웨폰!”
경합이라도 하듯이 핀의 별명을 불러대는 관중들. 하지만 아쉽게도 여제라 부르는 관중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렇게 시합장의 스타가 한 명 탄생했다.
* * *
“하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단조로운 시합들이 끝나고, 이제 마지막으로 결승전만을 남겨두었다.
결승전이라고 해서 딱히 별다를 것이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명목상 결승인데다가 핀이 출전하는 시합이라 나는 억지로 졸음을 참으며 눈을 비볐다.
“이걸로 마지막인가.”
8강전이 끝나고, 4강에서 만난 상대 역시 일격에 끝내 버린 핀이 결승에 도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전생에서 봤던 만화주인공처럼 일격에 상대를 박살 내는 핀의 모습에 관중들은 매력을 느꼈고, 결승전을 앞둔 지금, 관중들의 목소리에서 상대 선수의 이름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불쌍해.”
“누가 말입니까?”
“상대 선수. 저것 좀 봐.”
시합장 위로 올라오는 상대선수의 모습은, 단두대 위로 올라가는 사형수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올라온 걸 보면 나름 실력 있는 선수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거늘, 관중들의 목소리와 강력한 상대인 핀을 만난 것이 시너지가 되어 그의 자신감을 분쇄기에 넣어 갈아버린 것 같다.
축 쳐진 어깨며, 시무룩한 표정이며, 거기다가 핀을 보고 깜짝 놀라서 몸을 떠는 모습까지.
“여제! 여제! 여제!”
그 와중에도 그 선수의 이름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은 채, 관중들은 핀의 별명만 불러대고 있었다.
집단 따돌림의 현장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하는 느낌이다.
「시작!」
시합이 시작되고, 상대선수는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받은 설움을 폭발시키려는지 핀을 향해 달려갔다.
짧은 두 자루의 단검을 사용하는 선수는 핀의 주변을 어지러이 돌아다녔는데, 내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였고 시합장 위에서 더 이상 그 선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어? 핀이 왜 저러지?”
이번에는 조금 이변이 일어날 것 같다.
상대 선수가 보이지 않는 걸까? 핀이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과연. 결승전 까지 올라온 실력이라 이건가.
혹시 핀이 지는 건 아니겠지? 설움을 딛고 일어난 사람은 그 원망과 증오가 더해져서 강한 법이니까.
“끝났네요.”
“응? 끝났다고?”
“저기요.”
아라디온이 손가락으로 관중석 아래의 내벽을 가리켰다.
그곳엔 방금 전, 호기롭게 핀을 향해 달려가던 상대선수가 찰흙처럼 박혀 있었다.
“‘어떻게. 너무 세게 때렸나 봐’라고 아가씨가 혼잣말을 하시네요.”
……그렇군. 이미 처음부터 한 방 먹인 거였나. 혹시라도 죽었을까 봐 걱정한 거였구나.
자세히 보니 상대 선수가 벽에 박힌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부디 사후경직이 아니기만을 빌었다.
진행자가 벽에 박힌 선수에게 다가가 목에 있는 동맥에 손가락을 대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시합장에 올라와 핀의 손을 번쩍 들어주며 외쳤다.
「승자는 핀 선수!」
다행이다. 죽지 않았구나.
시합 관계자들이 나무막대를 가져오더니 벽에 박힌 선수를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떼어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마법도 있는 세계니까 알아서 잘 치료해 주리라 믿는다.
「이번 대회의 우승자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핀의 손을 높이 치켜든 진행자가 외쳤다. 핀이 뿌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경기가 결승전이었다.
너무 간단하게 끝나는 바람에 결승전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우승자에겐 에반슈트 가문에서 제공한 광룡의 갑옷을 상금으로 드립니다! 지금 린셀 대공께서 갑옷을 가지고 나오실 겁니다!」
드디어 우리가 루카스 왕국에 온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진행자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관중들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비늘로 만든 갑옷은 꽤나 유명한지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광룡의 갑옷이라. 그걸 입으면 광룡처럼 미쳐 버린다던데.”
“혹시 입으면 살인자가 되는 게 아닐까?”
“저런 예쁜 엘프가 살인자가 된다니. 그 손에 죽어도 여한은 없겠어.”
“아마 관상용이겠지. 아니면 팔거나 할 거고. 착용할 리가 없잖아.”
“이 바보들아. 광룡의 갑옷을 입으면 미친다는 건, 다 헛소문이라고. 에반슈트 가문의 가주들 중에서 그걸 입고 싸운 가주들도 많은걸.”
갑옷은 이상한 쪽으로 유명세가 있었다.
이것도 다 아버지의 업보 중 하나라 그런지 괜히 내가 얼굴이 빨개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갑옷은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나는 VIP석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할아버지도, 투제도 거기에 없었다.
그리고 관중들의 고개가 뻐근해질 때쯤, 진행자가 보고 있는 통로에서 누군가 나타나더니 진행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들은 그 말을 들을 수 없었지만, 진행자가 깜짝 놀라 외치는 바람에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갑옷이 사라졌다고!?」